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칼럼

장석주 <마광수의 문학세계>

미송 2014. 3. 17. 10:43

 

마광수의 문학세계 / 장석주

마광수, 아방가르드인가, 마녀사냥의 제물인가?

세상은 겉으로 보기엔 견고하고 평온해 보이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변화의 소용돌이가 치고 견고한 것들에는 무수히 작은 균열들이 생겨난다. 현실의 내부에서 쇄신과 반복의 힘들이 길항하며 변화의 천둥이 울리고 벼락이 내려친다. 변화에의 역동적 힘은 “새로운 사상, 새로운 계획, 새로운 꿈으로 폭발하며” 현실을 바꿔간다. 하지만 대체로 현실은 반복되면서 더 견고하게 고정되는데, 그것은 현실이 더 나빠져 간다는 징후다. 왜냐하면 반복은 낡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나쁜 현실이라도 스스로 괴멸하는 법은 없다. 다만 나쁜 것을 되풀이할 뿐이다. 고정된 것, 지루하게 되풀이되는 것, 새로운 가치를 품지 못하는 무정란의 현실은 아직 숨을 붙이고 있되 이미 죽은 것이다. 진짜 시인들은 멀쩡해 보이는 현실에서 시체 썩는 냄새를 맡고, 그 악취에 미쳐버리는 자들이다.

 

바뀌지 않는 기계와 제도, 인간 정신은 필연적으로 감가상각(減價償却)을 피할 수 없으며 가치의 영도(零度)를 향해 추락한다. 그 반복의 과정에서 잔인하고 비열하고 천박하고 억압적인 기제들이 생성되는데, 이것들은 기존의 예술양식, 도덕률, 정부의 조직에 스며들며 금기와 억압의 경계들을 강화한다. 그 경계들은 위선의 도덕, 경직된 규범들, 난공불락의 제도들, 억압적인 사회 구조를 통해 구체화한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천부의 감각과 상상력으로 미래를 내다보고 바로 경계와 금지된 것에 부딪히며 저항하고 요동치는 힘으로 그것을 해체하려고 한다. 마크 애론슨은 아방가르드의 저주받은 운명의 결과에 대해 이렇게 쓴다. “아방가르드의 역사는 영감, 광기, 광란, 사기, 천재성, 배신으로 점철되어 있다.”

아방가르드「전위(前衛)」는 본디 군사용어다. 이것이 예술 분야에 나타나는 새로운 사조(思潮)와 관련하여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부터다. 모든 아방가르드는 그것이 내장하고 있는 급진성과 도발성 때문에 세상과의 불화를 태생적인 숙명으로 안고 태어난다. 아방가르드는 실험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협박하고, 소외시키”며 기존의 전통과 권위를 절단하고 그것을 향해 노골적으로 경멸하고 조롱하며 근원에서부터 해체한다. 모든 아방가르드는 도무지 통제할 수 없는 반항의 정신을 갖고 나타난다.

보들레르와 랭보가 그랬듯이, 사드와 니체가 그랬듯이, 이상과 김수영이 그랬듯이, 뒤샹과 폴록이 그랬듯이 그들은 망치를 들고 우상들 (규범과 도덕, 전통과 권위) 앞으로 걸어 나가 그것을 깨트린다. 아방가르드의 손에 들린 망치는 실재가 아니라 악마주의, 문신, 변태성욕, 불협화음, 퇴폐, 맹목적인 분노, 공공연한 성적 도발, 약물, 신비주의, 명상과 같은 상징으로서의 망치다. 파괴와 해체에의 의지는 아방가르드의 DNA다. 그것의 발원지는 현실의 규범과 도덕에 의해 억압당하는 인간의 무의식 저 밑바닥이다. 아방가르드가 된다는 것은 세상과의 싸움을 자초하는 것이며 사회적 죽음에 이르는 예술적 순교를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아방가르드는 필연적으로 주체의 죽음으로써 세계를 상상하는 방식,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을 바꿔 놓으려고 한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마광수는 한국 사회의 아방가르드인가, 아니면 한국이라는 디스토피아가 쳐놓은 금기의 그물에 포박된 채 신음하는 가련한 돈키호테인가? 잉여의 쾌락으로 경계를 해체하고 그것을 넘어가려고 했던 이 선병질적인 스타일리스트는 20세기 한국 예술이 낳은 마지막 아방가르드인가, 아니면 퇴폐의 화농(化膿)을 안고 있는 한국 사회가 타락한 성도덕의 회복을 위해 희생 제의로 바친 한 마리의 희생양인가? 우리는 몰이해와 편견으로 너무 일찍 온 아방가르드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형주에 매달았는가, 아니면 저질의 바이러스를 유포하는 한 타락한 망나니의 상상력에 정당한 죗값을 물렸는가?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로 인해 벌어진 사태는 하나의 코미디며 해프닝이었다. 우리는 『즐거운 사라』를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가능성의 실험을 보여준 게 아니고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가를 폭력적으로 깨닫게 해준 씁쓸한 텍스트로 회고할 뿐이다. 이제 그에게 덧씌워진 호색적인 욕망이나 자극하는 퇴폐 문학인의 원조라는 부당한 편견과 몰이해의 표지를 벗겨내고 그의 문학을 제대로 읽어야 할 때다. 마광수의 소설은 분명 섬약하고 퇴폐적인 일면과 세계의 갱신을 위해 중심을 횡단하는 신성한 무질서의 정신이 뒤섞여 발효시킨 것이다. 마광수, 그는 현실의 갱신을 위해 자기 자신과 상상력을 바치고 기꺼이 최후를 맞이한 문학의 순교자인가, 아니면 플라스틱 망치를 들고 세상에 나와 잠깐 소란을 피운 우발적 경범죄 피의자인가? 이제 우리는 이 단순한 물음 앞에 서는 것을 더 이상 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대답해야 한다.

포르노그래피를 위한 변호

현대예술의 운명은 살아남기 위해 필연적으로 대중화 전략, 즉 소비의 논리에 귀착한다. 판매의 매음시장에 뛰어든 소설-책도 마찬가지다. 『즐거운 사라』는 토하고 싶은, 그러나 끝내 토할 수 없는 포르노의 의장(意匠)을 상품미학의 전략으로 채택한다. 1992년 한국 검찰은 엉뚱하게도 소설 『즐거운 사라』가 미풍양속을 해치는 음란도서라고 결론짓고 수사에 나선다. 검찰의 돌발적인 행동은 ‘포르노’에서 계몽의식과 도덕적 당위를 꺼내놓으라고 윽박지른다. 그들은 포르노의 무차별적 확산으로 사회 윤리의 마지노선이 무너질까 두려웠던 것이다. 검찰의 돌발적인 개입은 그저 약간의 발칙한 수준의 포르노그래피에 불과했던 한 권의 소설을 전통 윤리와 현실과의 괴리, 그 첨예한 경계선으로 부각시켰다.

신문에 따르면 검찰은 “이 작품을 변태성 행위, 여성 간의 동성애 행위, 교수와 제자 간의 성행위 등을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묘사, 우리 사회에서 용납되는 ‘성애 행각’의 수준을 넘어 문학이 아니라 음란물”이라고 단정 짓는다. 검찰은 “사회 윤리를 정면으로 파괴하고 성적으로 타락한 행동을 다”루었다고 비난한다. 아울러 “사실상의 포르노물을 ‘마광수 신드롬’이란 유행어 속에 그냥 방치해 두는 것은 일부 매스컴의 선정주의에 영합하는 것으로 사회 전반에 해악을 미칠 소지가 크다.”고 강조하고, 『즐거운 사라』에 대한 ‘법적 제재’의 움직임을 기정사실화한다.

연일 신문과 방송은 이 “음란한” 필화 사건을 세세하게 보도하고, 일부에서는 ‘외설 시비에 대한 공청회’가 열리고, ‘문학작품 표현자유 침해와 출판탄압 대책위원회’가 구성된다. 하지만 이 사건의 일심 법정은 검찰의 편을 들어 이 문제 소설의 작가와 출판인에게 유죄를 선고한다. 다음은 그 판결문의 일부다.

[이 사건 소설 즐거운 사라는 미대생인 여주인공 ‘사라’가 벌이는 자유분방하고 괴벽스러운 섹스 행각 묘사가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성희의 대상도 미술학도, 처음 만난 남자, 여중 시절 동창생 및 그녀의 기둥서방, 동료 대학생 및 스승 등으로 여러 유형의 남녀를 포괄하고 있고, 그 성애의 장면도 자위행위에서부터 오럴 섹스, 동성연애, 그룹 섹스, 카섹스, 비디오 섹스, 에이널 섹스 등으로 아주 다양하며, 묘사 방법도 매우 적나라하고 장황하게, 구체적, 사실적으로 또한 자극적, 선동적으로 묘사하고 있어서 위 소설은 위와 같이 때와 장소, 상대방을 가리지 않는 각종의 난잡하고 변태적인 성행위를 선동적인 필치로 노골, 상세,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데다 나아가 그러한 묘사 부분이 양적, 질적으로 문서의 중추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구성이나 전개에서도 문예성, 예술성, 사상성 등에 의한 성적 자극 완화의 정도가 별로 크지 아니하여 주로 독자의 호색적 흥미를 돋우는 것으로밖에 인정되지 아니하는 바, 위와 같은 여러 가지 점을 종합하여 고찰하여 볼 때 위 소설은 문학 작품서의 표현의 자유 최대한 보장이라는 명제와 오늘날의 개방된 성 문화 및 작가가 주장하는 ‘성 논의의 해방’이라는 전제적인 주제를 고려한다고 해도 형법 제243조, 제244조에서 말하는 음란한 문서에 해당하는 것으로 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할 것이다.]

포르노의 특징 중의 하나는 순환적인 반복이다. 반복은 환멸, 혹은 전언 없음이라는 내용의 형식화다. 포르노의 발생론적 근저에는 신체의 특정 부분에 대한 강박증적 집착과 그것의 되풀이만 존재한다. 실재는 없고, 모사만 있다. 당연히 “포르노는 인간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육체에 관심을 둔다. 감정은 당황스러움이고 모티브는 정신 착란과 비슷하다. 포르노에서의 섹스는 감정이 없는 섹스다.”

이때 포르노는 현금화의 동기로부터 발현되는 상품화, 혹은 상품미학의 전략의 일부로 편입된다. 상품미학의 전략에 의해 인간의 욕구-충동구조는 조정되기도 하지만 『즐거운 사라』는 인간 욕망이라는, 텅 빈 끝없는 결핍 구조를 드러내 보여줄 뿐이다. 『즐거운 사라』의 섹스는 감정이 없는 섹스, 섹스-기계의 관습적인 섹스를 넘어서지 못한다. 나기사 오시마의 영화 『감각의 제국』은 포르노의 관습에 충실한 영화다.

신체의 한 부분에 대한 집요한 집착, 행위의 되풀이.......

작가는 포르노를 정교하게 절단하며 그 서사의 내면으로 작가의 정치사회적 함의를 불어넣는다. 뛰어난 작가의식은 돌연 포르노의 피상성을 해체하면서 충격과 매혹의 화면을 이끌어낸다. 전복과 위반의 전략으로서의 포르노. 포르노의 화면에 겹쳐지는 군국주의의 행진하는 군화들. 포르노와 군화들의 중첩을 통해 보이는 정치사회적 함의. 『감각의 제국』은 단순한 포르노를 넘어선다.

하드 코어 포르노그래피는 아니더라도 명백하게 “독자의 호색적인 흥미를 돋우는” 포르노라는 상품미학을 구현하고 있는 『즐거운 사라』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의식이 가로질러 간다. 하나는 그것이 부패한 상품, 정형화된 감성에의 모반이라는 의식과, 다른 하나는 현실을 선취해서, 현실의 중심을 가로질러 흘러가는, 사회적 반영상으로서의 소설이라는 의식이다. 생식을 배제한 철저하게 놀이로서의 성이 서사의 행간 속으로 스며든다.

작품의 전면에 거칠게 노출된 질탕한 성은 이중의 전략을 노출한다. 첫째 사회의 이중적이며 위선적인 가치 체계에 대한 전복의 전략이며, 둘째 노골적인 성애 소설이라는 코드를 통해 대중들에게 접근하려는 상품미학의 전략이 그것이다. 마광수는 말한다.

“혐오스러운 것을 보여주는 것은 문학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입니다. 특히 현대소설은 사회의 추악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회를 해부하다 보니 그로테스크한 모습이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만 그리면 실체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혐오스러운 것을 보여주는 것이 죄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만 포장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소설의 목적은 금지된 것을 파헤치는 것이고, 과거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요,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꿈꾸기입니다.”

‘혐오’의 유발이 중요한 문학적 목표의 하나였던 『즐거운 사라』는 상상과 허구를 버무리고, 한편으로 리얼리즘 문체를 활용해 사회의 조감도를 그려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굳이 구분하자면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세태소설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사라’라는 여성이 창안된 것은 이런 인물이 우리 사회에 적든 많든 실존할 수 있는 개연성이 큰 인물이기 때문이다. 『즐거운 사라』에서 작가는 한 젊은 여성이 전환기의 성윤리에 혼돈을 느끼며 여러 남자를 거치는 동안 겪는 내면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그 묘사의 결은 조잡하게 느껴질 정도로 거칠고 도발적이다.

마광수는 “경건과 금욕으로 강제된 한국 문학사에서 희귀하고 소중한 예”라는 평가를 끌어내기도 했다. 『즐거운 사라』 이전에도 그는 『권태』와 『광마일기』 같은 소설을 펴낸다. 이 두 소설은 모두 관능적 상상력의 해방을 그리고 있다. 다만 『권태』가 현대를 배경으로 육체를 성적 매개로 삼아 페티시즘과 마조히즘-사디즘을 그려내고 있다면, 『광마일기』는 신괴(神怪)·염정(艶情)·우언(寓言)·호협(豪俠) 등을 특징으로 하는 전기소설(傳奇小說)형식을 취한다. 『즐거운 사라』는 우연이 아니다. 『권태』에서 『즐거운 사라』까지 작가는 집요하게 포르노를 상품미학의 서사 전략으로 그 가능성을 실험해왔다. 이 소설들에는 쟝 보들리야르가 말하는 “외설스러움의 범람에서 오는 현기증”이 있다.

『즐거운 사라』는 숨겨진 현실의 재현, “실재가 실재와는 다른 것 속에, 즉 하이퍼 실재 속에 흡수되는 환상”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즐거운 사라』가 차용하고 있는 포르노그래피는 “단순한 상업주의적 에로스 소설”의 근거인가, 아니면 전복과 위반의 적극적 전략인가.5) 마이클 퍼킨스는 현대의 성애 소설이 세 가지 근거, 즉 공격적인 측면, 매혹적인 측면, 철학적인 측면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에로티시즘 저작의 공격적인 형태에서는, 에로티시즘을 통해 무정부적인 충동을 자아내는 극단적인 표현을 포함한다.

그것의 공격적이고 잔인한 이미지들은 독자들에게 충격을 가해 그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억압되어 있는 성적 감정의 파괴적 측면을 자각하도록 만들기 위해 의도된 것”이라고 말한다. 또 매혹적인 형태에서는 성적 공감의 정서를 끌어내서 독자의 성적 본성을 비춰주며, 철학적인 형태에서는 에로티시즘의 본질을 탐색하고, 특히 에로티시즘을 통해 죽음의 의미나 자아의 초월을 깨닫게 해주는 의식적·무의식적 충동을 고찰한다는 것이다.

『즐거운 사라』는 공격성·매혹성·철학성의 함의가 얇다. 그 얇은 함의의 비어 있는 자리를 채우는 것은 ‘성기’들과 그것의 분비물들에의 집착이다. 따라서 십 년이 지난 뒤에도 『즐거운 사라』에 덧씌워진 ‘음란문서라는 혐의’는 벗겨지지 않았다. 엉뚱하게 그 본질을 가려버린, 공권력의 개입으로 빚어진 소동들을 지우고 작품 자체로서 냉정하게 보자면, 실패로 끝난 미완의 실험이다. 다만 그것은 매우 적극적으로 근엄하고 폐쇄적인 유교적 가치체계 속에 억눌린 우리의 성의식을 포르노그래피라는 전략을 통해 드러내 보여준 선구적 작업이라는 평가마저 몰수할 수는 없다.

논문이냐, 주체적 글쓰기냐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앎”을 좇는다. 장자는 말한다. “지식은 접촉에 의하여 생긴다. 지식은 사려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지식을 가진 사람이 모르는 것에 대한 것은 마치 흘겨보는 것과 같다(知者, 接也 ; 知者, 謨也 ; 知者之所不知, 猶睨也. 庚桑楚) ” 오늘날 앎의 행위는 많은 경우 책을 통해서 전수된다. 특히 “진리의 전당”이라는 대학에서는 고전과 원전이라는 불리는 책들을 읽고 연구하고, 그 아는 바를 논문이란 형식의 글쓰기를 통해 드러내 보인다. 논문이란 무엇인가. 범박하게 말하자면 대학사회 안에서 유통되는 논문이란 학술적 주제를 담은 논증적 담론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그것은 “서구적 합리성이 근대를 거치면서 스스로의 형식적 체계를 갖춘 것”으로 일종의 제도화된 글쓰기이다. 인지·해석·논증을 서론·본론·결론의 구도 아래 구축하는 글쓰기. 이러저러한 각주와 참고문헌이 따라붙고, 연구사 비판과 연구방법이 적시되는 글쓰기. 이미 굳어진 형식의 통제에 순응하는 글쓰기. 그렇다면 “아카데믹하고 현학적인” 논문 형식의 글쓰기만이 학술적 가치와 의의를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글쓰기인가, 라는 물음을 던져볼 수 있다. 논문중심주의로 이루어지는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을 하고 있는 김영민은 논문이란 글쓰기가 미시적인 통제와 지배의 전략의 산물이라고 단언한다.

문화적 예속 상태에서 자율적 비판 및 선택의 권리를 망실해버린 채 맹목적으로 따라야만 했던 논문이라는 글쓰기는, 우리가 의식하든 말든, 처음부터 이 땅의 정신적 자원들을 실질적으로 통제하는 가장 미시적인 지배의 ‘전략’(실제 이 전략의 입안자가 있든 없든 관계없이)으로 기능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논문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학계의 일각에서 조심스럽게, 혹은 격렬하게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일찍이 김현, 조동일, 김용옥 등이 타율적 강박으로 주어진 틀을 깨고 나아간 그 길을 김영민, 권성우, 강준만, 이왕주, 김진석 등이 따라가며, 논문이 학술적 권위와 가치를 독과점하고 있는 현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형편이다. 김영민은 “논문이라는 글쓰기의 형식이야말로 줏대 없이 학문을 이 땅의 지식인들을 묶어두는 가장 원형적인 차꼬”9)라고 단정한다. 김영민의 과격해 보이는 주장은 논문중심주의 글쓰기가 자생성과 주체성을 담보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타당하다. 서구에서 이식된 형식성의 체계에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논문적 글쓰기가 언제나 복잡 현묘한 우리 현실의 문제들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학벌이 “사회적 권력과 재화, 명예를 독점”하는 하나의 권력의 표지이자 신판 신분제가 되는 우리 사회에서 대학은 권력의 재생산집단으로 기능한다.

학벌이 “사회를 움직이는 메커니즘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사실은 한국에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부분이다. 학벌이 그 자체로 부정적일 까닭은 없다. 그 자체는 가치중립적인 것이다. 그것이 비판받는 것은 단 한 번의 페이퍼 테스트로 결정되는 학벌이 본디 그것을 얻는데 들인 총비용보다 비합리적으로 더 큰 사회적 가치를 획득하고, 학벌에 토대를 둔 기득권 집단의 수탈구조를 강화하는 요소로 작용한다는 점 때문이다. 국제 사회에서는 “부도난 어음보다도 못한”(홍성욱) 서울대 졸업장이 한국사회에서는 얼마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우리 사회에서 공정한 게임의 룰보다 학벌을 통해 만들어진 인적 네트워크가 사회적 기회의 획득에 부당하게 유리한 힘으로 작용하는 사례는 드물지 않다. 그것이 사회의 공정한 게임의 룰을 심각하게 해치고, 그로 인해 생겨나는 사회적 갈등과 여러 폐해가 학벌사회, 혹은 학벌주의에 대한 유력한 비판의 근거가 된다. 학연에 기초한 인적 네트워크가 저 유럽의 한 사회학자가 말하는 사회관계 자본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공의를 심각하게 일그러뜨린다는 점에서 학벌중심사회에 대한 비판은 정당성을 얻는다. 김동훈, 『한국의 학벌, 또 하나의 카스트인가』,(책세상, 2001)

대학이라는 제도 안에서 논문은 대학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는데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패스포드이며, 대학과 대학 밖의 세계 사이에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을 만들고 대학의 권력을 세세연년 독점화하는데 기여하는 첨병의 역할을 한다. 어느 대학교의 인사위원회가 “당신은 대학교수인데도 논문을 쓰지 않았다, 당신은 대학교수의 직분을 수행할 능력의 부재를 드러낸 것이다, 당신은 더 이상 대학교수직을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되니 그 직위에서 해임하겠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대학의 인사위원회의 규정에 따른 공의로운 결정이며, 대학 인사위원회에게 부여된 고유한 권한과 권위의 행사임에는 틀림없다. 따라서 아무 절차적·법적 하자가 없는 이 결정에 제3자가 나서서 옳다 그르다고 하는 것은 “부당한 모략이며 음해”가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논문만이 학술적 가치와 의의를 실현하고 있다는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사고와 행위에 대한 눈곱만치의 자성(自省)과 자경(自警)조차 찾아볼 길 없는 독선과 허위의식에 깊이 감염된 것은 아닌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논문이 학문의 가치를 독과점하고 있는 오늘의 현상이 곧 그것이 앎「진리」의 최고 단계의 형식적 실현임을 보증해주는 것은 아니다. 삶의 끝은 있지만 앎의 길에는 끝이 없다. 다시 한번 장자는 말한다. “우리의 삶에는 끝이 있으나 앎에는 끝이 없다.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을 좇으니 위태로울 뿐이다(吾生也有涯, 而知也无涯. 以有涯隨无涯, 殆巳, 「養生主」).”

마광수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에서는 ‘에세이’와 ‘미셀러니’의 개념이 뒤섞여 사용되어 모두 다 ‘수필’로 통용되고 있다. 그래서 ‘에세이적 수필’이 갖고 있는 문학적 품격과 위상이 평가 절하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미셀러니가 에세이보다 격이 낮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격조 높은 논술적 담론이나 문화비평 등일지라도 그것에 ‘논문’이나 ‘비평’이라는 딱지를 붙이지 않고 ‘수필’이라고 해놓으면 사람들이 우선 얕잡아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나는 ‘수필’과 ‘에세이’의 명칭을 구별해서 쓰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수필(隨筆)’이란 말은 글자 그대로 ‘붓 가는 데로 쓰인 글’이라는 뜻이므로 미셀러니에 가깝다. 또한 미셀러니는 ‘잡다하다’는 말에서 온 것이므로 ‘잡문(雜文)’의 의미와도 통한다.

일상생활에서 느낀 감상의 파편들을 논리적 포장이나 가식적 수사 없이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이 바로 ‘수필’인 것이다. 요즘 들어 ‘담론(談論)’이란 말이 자주 쓰이고 있는 것은, 과거에는 아카데믹하고 현학적인 글을 이른바 ‘논문’이라고 부르며 격이 높은 글로 간주하고, 에세이를 논문보다 격이 낮은 글로 간주하던 풍조에 대한 반성의 결과라고 본다. ‘논문’이라고 하면 서론·본론·결론의 격식을 갖추고 일부로라도 잡다한 각주(脚註)들을 집어넣어 실증적인 틀에 맞추는 글이라고 볼 수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글쓴이가 무엇을 말했는가에 있지, 그가 얼마나 책을 많이 읽고 공부를 많이 했는가를 드러내는 데 있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앞으로는 설사 학위논문이라 할지라도 에세이의 형태를 갖추는 게 더 좋다고 본다. 형식이나 논리로 억지 허세를 부리다 보면 속 빈 강정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마광수의 주장은 비교적 온건하다. 일반적으로 논문은 “격조 높은 논술적 담론”이거나 “아카데믹하고 현학적인 글”로 간주된다. 그렇더라도 “형식이나 논리로 억지 허세를 부리다 보면 속 빈 강정”이 된다는 그의 주장에서 어떤 과격함의 혐의도 찾아볼 수가 없다. 마광수의 주장은 너무나 지당한 말이다. 지금-여기의 우리의 삶과 전면적으로 소통되지 않는 논문중심주의를 줏대 없이 숭상하고 따르는 학자들을 “형식숭배주의”, “병증”, “기지촌 지식인”이라고 싸잡아 비판하는 김영민보다 덜 과격하고, 강단 비평가들이 “학술논문의 권위와 논문중심주의에 대한 ‘수동적 인정’과 ‘냉소적 경멸’이라는 복합적 느낌”에 빠져 있다고 말하는 권성우의 가치중립적인 태도보다도 온건하다.

어떤 집단이 마광수의 글쓰기가 논문이 아니라 주로 잡문에 집중되어 있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심각한 “학문적 능력의 결함”이 있다고 판단한다면 이는 글쓰기에 대한 근본적 인식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해 논문 쓰기는 곧 학문 행위이고 잡문 쓰기는 비학문 행위라는 경직된 이분법적 가치 태도를 드러내 보인 것이다. 그렇다면 잡문(雜文)· 미셀러니과 논문의 차이는 무엇인가. 논문을 논문이게 하는 것은 그 체계와 형식일 터이다.

논문은 발생학적으로 서구의 합리주의에 바탕을 둔 학문적 전통에서 비롯된 글쓰기이다. 논문에게 부여된 권위가 있다면 바로 서구의 학문적·역사적 전통이 만들어준 권위일 것이다. 논문만을 유일무이한 학문적 가치를 실현시키는 글쓰기로 떠받드는 것은 서구 추수주의와 서구의 학문적 방법과 체계에 대한 예속상태에 함몰될 위험성이 없지 않다. 잡문은 잡된 글쓰기의 결과물이다. 그것은 “학문과 예술, 논문과 창작, 인식과 표현, 논리와 감성의 접경지대에 놓인 독특한 글쓰기의 양식”이다.

권성우는 대학교수이면서 현장비평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글쓰기 행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평소에는 현장비평 행위에 매진하다가, 대학제도가 요청하는 학술적 조건을 채우기 위해서 가끔씩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는 것이 상당수 강단 비평가들의 유력한 글쓰기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자세에는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투철한 자부심과 독립심보다는, 대학제도에 수동적으로 적응하는 과정을 통해 한편으로는 직업적 안정성을 도모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비평가로서의 활동도 원만하게 수행해보려는 비평가의 이중적 심리가 배어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권성우는 비평 활동이 학술적 연구의 항목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연구논문을 요구하는 대학제도의 규범에 순응하면서 아울러 우리 삶의 진실과 소통하고 현실의 생생한 리듬을 담은 현장 글쓰기를 병행하는 많은 강단 비평가들의 사례를 적시하고 있다.

공공성의 영역「현실· 객관적 정황」에서 사적 영역「나· 나-됨」으로 밀고 들어오는 억압이나 규정성의 힘과, 거꾸로 사적 영역에서 공공성의 영역으로 뻗어나가는 반발하고 저항하는 힘「충동· 의지」이 길항하는 자리에 참다운 나-됨은 실현된다. 생성즉존재(生成卽存在)를 체현한 나 - 됨의 규정성은 안 / 밖, 주체성 / 객체성의 그침 없는 회통(會通)을 통해서 발현된다. 타자성과 성명한 차이를 체화한 그 자리, 사유하는 주체 속에, 그 탈식민성의 존재에 정체성이라는 것이 깃든다. 나-됨을 추구하는 것은 객체성들을 한 손에 틀어쥐고 전체 속의 부분이라는 원근법 속에서 자기정체성을 찾고 구축하는 행위이다. 글쓰기는 그것의 구체적 실천의 한 양태이다. 나-됨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제도화· 타성화 된 글쓰기에 빠져 있는 것은 의식과 정신을 식민성에 담그고 있는 글쓰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정체성의 망실이며 객체성에로의 매몰이고, 필연적으로 자기비하·자기모멸로 이어진다.

마광수의 글쓰기는 나 - 됨에 대한 투철한 자각 위에서 비전형적·탈형식적 글쓰기를 추구한다. 이것은 “잡된 글쓰기”가 “평가절하” 되고 있다는 학계의 가치기준을 알면서도 “논리적 포장”이나 “가식적 수사”를 멀리 하고 실질을 따르는 일관된 그의 고집스러운 글쓰기의 태도에서도 입증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는 타성화·제도화된 글쓰기를 체질적으로 거부한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기왕에 굳어진 형식을 답습하는 것을 거부하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때그때의 느낌과 사유를 자유로운 형식으로 풀어내는 “잡된 글쓰기”이다.

한국사회는 “제국/식민지, 1세계/3세계, 개발/재개발, 중심/주변”의 대립항 속에서, 전자가 후자를 지배·규정하는 가운데 서서히 후자에서 전자에로 중심이동을 하고 있다. 한 젊은 과학사학자가 지적했듯이 “이런 공고한 이분법적 범주가 한국사회의 설명에 잘 들어맞지 않는 만큼 한국사회 그 자체가 이러한 범주들을 불완전한 것으로, 불안정한 것으로, 그리고 인위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홍성욱에 의하면 지금-여기 한국사회는 잡종(雜種·hybrid)의 문화가 지배하는 시대다. 잡종인간·잡종학문·잡종개념이 발호하는 지금-여기의 현실에 맞는 글쓰기의 양식은 “형식적 단순화의 전범”이며, 그래서 “복잡한 인간의 다양한 경험을 하나의 경직된 스타일 속에 담을 수 있다는 독선적 태도”에 빠진 논문보다는 오히려 잡종적 글쓰기가 현실적 정합성을 더 머금고 있을 수도 있다(김영민).

“씌어진 모든 것들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정신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리라.”

글쓰기는 피의 유혹이다. 글쓰기는 피의 쾌활함의 분출이다. 나는 여기까지 써온 것을 눈으로 훑어 읽는다. 내 고요한 내면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렁임을 느낀다. 그것은 기쁨이다.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에서 오는 기쁨이다. 나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느낄 줄 아는 오감을 갖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 너무 좋다. 내면에서 조용한 흥분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이 기쁨은 내가 살아있음을 실감으로 되돌려준다.

나는 논문의 폐기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 부여된 지나친 권위와 가치의 독과점화, 논문의 특권적 지위를 우려하는 것이다. 진리는 논문 속에 있지 않다. 현실을 역동적으로 변혁하는 힘은 논문에서 나오지 않는다. 유동하고 변전하는 현실과 동떨어진 길을 가는 논문은 개념적 지식의 무덤이다. 다시 한번 묻자. 논문이냐, 주체적 글쓰기냐. 단순화하면 논문이든, 주체적 글쓰기든 둘 다 ‘무엇을 말하는 것’이다. 둘이 언제나 상극(相剋)인 것은 아니다. 형식이 굳어지면 필경 그것은 내부로부터 해체된다. 형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잡종적 글쓰기도 이미 있는 형식을 해체·확장한 뒤 새롭게 만들어진, 아직은 미약한 형식의 글쓰기일 뿐이다. 그것은 다시 새로운 형식의 굳은 매혹을 향해 몸을 밀고 나아간다.

문제는 지식인의 허위의식이다. 형식의 정합성은 그 ‘무엇을 말하는가’의 정합성에서 나오는 것이지, 바깥에서 주어지는 불변의 가치가 아니다. 어느 쪽이 오늘 현실의 다양성·복잡성·현장성을 담아내는 글쓰기냐. 서구의 근대주의 정신사에 바탕을 둔 제도화·형식화된 논문이냐, 복잡 현묘한 지금-여기의 현실의 지형에 온몸으로 부딪쳐 주체적으로 문제를 길어내고 사유를 풀어내는 잡종적인 글쓰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