알레르 까뮈 : 1913 ~ 1960 알제리아 태생의 프랑스 작가
1936년 알제리아 대학 철학과 졸업.
제2차 세계대전 때 반독일 운동에 가담. 지하신문 발간
1942년 「이방인」을 발표
1957년 노벨문학상 수상 (이방인, 패스트)
19세기의 합리적인 관념론이나 실증주의에 반대하여 서유럽을 중심으로 일어난 철학으로 개인의 자유, 책임, 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적, 문학적 흐름이다. 실존주의에 따르면 각자는 유일하며, 자신의 행동과 운명의 주인이다. 신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고 또한 인간만이 본질보다 실존이 앞서는 존재이므로 스스로 자기 초월에 의하여 본질을 형성할 수 있다는 사상이다.
대표자 : 하이데커. 야스퍼스, 까뮈, 샤르트르, 카프카 등
한국의 실존주의
흔히 전후문학이라고 불리는 작품들로서 전통적인 서사구조가 파괴되고 한계상황과 인간심리에 대한 묘사가 치밀해졌다.
이후 사회부조리에 대한 인식은 참여문학으로 이어졌다.
대표작가 : 장용학(요한시집), 이범선(오발탄), 손창섭(잉여인간) 등
남경우의 이방인 감상문
까뮈에 대한 관심이 다시 생겨서 읽었다. 한 10년만에 읽는건가. 역시 너무 좋다. 10년 전엔 훨씬 더 감격했었겠지.
뫼르소는 대타자적 욕망(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 타자에 대한 인정 욕망)에 얽매이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그를 사형으로 몰고 간다. 오히려 그가 살인을 저지르고 사형을 선고받기 전까지 어떻게 삶을 지속해 왔는지, 직장을 다니고 연애를 했는지마저 궁금할 지경이다. 그에게는 일정한 윤리 체계가 없다. 그에게 있어 모든 행동은 반드시 해야 할 이유도, 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어야 할 이유가 없기에 울지 않고, 마리의 청혼을 거절할 이유가 없기에 승낙한다. 여기엔 어떠한 대타자적 힘의 작용도 개입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의 판단 준거는 그의 '피로도'에 있는 것 같다. 그는 꾸준히 피곤하고, 이 신체 상태는 그의 정신과 행동을 지배한다. 어쩌면 그가 좀 더 건강했더라면 햇살이 덜 눈부셨을 것이고, 아랍인을 죽일 필요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는 대타자의 부름을 절대적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는 단적으로 분열증적 욕망에 대한 감수성이 뛰어난 자다. 그는 어머니의 관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신다(사실 이런 일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특이한 일도 아니다. 이것이 바로 대타자의 성격이다). 어머니의 장례식 다음날 해수욕을 즐기고 마리와 섹스한다. 그러나 그는 상대적으로 대타자적 욕망의 감수성에 있어서 취약하다. 분열증적 욕망을 따르는 것이 곧 사회에서의 추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분열증적 욕망과 대타자적 욕망, 그리고 유전자적 욕망의 배합에 있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결국 사형을 선고받는다. 평론가들은 '이방인'에 대해 뫼르소가 거짓말을 몇 번만 했으면 충분히 살 수 있었다고 흔히 말한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말할 필요가 있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 사형을 선고받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사실들을 다 밝히지 않은 이유는? '피곤'했기 때문이다.
그는 감옥에 면회온 마리를 보면서 그녀를 욕망하고, 감옥 밖의 별과 소리들, 밤 냄새, 흙 냄새, 여름의 평화, 뱃고동 소리를 욕망한다. 이러한 욕망들은 분명 사형될 처지에 배치되는 것이다. 그가 사형을 선고받게 되는 이유는 분열증적 욕망에 대한 과도한 감수성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대타자와 유전자에 대한 취약한 감수성 때문이다. 그는 너무 피곤했기에 대타자와 유전자의 부름을 해석해낼 기력이 없었다. 왜 그 욕망들이 작용하는지를 해석해낼 기력이 없었던 것이다. 대타자가 원하는(대타자가 수용할 수 있는, 대타자를 붕괴시키지 않는 한에서 사형을 면할 수 있게 하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사형당하지 않을 기회를 놓쳐 버린 것이다. 분열증적 욕망에 따르기 위해서는 대타자와 유전자적 욕망에 대한 해석이 요구된다. 그래야만 자신의 분열증적 욕망을 제어하고 구획지어 재창조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그는 죽지 않고 마리와 사랑할 수 있고, 그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다시 살아 보고 싶어진 '삶'을 이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분명 분열증적 욕망이 대타자와 교감하는 부분이 있었다. 살라마르가 개를 잃고 슬퍼하는 것을 보고 어머니를 떠올리고, 셀레스트의 애처로운 증언을 듣고 그를 껴안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그는 좀 더 대타자와 유전자에 대해 생각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조금 덜 피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조금 더 건강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내 결론은 그렇다. 옛날에 '동물'이라는 소설에서도 썼지만(내겐 익숙한 테마다), 그냥 관조하고 비관하려면 죽으라는 것이다. 동물, 즉 '움직이는 물건'이고 싶다면 말 그대로 움직이라는 것이다. 비웃고 외면하기보다는 침뱉고 뺨을 때리라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살아 가는데 더 도움이 되고, 내가 바라는 세계로 조금이나마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동물의 삶의 의미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게 싫다면 그냥 죽으라는 것이다. 바로 여기가 뫼르소와 까뮈가 구분되는 지점이다. 뫼르소는 사형당하지만 까뮈는 '이방인'을 썼다. 뫼르소는 침묵했고, 사회는 그를 살릴 이유가 없었다. 또한 사회는 그만큼 변화할 가능성이 줄어 들었다. 분열증적 욕망은 표현되어야 한다. 그래서 대타자 내부에서 균열을 유도하고 내부에서 다양한 힘들을 소환해 내어야 한다. 혹은 대타자의 힘을 약화시켜 나가야 한다. 보다 많은 분열증적 욕망들이 사회내에 수용될 수 있게 해야 한다. 안타까운 것은 '다시 살아 볼 마음', 즉 창조적 생의 의지가 소설 후반부 사형 선고 후 생겨난 점이다. 그에게는 비로소 대타자적이고 유전자적인 감수성이 서서히 생겨나고 있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벗어날 수 없는 대타자적 단두대뿐이다.
p.s
뫼르소는 레몽이 아랍인에게 총을 쏘려 하자 막는다. 아랍인이 레몽을 죽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까뮈가 말하는 반항은 이런 것이 아닐까? 반항은 자극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기능한다. 반면 사르트르적 혁명은 자생적이다. 물론 기원은 반작용일지 모르지만 반항이 단속적인 반면 혁명은 지속적이다. 바로 이것을 까뮈는 싫어하지 않았을까? 사르트르적 혁명은 억압에 대한 새로운 억압으로 기능한다. 즉 반항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이다. 까뮈는 상대가 칼을 내려 놓으면 나도 총을 내려 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맑스 혁명은 차르 체제하에서 레닌적으로 발생했지만 곧 스탈린적으로 변했다. 스탈린은 적이 칼을 아예 들지 못하게 손목을 자른다. 이런 혁명의 지속성, 맹목성을 까뮈는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반항하는 인간'을 읽어 봐야겠다. 그것도 안읽고 '까뮈는 이러지 않았을까?' 맨날 이러고 있다.
까뮈의 노벨문학상 수상연설문
노벨상 위원회로부터 이같은 영광스런 상을 수상하게 된것은 저에게는 무한한 기쁨이며, 감사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특히 이같은 상이 제 개인적인 능력의 범위를 초과하여 주어지는 것이라 여겨져서 더욱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들, 그리고 보다 뛰어난 지성을 소유한 사람들 즉, 모든 예술가들은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물론 저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제 진정한 모습과 저의 이면에 대한 비교 없이는, 저는 결코 이 같은 결정에 대해 수긍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주 젊은 어떤 사람, 불확실한 부를 소유한 그리고 여전히 그의 일이 진행 중이며, 그의 일의 고독함속에 익숙해져 있고, 모든 이들의 호의로부터 떠나있는 그런 한 사람이 있습니다. 홀로 그리고 스스로 조신하기를 바라고 있는 사람에게, 빛의 영광된 광채로 이끄는 포고, 갑자기 날아든 이 같은 소식, 그런 소식을 들은 그는 어떻게 어떠한 종류의 공포스런 감정을 갖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그리고 더군다나 유럽안의 다른 작가들, 그들 중 가장 위대한 작가들이 침묵하기를 강요당하고, 심지어 동시에 그들의 조국이 끝없는 불행을 겪고있을때 그는 어떠한 마음으로 이런 영광을 안아야 합니까?
저는 충격과 내부의 혼란을 느낍니다. 제가 가졌었던 평화를 되찾기 위해서, 간단히 말씀드리면, 너무나도 풍족한 행운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그리고 제 자신의 성취 안에서 단지 안주하며 살 수 없었던 이후로, 제 전 생애를 걸쳐 저를 지원해주고 있는 것, 그것은 심지어 가장 불합리한 상황 외에는 사실 지금까지 누구도 저를 지원해 주진 못했었습니다. 제가 예술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 작가로서의 임무라고 여겨왔던 그 생각 저는 오늘 그것만을 말씀 드리고자하며, 영광스런 마음과 호의의 감정을 갖고,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간단히 이 같은 저의 생각을 피력하고자 합니다.
제 자신의 경우, 저는 예술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예술을 모든 것의 위에 놓은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만약, 반대로, 그것이 필요한 경우란, 예술이 제 동료로부터 분리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것을 통해 저와 같은 사람이, 그들과 같은 위치에 서서 살아갈 수 있음을 예술이 허락하기 때문일 겁니다. 일상의 기쁨과 고통의 특징지워진 심상을 제공함으로써,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고무시킬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그 예술가는 자신을 사회로부터 분리시킬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예술가를 가장 누추하고, 그리고 가장 절실한 진실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빈번히 예술가의 운명을 선택한 사람은, 만약 그가 다른 사람이 느끼는 것처럼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의 예술도 그리고 그의 차별적인 시선까지도 감수하면서, 곧 그 자신이 다르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술가는 그 자신을 그것 없이는 만들 수 없는 미와 그리고 자신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그 사회의 중간선상에 자신을 세웁니다. 그와 같은 이유로, 진실한 예술가들은 아무것도 꾸짖지 않습니다. 그들은 판결하기보다는 이해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세상을 선택 해야 한다면, 그들은 아마도 니체의 위대한 말처럼, 그와 같은 사회 안에서, 그들이 노동자이건, 지식인이건 간에 마침내는 심판관이 아닌 창조자가 지배하는 사회를 선택할 것입니다.
게다가, 작가의 임무는 어려운 의무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명확하게 그는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헌신안에 자신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그런 이유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혼자가 되거나, 자신의 예술을 빼앗기게 되고 맙니다. 수백만의 병사로 이루어진 독재자의 군대도, 그를 그의 고립으로부터 해방시키지 못할 것이고, 심지어 특별히, 그가 그들에게 동조를 한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한 명의 이름 없는 죄수의 침묵은 - 세상 끝의 이면에서 굴종하기를 거부한 - 작가 자신의 오랜 망명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해내기에 충분하며, 적어도 언제든지, 자유란 특권의 이름으로, 그 침묵을 잊지 않으려 하고, 그리고 그의 예술을 통해서, 그것을 알리고, 또 울려 퍼지기 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우리 중 누구도 그런 일을 해내기에 충분치 못합니다. 그러나 삶의 모든 환경 속에서, 모호하고, 혹은 일시적인 명성 안에서, 군주의 무력 안에 포위되어서, 혹은 그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자유로운 시간을 얻기 위하여, 그 작가는 그를 정당화하게 해줄 사회 공동체의 이념을 획득하기에 이르며, 그와 같은 하나의 상황위에서, 그의 작업의 위대함을 구성하는 두 가지 일에 대한 그의 능력의 한계를 그는 절실히 깨닫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실에 대한 헌신과 자유에 대한 봉사를 말합니다. 그의 일이란 수많은 사람들의 엄청난 가능성을 하나로 묶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예술은 거짓된 것과 그리고 어디서든지 그들을 지배하려하고, 고독을 만들어내는 노예적 태도와는 절대로 타협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나약함이 무엇이건 간에 우리의 지혜의 고귀함이라는 것은, 항상 그대로 지켜내기가 어려운 두 가지 책무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명확히 알고 있는 것에 대한 거짓에의 거부와 탄압에 대한 저항, 바로 그것입니다.
20년 이상 계속된 이 광기의 역사 안에서, 희망 없는 모든 사람처럼 이 격동의 시대의 나의 세대는 무수히 많은 것을 잃어버렸고, 저는 오직 한 가지에 의지하여 살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오늘의 시대를 쓴다는 것이 하나의 명예가 되었던 숨겨진 감정일 겁니다. 왜냐하면 그 같은 행동이 저 자신에 대한 하나의 약속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그 약속은 오직 쓴다는 행위, 그것만이 아닙니다. 특히, 저의 능력과 저의 상황을 고려하여, 그것은 같은 역사를 헤쳐온 모든 사람들과 함께, 우리가 나누었던 불행과 희망을 생각하며, 동시대의 현실을 참아내기 위한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태어나서, 히틀러가 힘을 얻을 때 20살이었고, 첫 혁명의 시도가 시작되는 것을 목격하며, 스페인내전과 함께 그들의 교육이 완결될 즈음, 세계 모든 곳이 전쟁터에 다름 아니었던 2차 세계대전을 맞이하고, 고통 받는 유럽과 그리고 죄수들 - 그들은 오늘날 핵무기의 파괴력이 위협하는 세상에서 그들의 자식을 양육하며, 그들의 작품을 창조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누구도 저는 그들에게 낙천주의자가 될 것을 강요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극도의 절망으로 인한 치욕에 대한 복수심과 그 시대에 허무주의로 빠져드는 사람들의 오류까지도 - 어떠한 논쟁 없이 - 우리들이 이해해야만 할 거라고 심지어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그리고 나의 조국과 유럽의 모든 나라 사람들은 허무주의를 거부하여 왔고, 정의에 대한 욕구가 아직도 우리 곁에 남아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를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역사안의 그 일들이 죽음의 본능에 대항하여, 솔직히 싸웠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격동의 시대를 경험한 예술을 그들 자신을 위해서 창조해야만 할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각 세대는 의심할 바없이 그들의 세계를 개혁하고자 하는 욕구를 느낍니다. 제가 아는바 세계는 개혁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 같은 생각자체가 아마도 저는 더 위대한 것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세계를 스스로의 파괴로부터 막아내는 힘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패한 역사를 상속한다는 것. - 실패한 혁명의 혼란과, 과학기술의 맹신, 신의 죽음, 낡은 이념, 중도적인 힘이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확신해야 될지 알지 못하는 곳, 지성이 그것 자체로 변질되어, 증오와 외압의 종이 되어 버린 곳 - 이 세대는 그 같은 것 자체의 부정으로부터 시작해서, 삶과 죽음의 존엄성을 이루는 그 조그마한 것 그것 안에서 아니면 그것없이라도, 우리는 이 시대를 재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파멸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이 세계에서, 우리의 엄중한 재판관들은 영원한 죽음의 왕국을 건립하는데, 위험을 감수하며, - 그래야 된다는 것을 알고서 - 시간을 다투는 이 정신 나간 경주 안에서, 노예적이지 않는 국가 간의 평화를 부활시키고, 다시 노동과 문화를 조화시키며, 그리고 모든 인간들과 함께 인류의 언약의 궤를 다시 짜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세대가 이 같은 거대한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러나 벌써, 세계 모든 곳에서 진실과 자유를 향한 두 가지의 도전이 일어나고 있으며, 만약 필요하다면, 거리낌 없이 그것을 위해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도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일들이 어디에서 일어나건 우리는 그런 움직임들에 환영할만한 가치를 느끼며, 특별히 그것 자체가 희생되고 있는 곳을 우리는 눈여겨보고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여하튼, 노벨상 위원회가 저에게 주신 어떤 종류의 상을 저는 이 세대에 대한 경의로 돌려야만 할 것입니다. 동시에, 작가의 작업에 대한 고귀함이 인정된 이후에는, 그는 자신이 있어야 할 적당한 곳에 그를 놓아야만 할 겁니다. 그는 함께 싸웠던 동료들과 그의 기쁨을 나누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바램도 없습니다. 비난받을지언정 완강하게, 부조리하지만 정의에 대한 열정으로, 모든 이들의 시선 안에서 수치심이나 자만심 없이 그의 일에 열중하며, 슬픔과 아름다움을 분리시키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그리고 마침내는 그 두 가지 실존으로부터 창조물을 이끌어내기 위한 노력으로, 그는 완강히 이 파괴적인 역사의 흐름 안에서, 그것들을 바로세우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있은 후, 누가 절대의 이념과 지고한 도덕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은 신비에 쌓이고, 알길 없으며 항상 정복당하기 십상입니다. 자유는 위태로우며, 우리의 힘든 삶과 함께 할 수 없을 만큼, 그것은 의기양양합니다. 우리는 이 지난한 길 위에서 우리의 실패에 앞서, 고통스럽지만, 단호하게 이 두 가지 목표들을 향해 진군해야 합니다. 어떤 작가가 지금부터 명석한 의식으로 감히 미덕의 전도자로서 그 자신을 세울 수 있을까요 ? 제 자신은, 한 번 더 말씀드리자면 그와 같은 종류의 사람이 아닐겁니다. 저는 결코 정의와 인간의 희망, 제가 키워왔던 자유에 대한 의지를 포기한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이 같은 동경이 나의 잘못과 나의 결점을 설명해주고는 있지만, 그것은 분명히 나의 작업을 보다 잘 이해시키는 방향으로 저를 도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세계 속에서 자유로운 행복과 그것의 짧은 복원에 대한 기억만으로 그 자신의 삶을 이어오고 있는 절대다수의 침묵하는 사람들은 의심할 바 없이 여전히 저 자신을 지금도 돕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진정한 제 자신을 뒤돌아보고, 저의 한계를 바로 알고, 그리고 제가 가지고 있는 채무뿐만 아니라 제 자신의 지켜나가기 어려운 신조 속에서 저는 더욱더 자유로움을 느끼며, 그것 안에서, 그 상이 지니고 있는 무게와 저에게 내려진 큰 영광에 대한 보답으로, 같이 투쟁하는 사람들과 이 영광을 공유할 것임을 말씀드리며, 그리고 어떠한 특권으로서 이 상을 받지 않고, 오히려 불행과 박해의 편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을 위한 영예를 위해 이 상을 받을 것임을 분명히 밝혀 둡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모든 진실한 예술가들은 매일매일의 침묵 속에서 그 자신을 채찍질 하여 왔으며, 이 성실하며 유구한 약속에 대해 이 상을 수상하기에 앞서, 그들에게 오늘 저는 제 개인적인 감사의 마음을 무한히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느낌; 엄청나면서도 소탈하고, 눈물나게 하면서도 환하게 만드는, 하여간 굉장한 썰이다. 까뮈답다는 게, 바로 저런 거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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