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노트북

미송 2012. 3. 10. 15:43

 

노트북

 

 


 

 

2004년 가을에 닉 카세베츠 감독이 출산했던 영화 노트북을 보았다. 고슬링 레이첼이 남자 주연분 노아를 맡고 레이첼 멕아덤스가 영원한 연인 역 앨리를 맡은 이 영화는 전 세계인에게 감동을 준 멜로영화다. 토요일 저녁 파일로리에서 다운해놓은 이 영화를 본 후, 이튿날인 황금주말에도 나는 꼼짝을 못하고 어제 본 장면과 대사에 갇혀 오후를 흘리고 있다. 간단없이 표현하기에는 긴 이야기인지라 몇 시간 혹은 반나절을 소요해야 할 각오가 만만치 않다. 그러나 아깝지 않을 것 같다. 열정과 시간에 나름대로의 힘을 쏟아 재 저장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리는 까닭. 이게 다 속수무책 사랑 탓이다.

 

노아와 앨리의 이야기는 열일곱 살 부터 시작된다. 부잣집 딸인 앨리는 천진난만하고 다소 도발적인 연출을 하는 여자 애다. 카니발 축제에서 앨리를 보게 된 노아는 첫 눈에 그녀에게 반한다. 첫사랑, 첫눈에 반하는 일. 해 본 사람은 그 의미를 좀 알까. 놀이기구에 매달린 노아가 한 쪽 팔로 철봉을 잡고 앨리를 협박한다. 나와 사귀겠다고 말하지 않으면 이 손을 놓고 떨어지겠다고, 놀란 앨리는 너와 데이트 해 줄 테니 올라오라고 소리친다.


눈에 비친 이국의 골목길. 앤티크한 주변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앨리의 어깨에 멘 작은 가방이 유난히 앙증맞은 빛을 낸다. 곱슬곱슬한 머릿결이 사랑스럽다. 팔짝 팔짝 걸음을 옮기는 앨리의 원피스 아래 따닥따닥 말발굽 소리를 낼 듯 보이는 묵직한 구두 굽조차 새털처럼 느껴진다. 영원을 실은 발걸음일지라도 첫 순간만큼은 새처럼 가벼운 법이런가. 첫, 첫, 첫 누비던 발자국 소리, 내 청춘의 골목길이 기억난다.


목수 일을 거드는 노아는 어느 날 앨리 부모님께 초대를 받는다. 앨리의 부모는 노아를 보더니 딸의 가난해질 사랑에 가차 없이 백기를 든다. 휘발유에 불꽃을 댕기기 직전 사정없이 격리당하는 불기둥, 이에 어울리는 말은 단절이라기보다 꺼지지 않을 불길 아닐까. 노아는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앨리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러나 훼방꾼의 역할이 남기는 건 두 사람의 단절뿐이다. 앨리는 대학에 들어가고 노아는 아버지가 남겨 준 유일한 집 한 채를 애지중지 다듬기 시작한다. 자신이 너무 가난해서 앨리가 떠났다는 사실이 노아의 가슴에 응어리로 잡힌다.

 


 

허름한 그 집은 앨리와 노아가 첫 키스를 하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 쩔쩔매던 정사의 첫장소다. 창고를 저택으로 꾸며 놓으면 언젠가는 앨리가 돌아오리라 자기 안에 희망을 갖는 노아. 7년간 집을 단장하며 사랑을 기다리는 장면에, 문득 ‘높은 산 꼭대기에다 집을 짓는다’ 라는 유년주일학교 때 부르던 노아할아버지 노래가 떠오른다. 그 노아와 이 노아의 우직한 믿음이 통해서일까. 앨리에게 약혼자가 생겼다. 노아에게는 거금을 들고 찾아와도 결코 팔지 않은 집 한 채가 오똑하게 남았다. 집이란 사랑이 기거할 때만 가치가 매겨질 수 있는 실상의 공간이지 그 나머진 유령의 헛꿈자리일지도 모른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까르륵 거리던 앨리의 눈에 신문 한 장이 날아들고 저택 앞에 우뚝 서서 찍은 노아의 모습이 비친다. 그 순간 뒤로 꽈당 넘어지고 마는 앨리는 노아의 말처럼 구제불능인 여자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들은 열렬히 사랑한 후에는 꼭 태격태격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에 노아가 자주 하던 말이 있다. 너와 난 너무나 다른데 딱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나는 바보이고 너는 구제불능이라는 점이지. 둘 다 미쳤다는 말이다. 그래, 그럴지도. 사랑이 과연 미치지 않고서 가능한 일일까, 조건을 바라지 않고 존재에만 매달리는 맹목에 가까운 광증이 어찌 이성으로 설명될 수 있겠는가.


7년간의 이별이 7년간의 기다림을 낳았다. 진정한 기다림일수록 내성은 뜨겁고 더 부드러워지는 법일까. 노아와 앨리는 다시 첫 호수 첫 시간으로 돌아간다. 마치 타임머신에 오른 동심 마냥 천천히 그러나 화급하게 쏟아지는 호수 끝, 비를 맞는다. 활짝 편 양팔로 앨리가 노아의 꺼지지 않은 불기둥을 껴안는다. 화상을 우려한 빗줄기가 우박처럼 쏟아지고 아침 창가엔 찬거리를 구하러 간 노아의 쪽지가 놓인다.

 

 


 

이튿날 약혼자와 첫사랑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 앨리는 노아에게 또 싸움을 건다. 그 때 노아의 태도가 감동적이다. 7년 만에 다시 만나 처음으로 살을 섞었음에도 소유하려 들지 않는 말투. 부모님이나 약혼자 노아가 시키는 대로 하지 말고 네 자신이 원하는 걸 선택해, 노아가 말한다. 몸 한번 나누고 나면 상대가 전부 자기 것인 냥 지배적으로 변하고, 억세 지기도 하여 간혹 여기저기 떠들어대기도 하는 사람들의 의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부분이다.


다시 돌아갈 거야 소리치며 앨리는 약혼자를 향해 차 머리를 돌린다. 성급히 차를 돌리다 수풀에 처박히기도 하는, 먼지에 가려진 앨리의 뒷모습을 보는, 노아.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이 오묘하게 겹쳐지며 아름답게 짜릿하게 구성된 한 편의 영화를 보며, 작가의 시나리오 구상력과 한시도 신선한 화면구도를 놓치지 않는 닉 카세베츠 감독에게 감동한다. 정말 잘 만든 영화야, 몇 번을 되뇌며 보았는지.

 

 


 

시간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인 듯 영화 속 이야기는 처음부터 열일곱 살 앨리와 노아 그리고 노인이 된 앨리와 노아 두 장면이 복선처럼 전개되는 형식이다. 늙어서 더 아름다울 것도 찬란한 빛도 사라진 앨리 옆에는 늘 노아의 중후한 그림자가 따라다닌다. 앨리는 치매에 걸렸다. 단 5분 정도만 제 정신이 돌아와 노아를 알아본다. 천진난만했던 여자 앨리는 이제 없는 거나 마찬가지. 정신요양원에서 죽음을 맞게 된 앨리를 돌보기 위해 노아는 그녀 곁을 떠나지 못한다. 자녀들이 찾아와 아버지의 귀가를 종용하지만 네 어머니가 있는 곳이 곧 나의 집이라며, 애석해하는 그들을 돌려보낸다.


노아는 앨리와의 약속을 지키려 했던 것이다. 당신을 끝까지 지켜주겠다는 약속. 그녀는 번번이 떠나기도 하여 고통을 남기기도 했지만 노아는 한 번도 그녀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참 멋진 할아버지. 나이 들어 쭈글쭈글 주름이 패였어도 아름다운 모습, 낭만스런 눈동자가 아닌가. 노아 역시도 늙다보니 심장협심증이 생겨 한 달에 두 번 정도 발작을 일으키곤 한다. 그러나 찡긋거리며 간호사에게 노익장을 과시한다. 기억을 잃은 앨리를 보살피려면 자신의 몸이 좀 더 건강해야 한다는 싸인이다.

 

 


 

책 읽어주듯 날마다 똑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남자. 노아는 앨리에게 지난 기억들을 되살려주려고 꾸준히 말한다. 많이 들어 본 음악 이예요, 많이 들어본 이야기예요,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되었나요, 빨리 결론부터 말해주세요. 눈알을 굴리는 앨리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노아는 일기처럼 쌓여가는 그들의 매일을 노트북에 저장한다. 시간은 흐르는 것만이 아니다. 쓰라린 과거의 시간마저 해일처럼 거두어가는 미래는 기적이라서, 정지된 시간을 영원이라 해도 좋으리.


제 기억이 돌아와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죠, 여보. 으응, 한 5분 정도. 우리 옛날처럼 드라이브 합시다, 아니 그 때 그 음악에 맞춰 춤을 춰요. 매일 읽어주는 이야기가 자기 이야기라고 기억난 앨리는 노아에게 천진난만하게 웃는다. 잠시 동안 음악을 틀고 춤을 추고 입을 맞추는 앨리와 노아. 그럼 자동차를 구해서 이곳을 탈출해 볼까 노아가 말하는 순간, 아니 당신 누구 길래 내게 이러는 거예요. 앨리의 정신이 다시 상실의 자리로 돌아가 버린다. 간호사들에게 안겨 주사를 맞는 앨리를 지켜보는 노아의 표정. 그도 점점 쇠약해져 간다. 심장발작이 와서 얼마동안 그녀를 지키지 못한 후, 더 깊어진 연민의 발걸음을 그녀 있는 곳으로 옮긴다.

     

노아, 당신이 없는 동안 무서웠어요. 당신이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기다렸어요. 앨리는 누운 채로 노아를 알아본다. 나는 당신을 떠나지 않아, 끝까지 당신을 지켜주기로 약속했잖아, 노아는 앨리의 젖은 눈동자에 살아난 기억들을 타이핑한다. 당신의 기억력이 되살아난 단 5분이 나에게는 최고의 기적이었소. 사랑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을까요, 여보. 고개를 끄덕거리며 노아가 앨리의 옆자리에 눕는다. 하얀 새가 날아오른다. 너울너울 날갯짓하며 다음 세상으로 넘어가는 두 마리 새. 아침에 병실 문을 연 늙은 간호사가 입을 가리며 밖으로 나가고 앨리와 노아의 잠 든 모습만이 환하게 밝아온다. 실화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무명 소설가의 마지막 페이지처럼 접히고,

       

 

 

 

“살아오면서 내가 별로 성공한 일은 없지만, 한 여자를 사랑하고 지켜 온 것은 참 잘한 일이고 성공한 것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 요양소 문을 힘차게 들어서던 노아의 첫 대사가 짜릿하다. 예술이다. 


 

2008,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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