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의 작품

열린 종교 그 아름다움 外

미송 2012. 11. 25. 09:10

열린 종교 그 아름다움

 

도올 김용옥의 기독교를 향한 토론은 거침없고 현란하다. 이에 대한 반박도 만만치 않다. 언젠가는 자신의 입지마저 앞뒤가 안 맞게 바뀌어버린, 듣다보면 횡설수설하기도 하는, 도대체 말씀의 현주소가 동양인지 서양인지 헷갈리기도 하는 도올이지만 그가 불러온 기독교 현실에 대한 공개토론은 자못 흥미진진하다. “설교자의 목적은 신자를 지혜롭게 만들기보다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라는 기존교단의 입장에 “그런 생각이 기독교를 망쳤다.”고 서슴없이 반박하는 도올이다. 누구의 의견이 옳건 그르건 이런 토론은 진작 있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나만의 기독교 교단에 대한 강렬하고 안 좋은 인상(독선적이고, 음흉하고 미신적이며, 알 수 없는)은 없었을 것이며, 교회의 아웃사이더로 방황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기독교는 지구상에서 명멸해간 수많은 종교 중의 하나고, 야훼란 숭배 받았던 수많은 신 중의 하나다. 모세의 애굽탈출은 B.C 1200년 경이고, 창세기는 그 이후에 쓰여 졌으니, 기독교의 역사를 합쳐 봐야 겨우 3000여 년이다. 창세신화는 성서만의 독점물이 아니고 청동기시대부터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중심으로 떠돌던 흔한 신화 중의 하나다.

최초의 신화지대 또는 인간지대라고 일컬어지는 60만 년 전의 유인원들이 이미 종교의 흔적을 남겼다. 그 당시의 유적에서 머리가 없는 동물의 뼈 조각들이 발견되곤 하는데, 이는 머리를 따로 떼어서 제사를 지냈던 증거라고 종교사학자들이 추론한다. 머리를 따로 떼어서 제의에 바치는 신화는 아직도 지구 곳곳에 존재한다. 우리도 굿을 할 때에 돼지머리를 따로 떼어서 상에 올린다. 더욱 확실한 인류의 종교적 흔적은 20만 년 전의 네안데르탈인의 출현이다. 이들은 벽화를 남겼다. 현생인류의 직계로 보는 3만 년 전에 출현한 크로마뇽인의 동굴벽화는 아직도 생생하다. 이 모든 벽화는 원시 예술가의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베드로 성당의 천정벽화처럼 제의를 지내기 위하여 공들여 그린 종교적 상징이라고 종교사학자들은 보고 있다. 그렇다면 종교의 기원은 엄청나게 오랜 선사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기원전 3200년 경에 문자가 출현하였고 오늘의 역사시대는 이로부터 시작되지만, 이미 기원전 7500년부터 종교는 구체적인 형태로 표현되었다. 신석기 시대의 유물에는 뼈나 돌에 새긴 여인상이 자주 나타난다. 도자기나 토기로 빗은 여인상도 발견되는데, 과장된 여자의 가슴과 엉덩이로 미루어 다산과, 풍요, 생산을 뜻하지만 이 여인상은 단순한 여인이 아니라 바로 신(神)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인류최초의 신은 남성이 아닌 여성이다.

모계사회가 부계사회로 이행되기 시작한 시기는 현대문명의 태초라고 보는 기원전 3500년으로 잡는다. 일부 종교사학자들은 이 때에 오랜 동안 인류를 지배해온 모계신화가 부계신화로 변화했다고 한다. 많은 여신들이 사라지고 남신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명한 신화학자 조지프 켐밸은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의 신화를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기 위하여 조작한 것이라고 추론한다.

사실 특정 종교는 인간만이 느끼는 “성스러움에 압도되는 감정의 바다”를 떠도는 하나의 조각배다. 이런 감정을 특정 교리에 모두 잡아두기에는 너무나도 그 교리가 협소하다. 그래서 종교는 늘 변화하고 새로운 물결을 준비해야 한다. 오늘날의 정통 기독교도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원래의 기독교와 많은 차이를 보인다. 산골짜기의 작은 종교에 불과했던 기독교가 사도바울에 의하여 세계화되면서 필연적으로 변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초대교회에는 없었던 다양한 제의와 의식이 오늘날의 정통 기독교에 많이 존재한다.

사실 내 종교 안에만 있는 줄 알았더니 다른 종교 안에도 존재하는 공통된 “그 무엇”이 있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다. 예부터 적으로 삼았던 종교를 인정해줘야 할 판이다. 로마교황청은 과감하게 타종교의 신성을 인정했다. 즉 종교학자들이 주장했던 “종교의 공통적 원소”라는 개념을 인정한 것이다. 종교의 공통적 원소란 모든 종교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부동의 관념이다. 이에 상반된 개념으로 “종교의 민족적 원소”가 있는데, 이는 특정 지역이나 민족의 옷을 입은 종교를 뜻한다. 따라서 종교의 민족적 원소에 집착하면 종교끼리 적이 될 수도 있지만 공통적 원소에 관심을 기울이면 화합할 수 있다.

나의 종교적 방황은 어렸을 때에 느꼈던 부처와 예수의 대립 때문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에 집 근처에 있는 절에 자주 놀러 다녔기에 부처의 인상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였다. 그러다가 집 근처에 들어선 교회에 다녔다. 목사님은 절의 부처상이나 다른 모든 것이 다 우상이며 미신이고, 그 근처에만 가도 지옥에 떨어진다고 말했다. 사실 지금도 기독교가 험악하고 무시무시해 보이는 것은 그때 받은 인상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나가세, 예수 승리, 목숨을 다해 적을 부수고,”라는 설교는 참으로 암담했다.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도 내놓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인데, 도대체 뭐가 어떻게 잘못 된 것일까?

“우상을 숭배하지 마라.”

이 한 마디로 모든 종교의 교리를 다 함축할 수 있다. 언젠가 나는 목사님과 우상이라는 개념을 두고 논쟁하다가 교인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타종교의 모든 상징은 다 우상이고, 이런 우상에 고개라도 끄떡하면 죄가 된다는 목사의 말씀이다. 나는 과감하게 목사에게 손가락질 했다.

“당신이 곧 우상이 아닌가요? 왜 사람들은 성서만 들먹이면 꼭 자기가 하나님이나 예수가 된 것처럼 자신 있게 떠들죠?”

사실 나는 성서를 단순한 신앙의 지침서로 본다. 그곳에는 길이 있을 뿐이지 하나님이 없다. 길을 내밀어 이것이 곧 하나님이라고 말하면 곤란하다. 달마대사가 면벽좌선에 몰두 할 때 경전에 통달한 스님이 찾아왔다. 경전도 모르고 어떻게 득도할 수 있냐고 달마대사에게 빈정댔다. 그러자 달마대사는 말했다.

“그림의 떡을 드시면 배부르십니까?”

지도는 지도에 불과하다. 자기 발걸음으로 찾아가지 않으면 지도는 무용지물이다. 여기에 예수님이 살고, 저쪽 길로 쭉 올라가서 왼쪽으로 꺾어지면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떠들 필요 없다. 왼뺨과 오른뺨의 비유는 끝없는 사랑뿐만 아니라 큰 겸손을 의미한다. 논리의 비약이겠지만 진정한 예수는 양보와 양보를 거듭하여 자신의 이름조차 지상에서 사라질 때 전체 예수로 다시 탄생하는지도 모른다. 이는 불멸의 사랑에 대한 믿음의 극대화고 성취일 수도 있다.

“뻑 하면 응답받았다고 말하지 마라. 짜증난다.”

이것이 다시는 근처에도 어른거리지 않겠다고 교회를 떠나며 십자가에게 던진 나의 말이다. 어떤 신자는 혹시 내가 지옥에 떨어 질까봐 근심까지 친절하게 해줬다. 그러나 사랑과 증오, 자비와 분노, 믿음과 질투가 죽 끓는 변덕스런 하나님이 싫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일 뿐이다. 신을 의인화시킨 결과다. 온전하고 순결하기만 했던 욥이 믿었던 하나님의 황당한 게임에 고난을 당했다. 고통 속에서 차라투스트라의 간절함으로 수많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뜻을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입 다물 뿐입니다.”로 끝났다. 이는 참으로 경건하고 독실하다. 사실 욥에 관한 전설은 이미 다른 종교 안에도 존재하는 신화로서 극도의 경외감에 사로잡힌 종교적인 인간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메테우스는 신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것은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과실을 따 먹은 죄에 버금가는 사건이다. 제우스의 질책과 형벌에 프로메테우스는 굴하지 않는다. 당신 마음대로 벌을 내리라고 냉소를 퍼붓고 인간의 편을 든다. 여기서 신본주의와 인본주의의 기원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신본주의와 인본주의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예언자 이사야는 말했다. 하나님은 하늘에도 역사하고, 인간에게도 역사하며, 땅에서도 역사한다고, 이는 신은 초월신이요, 내재하는 신이요, 만물에 스며든 신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신이란 반드시 그 변덕스런 인간의 모습만 닮지 않았을 것이다. 겨우 다섯 개의 감각으로 인간은 세상을 인지한다. 그나마 일정 범위 안의 빛만 보이고, 사이클만 들을 수 있다고 한다. 물론 개인적인 신비스런 체험도 있다. 그러나 남에게 주장될 개인적인 체험이라면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객관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이는 종교적 신비주의의 한계다. “너만 꿈 꿨어? 나도 꾸었어.”하면 그만이다.

도올 김용옥과 기독교 신학자들의 토론은 기독교의 새로운 장을 여는 듯 하다. “무조건 믿어라. 어허, 믿음이 부족하고 의심 많은 자야, 이단이로구나. 마귀로구나. 지옥이 두렵지 않느냐,”라며 기염을 토하던 그들의 집, 속을 알 수 없기에 음흉하게만 느껴지던 금단의 문이 열린 것이다. 성서도 그 권위에 대한 도전을 받을 수 있으며, 현재의 모든 종교지도자들도 심판대에 오를 수 있다는 신선함이다. 이미 로마교황청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다른 종교의 신성을 인정한 세상이다. 신은 하나일 수도 있고, 하나의 신이 다각면의 얼굴로 나타난 형태일 수도 있다. 둥근 태양은 분명히 태양이다. 그러나 빛에 실려 온 태양의 입자 하나 하나가 태양일 수도 있다. 즉 모든 신은 개인에게 구체화된다는 말이다. 저 태양이 내 몸에 아무런 광합성 작용도 일으키지 못한다면, 그래서 생명을 유지시켜 주지 못한다면 쓸모없다. 그래서 신은 빛의 입자로 개인에게 파고드는지 모른다.

지금 선진국에서는 기독교가 급속히 쇠퇴하는 중이다. 기독교는 늘 핍박받는 자의 편이라서 그런지 후진국에서 세를 넓히며 남반구를 향하고 있다. 아프리카나 동남아 오지로 파고든다. 그쪽에서는 열린 종교가 되었으면 좋겠다. 기득권층이 아니라 가장 가난하고 겸손한 자로서 말이다.

 

2007년 5월 초순, 이정문

 

 

 

이상과 김유정의 정사(情死)

 

습관이 된 시는 고통이다.

새벽 안고 뒤척이면 여지없는 독백

이는 문학이 아닌

떠오를 법한 추억도 아닌

그저 그런......

흐릿한 길에 지쳐,

배를 기다리다 돌이 된

유일한 진실

사연이야 어떠하든

돌 속에 돌만 있어

파도 밀려와 침묵에 녹아든

소스라친 자리

겨울나무 허허로워

이제는

아무것도 안 보이련만

술잔 사이 흘러, 퇴폐의 유곽 건너

낯선 도시의 낡은 건물

영안실에 싸늘한 체온 버려져

하얀 천으로 덮인

얼굴 내놓지 말라.

박제된 천재는, 박제일 뿐,

그리하여

날개를 펴지 못한다. 날개를 펴지 못한다. 날개를 펴지 못한다.

이 상 : 우리 같이 자살합시다.

김유정: 정사(情死)가 되겠군요.

미열에 들뜬 밤마다

백지 파먹는 붉은 꽃은

몽롱한 유산이라서

아니,

후대에 물려줄 천국도 아니라서

문학을 하다가

문학을 버리고

또 문학을 하고 버리고

그러다가

땅에 얼굴 파묻어,

돌이 되어버린 이야기는

오늘도

파도의 침묵으로 섰는가,

싫증난다. 고매하지 않다.

<김기진의 회고>

“...... 갑자기 거리에 몰려오는 소낙비를 바라보는데

창 앞에 뱉는 이상의 침에 빨간 피가 섞였었다.

평소부터도 이상은 건강이라는 속된 관념은 완전히 초월한 듯이 보였다.

이상 앞에 설 때마다 나는 아침이면 체조를 잊어버리지 못하는

내 자신이 늘 부끄러웠다.

무릇 현대적인 퇴폐에 대한 진실한 체험이 없는 나는 이 점에 대해서는

늘 이상에게 경의를 표했다.(1936)“

<이상의 실화(失花)에서>

“신념이 빼앗긴 것은 건강이 없어진 것처럼

죽음의 꼬임을 받기 마치 쉬운 것이더군요.“

“이상형! 형은 오늘에서야 그것을 빼앗기셨습니까?

인제 - 겨우 - 오늘이야 - 겨우 - 인제“

유정! 유정만 싫다지 않으면 나는 오늘 밤으로 치러 버리고 말 작정이었다.

한 개 요물에게 부상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27세를 1기로 하는 불우의 천재가 되기 위하여 죽는 것이다.

유정과 이상 - 이 신성불가침의 찬란한 정사 - 이 너무나 엄청난 거짓을

어떻게 다 주체를 할 작정인지,

각혈의 날개라도 달아

한 뼘만 날다가 떨어져진들

빈 몸으로 솟구친

갈매기보다 크게 웃어

지구를 움켜쥐고

날려던

박제들이었는데,

1937년 봄,

한 명의 천재는 고향에서

한 명의 천재는 동경에서

진담인 듯

농담인 듯

20일의 시차를 두고 날았다.

습관이 된 시는 붉은 날개

고통스럽다.

 

2006, 이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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