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퀘이커리즘의 정의와 특징
청교도들이 성경을 절대시하여 그들의 개인 생활과 사회 생활의 지침으로 삼았다면, 퀘이커교도들은 인간 개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성스러운 '내적인 빛' 곧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퀘이커 교도들은 캘빈이 주장한 인간의 원죄를 믿지 않았으며,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는 내적인 빛이 있기 때문에 성직자도 평신도, 남자와 여자, 자유인 노예가 모두 평등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교황이나 주교 등 성직자의 권위를 부정하고, 마틴 루터처럼 개개인은 누구나 다 사제로 보았다. 그들은 개개인에 대한 궁극적인 권위는 개개인의 마음속에 계시되는 내적인 빛이라고 주장한 것 이외에는 어떠한 신조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어떠한 예식도 하지 않았다.
퀘이커리즘은 요한의 제자가 아닌 그리스도의 제자 교회의 직제나 교리에 대한 추종자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영에 추종하고자 하는 무리들. 이들이 바로 퀘이커 교도이며 이것이 퀘이커의 핵심 원리다.
종교의 궁극적인 도(道)를 더욱 기리곤 하는 제도나 형식주의를 버리고 성령과의 내밀한 교류 속에서 평화와 공존의 삶을 실현하겠다는 것을 말한다. 17세기 영국에서 종교개혁의 한 흐름으로 태동하게 된 이 공동체는 현재 미국과 영국 등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종교기구로 자리매김해 있으며, 특히 전쟁반대, 전시 또는 전후 구제사업, 사형제도 폐지운동 등을 활발히 전개하는 평화운동단체로 널리 알려져 있다
2 퀘이커리즘의 설교 방법
그들은 교회당이 따로 있는게 아니다. 십자가도 성상도 없는 그 곳에서 예배시간이 가까워지면 한두 사람씩 오는 순서대로 빈자리를 채우고 앉는다. 먼저 온 사람과 나중 오는 사람 사이에 어수선한 인사도 없고, 각자 자리에 앉아 차분히 눈을 감는다. 사회자도 목사도 없다. 더러는 바닥에 허리를 펴고 앉고 더러는 의자에 앉아 손을 모은 채, 느긋이 침묵을 한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 누군가 말을 할 법도 한데, 좀이 쑤시는 침묵은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뒷산에 눈 녹는 소리와 여린 새의 소리가 크게 들린다. 새소리가 들리자 옆 사람 들숨날숨 소리도 들리고, 마음이 누그러진다.'침묵'이 불편하지 않게 느껴질 무렵, 예배가 끝났다. 꼬박 한 시간 동안, 찬송가 자락이나 성경 봉독도 없이 예배가 진행된 것이다.
침묵예배. 이것이 이들의 일관된 예배 방식이다. 단순히 명상으로서의 침묵이 아니라, 모든 겉치레를 버리고 전심으로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기 위한 침묵. 그러나 예배 도중 누구라도 자신이 받은 감동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이 말하기도 하고, 아무도 말을 하지 않기도 한다. 말을 나누든 나누지 않든 이들의 예배는 늘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자 하는 전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모든 개인의 내면에 진리가 있다고 하는 퀘이커의 신학은 제도나 교리적인 의식에 구도(求道)방법을 얽어맬 필요가 없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것은 퀘이커의 창시자인 조지 폭스(George Fox)로부터 비롯된 신학으로, '속의 빛'이라고 함축할 수 있다. 속의 빛이란 모든 사람의 내면에 있는 빛의 원천인데, 곧 '하나님'과 동일한 의미다. 폭스는 '이 빛만이 어떤 사람이나 책이나 문서 따위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순수한 앎에 도달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준다'고 말한다. 즉 각자의 속에 빛으로 존재하는 하나님과 외부에 우주적으로 존재하는 더 큰 하나님과 만나게 될 때 진리에 이르게 되고, 각 사람이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성경 또한 하나의 보조자료일 뿐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 대한 위대한 기록'인 성경은 이미 '속의 빛'을 지닌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돕는 하나의 수단일 뿐인 것이다.
3 사회속의 퀘이커리즘
모든 사람의 내면에 빛이 있어서 공동체적인 깊은 침묵을 통해 그것을 발견해 나가는 것. 이것이 퀘이커의 모임에 설교도 없고 성찬도 없고 목사도 없고 리더도 없이, 오직 동등한 공동체로서 함께 성령의 임재를 추구해 나가는 근거다. 그러나 '속의 빛'으로부터 시작된 퀘이커의 신학은 단지 신비적인 체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그들의 '체험'은 오히려 '삶의 현장에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의 시작일 뿐이다. 예배를 통한 성령의 체험, 그리고 그것을 삶으로 실현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전 과정인 것이다. 이들의 '삶의 실현'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우선 종교에 있어서 이들은 '모든 종교의 궁극에는 진리가 있다'는 보편주의적인 입장이다.
종교전쟁이나 크고 작은 분쟁을 일으키게 되는 배타성을 버리고, 다양함을 인정하는 '공존'의 방식 말이다. 이러한 보편주의적인 태도는 많은 기독교도들에게 시비를 받기도 했지만, 17세기 퀘이커 신학자인 로버트 바클레이(R. Barclay)가 '나도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을 것이 없는 줄을 압니다. 그러나 구원은 문자에 있지 않고 오히려 체험에 의한 깨달음에 있습니다'라고 변호했듯이, 그리스도에 대한 퀘이커의 신앙은 보편주의적인 태도 아래 확고하게 서 있다.
또한 이들이 삶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신앙의 형태 중 중요한 것 하나가 바로 사회참여다. 이들은 전적으로 평화를 옹호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기 때문에 1,2차 세계대전 참전 거부로부터 시작해서 노예제도 폐지, 감옥개선, 핵무기 반대운동 등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평화운동을 벌여왔다. 이것은 전쟁반대와 인권운동, 정치적 개혁에까지 걸쳐 있는 폭넓은 사회참여다.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한 퀘이커교의 신앙은 후일 펜실배니아 식민지를 중심으로 전개된 계몽사상의 기틀이 되었고, 미국 독립선언서와 헌법의 기본 정신이 되었다. 더 나아가 이 퀘이커 사상은 인간의 신성과 무한한 가능성을 가르친 초월주의 사상의 출현을 도와 주었으며, 뉴잉글랜드 청교도 정신과 함께 미국의 정치, 사회, 철학 사상의 양대 지주가 되었다.
퀘이커교(Quakers)는 프로테스탄트의 한 교파이며, 프렌드 협회라고도 한다. 1647년 영국인 G.폭스가 창시하였고 1650년대 이후 미국에 포교가 적극적으로 행해졌다. 그들은 ‘안으로부터의 빛’을 믿고, 신앙의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나 또한 인디언과의 우호(友好), 흑인노예무역과 노예제도의 반대, 전쟁 반대, 양심적 징병거부, 십일조 반대 등 일반 사람의 태도와 달라 특수한 사람들로 간주되었다. 미국과 캐나다에 약 13만 이상의 교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퀘이커교도로는 함석헌(咸錫憲) 선생이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참조)
여고시절 그러니까 열여덟 살, 대입시를 앞두고 '뜻으로 본 한국역사'란 책표지를 본 것은 그녀의 기숙사에서였다. 귀밑머리 단속이 심했던 80년도 초반 그녀는 허리까지 치렁치렁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앉아, 그야말로 펑퍼짐할데로 펑퍼짐해진 엉덩이를 깔고 앉아, 뒤도 안 돌아보고 책과 문제집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물며 점심밥 먹는 것도 볼 수 없었다. 그녀의 집이 째지게 가난하단 소문을 듣고 그래서 밥도 못 챙겨오나 보다 생각했던 나는, 몇 번은 도시락을 권했다. 다른 아이들에겐 부득불 거절하던 그녀가 가끔 내 도시락에 젓가락을 댔다. 사실 그때 내 도시락은 형편무아지경이었다. 엄마가 일 년에 두 번 이상 40일 금식기도를 하러 오산리로 올라가는 바람에 부대로 출근하기전 아버지는 내 도시락까지 챙겨야 했다. 그 놈의 하나님이 뭐 길래. 지금도 나는 짜증나는 소릴 할 때 종종 그 놈의 사랑이 뭐 길래, 그 놈의 문학이 뭐 길래-하며 떠든다. 그 놈이 뭔 죄가 있길래....
고3병에 시달리던 혜는 입시 석 달 전 자퇴를 해서 검정고시로 고려대 국문과에 들어갔고, 노는 올백점이 나와 서울대 법대로 갔다. 일 년 후, 서울에서 만난 그녀 중 하나는 또 자퇴를 하고 실종되었고, 인간으로 안 보였던 또 한 그녀는 예전 생머리를 꼬불꼬불 말고 데모행렬에 앞장 서 있었다. 이후 연락이 끊겼다. 2000년 새밀레니엄이라고 하도 떠들기에, 기록 확인차 연락을 해서 땅끝마을에서 판사노릇을 하고 있는 노를 확인했다. 어려운 부탁이라도 있어서 전화했나 오해했을까, 그녀는 나를 모른다 고 쌩까버렸다. 그럴수도… 나도 쌩까버렸다. 아쉬운 건 없었다.
어쩌다 함석헌을 읽고 또 어쩌다 다시 읽을 때면 노가 생각난다. 어슬렁거리며 날 쫓아온 그녀가 기도하던 내 뒷자리에 앉아, 침묵만 했던 그 날이 떠오른다. 하늘에 삿대질하듯 떠들면서 그것도 기도라고 우기던 시절, 그녀는 아무 목소리도 내지 않았다. 한 시간 남짓이지만 내 기도가 끝나길 기다려 주었을 뿐, 그리고 각자의 집으로 갈라질 때까지 함께 걸었을 뿐. 함석헌 옹에 대해 말하며 어느 순간 조용했던 그녀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했단 걸 기억한다. 두 갈래로 길이 갈라지는 지점이 있었다. 거기서 한 친구는 제대로 된 길을 갔고 어찌어찌하다 나는 오류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20여 년 가깝도록 그 오만과 편견 폐쇄와 배타의 담벼락에 기대어 살았다. 30여 년 전 그녀가 권했던 함석헌을 받아들였더라면 최소한 칼뱅처럼 폭력자를 자처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깨달음의 기간은 너무 길었고, 미래의 년수는 너무 짧게 남았다. 얼마동안 살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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