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려는 욕망이 야기하는 속임수, 갈등, 막다른 길.
두 개의 강력한 신화가 우리로 하여금 사랑이 예술창조로 승화될 수 있다고, 또 되어야만 한다고 믿게 하였다. 그것이 소크라테스의 신화(사랑은 "수많은 아름다운 담론들을 탄생케 한다")와 낭만주의의 신화이다(나는 내 정념을 글로 씀으로써 불멸의 작품을 만든다).
그렇지만 예전에는 그렇게도 그림을 많이, 잘 그렸던 베르테르는 로테의 초상화를 그릴 수가 없다(기껏해야 그녀의 실루엣 - 그를 맨 처음 사로잡았던 바로 그 실루엣- 정도나 그릴 뿐). "내 주위에 세계를 창조하던 거룩하고도 생생한 힘, 나는 그 힘을 잃어버렸다네."
"가을날의 보름달
밤새 내내
나는 연못 주위를 서성이네."
슬픔을 말하는 데에는 "밤새 내내"란 표현보다 더 간접적이고도 효과적인 표현은 없을 것이다. "나도 한번 해볼까요"
"이 여름 아침, 만(灣)에는 화창한 날씨
등나무 꽃을 꺽기 위해
밖으로 나가네."
또는
"이 여름 아침, 만에는 화창한 날씨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오랫동안 책상 앞에 앉아 있네."
또는
"이 여름 아침, 만에는 화창한 날씨
부재하는 이를 생각하면서
꼼짝 않고 있네."
이것은 동시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며, 또 너무 많은 것을 말한다. 꼭 맞게 말한다는 불가능하다. 내 표현의 욕구는 엄청난 상황을 단 한마디로 요약하는 저 불투명한 하이쿠와, 진부한 것의 쇄도 사이에서 흔들거린다. 글쓰기에 비해 나는 너무 크며, 또 너무 연약하다. 글쓰기를 간청하는 어린애 같은 나에게 글쓰기는 항상 촘촘하고 격렬하며 무관심하다. 나는 글쓰기 밖에 있다. 사랑은 물론 내 언어와 연결돼 있지만(글쓰기를 부양하는), 글쓰기 안에 머무를 수는 없다.
나는 내 자신에 대해 글로 쓸 수 없다. 그렇다면 자신에 대해 글을 쓸지도 모르는 이 나는 누구일까?
글쓰기 안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글쓰기는 그를 움츠리게 하며, 쓸모없게 만들 것이다. 그리하여 점진적인 하락이 일어나고 그 사람의 이미지마저도 거기에 차츰차츰 연루되어(무엇인가에 대해 쓴다는 것은 곧 그것을 시대에 뒤지게 하는 것이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라는 혐오감어린 결론만을 낳게 한다. 이렇듯 사랑의 글쓰기를 봉쇄하는 것은 표현성에 대한 환상이다. 작가인 나, 또는 그렇다고 생각하는 나는 언어의 효과에 대해 계속 잘못 생각한다. 나는 '고통'이란 말이 그 어떤 고통도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을, 따라서 그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전달하지 않는다는 것을, 더 나아가 짜증나게 하리라는 것을(우스꽝스럽다고까지는 말하지 않더라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내게 자신의 진지함을 매장하지 않고는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어야만 한다(언제나처럼 뒤를 돌아다보지 말라는 오르페의 신화를 상기할 것)
글쓰기가 요구하는 것, 그리고 모든 연인이 아픔 없이는 동의할 수 없는 것은 그의 상상적인 것을 조금 희생해야 한다는, 그렇게 함으로써만 그의 언어를 통해 약간의 현실적인 것의 승화를 꾀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란 기껏해야 상상적인 것에 대한 글쓰기이며,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글쓰기에 대한 상상을 포기해야만 한다. 즉 언어가 작업하는 대로 자신을 내버려두며, 사랑하는 사람과 그의 그 사랑이라는 이중의 이미지에 언어가 틀림없이 부과하게 될 부당함을(모욕을) 감수해야만 한다.
상상적인 것의 언어는 언어의 유토피아에 다름아니다. 완전히 최초의 천국 같은 언어, 아담의 언어, "환상이나 변형이 배제된 자연스러운 언어, 우리 감각의 투명한 거울, 육감적인 언어. 육감적인 언어에서는 모든 마음이 함께 이야기한다. 그것은 자연의 언어이기에 다른 어떤 언어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랑에 대해 쓰고자 하는 것은 언어의 진창과 대결하고자 함이다. 언어가 지나치게 많거나 적은, 또는 과장되거나(자아의 무한한 확대와 감정의 범람에 의해) 빈약한(그 약호에 의해 사랑이 언어를 축소시키고 낮추는) 그런 광란의 지역과. 어린 아들의 죽음 앞에서 말라르메는 글쓰기를 위해(비록 그것이 글쓰기의 한조각에 지나지 않을지언정) 분열된 어버이의 모습을 감수한다.
"어머니는 울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의 관계는 나를 분류될 수 없는, 분리될 수 없는 주체로 만들었다. 나는 내 스스로의 아이이며, 동시에 아버지요 어머니이다(나의 그리고 그 사람의). 어떻게 그 일을 갈라놓을 수 있단 말인가?
그 사람을 위해 글을 쓰지 않으며, 내가 쓰려고 하는 것이 결코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받게 하지 않으며, 글쓰기는 그 어떤 것도 보상하거나 승화하지 않으며, 글쓰기는 당신이 없는 바로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곧 글쓰기의 시작이다.
롤랑바르트의 산문집<사랑의 단상> (1991, 문학과 지성사) p 129~133
롤랑바르트 Roland Barthes (1915~1980) 는 현대 프랑스 문학계의 가장 대표적인 문학비평가이자 기호학자이며 저술가이다.
셰르부르에서 출생하여 소르본대학에서 고전문학 학사학위를 받았고 파리 국림과학원 연구워, 파리 고등연구실천학교, 콜레쥬 드 프랑스의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잠재태의 기술] [신화지] [유행복장의 체계] [기호학 요강] [S/Z] [사드, 푸리에, 로욜라] [텍스트의 즐거움]
[롤랑바르트 그 사람을] [사랑의 단상] 등 영향력이 큰 많은 저서들을 발표했다.
사진을 읽을 때 관습적으로 동원되는 독해 코드를 바르트는 ‘스투디움(studium)’이라고 부른다. 스투디움에 대해 무지할 때 우리는 사실상 문맹자가 되어 사진 속 이미지를 그대로 세계의 거울로 생각하는 주술적 의식에 빠지게 된다. 때문에 사진의 의미를 읽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스투디움을 이해해야 한다. 이로써 사진은 상징기호가 된다. 하지만 사진의 본질이 과연 그런 일반적인 해석의 틀에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가끔 어떤 사진을 볼 때, 그 모든 의미의 해석에 앞서 이른바 ‘필이 꽂히는’ 체험을 하게 된다. 스페인 내전 당시 인민전선의 병사가 총에 맞아 죽는 장면을 포착한 로버트 카파의 사진을 생각해보라. 이런 강렬한 체험을 일으키는 것은 그 사진의 의미를 읽게 해주는 ‘일반적’ 해석의 틀이 아니라 그 사진의 ‘개별적’ 존재가 찌르는 고유한 효과다. 이는 곧 사진이 우리 신체에 남긴 ‘자국’이라 할 수 있다. 이 촉각적 효과를 바르트는 ‘푼크툼’(punctum)이라고 부른다. 사진의 진정한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번역문을 읽는다 건 또 하나의 고통이다. 남의 나라 말에 능통(은 커녕 단어의 뜻도 모르지만)할 수 없다는 건 애석한 일이다. 하기야 어학에 능통했던 쿠마라지바 조차도 인도(산쓰크리트어, 팔리어)의 불교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해서 던져 주는 건, 밥알을 씹어서 남의 입속에 넣어주는 것처럼 구역질을 일으키는 일이라 표현 했듯이, 철학적 사유를 번역체를 통해 이해하는 건(꾸역꾸역) 힘든 일이 분명하다. 해서, 자신할 수 없는 지엽적인 독서일 뿐이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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