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그머니, 슬그머니, 살그미, 슬그미, 살그니, 슬그니, 살며시, 슬며시, 살긋이, 슬긋이, 살긋, 슬긋, 살짝, 슬쩍…… 이 미묘한 모국어의 행렬을 보세요. 남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조용히 움직이는 모습을 나타내는 부사들이지만, 말의 표정이나 속도는 조금씩 다르지요. 이 시에서 ‘살그머니’는 단순한 부사가 아니예요. ‘살그머니’라는 말의 어감은 시 전체에 리듬감을 부여해주고, 빗방울과 나뭇잎 사이, 햇빛과 나뭇잎 사이, 나와 너 사이의 사랑을 은밀하고 풍부하게 만들어 주지요. 살그머니 다가와 쓰다듬는 봄의 손길 끝에서 만물이 되살아나는 것처럼, 이 시를 읽고 있으면 감각의 문이 열리고 푸른 피톨들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
문학집배원 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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