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의 작품

남대문 소고

미송 2014. 4. 11. 20:04

 

 

 

남대문 소고

 

 

1960년대 서울 대중교통수단은 도로 한복판에 깔린 레일 위를 달리는 전차였다. 당시 전차 차량소가 있던 동대문을 기점으로 동쪽으로는 청량리와 삼선동까지, 서쪽으로는 독립문, 그리고 남쪽으로는 한강을 건너 노량진까지 다녔다. 지금의 도로도 그렇지만 그때도 전차는 동대문이나 남대문의 바로 옆을 돌아 지나 다녔는데 특히 남대문역은 바로 성문 옆구리에 위치하여 전차에서 내리면 곧바로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중학생의 어린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성벽 위에 뭐가 있는가 하여 남몰래 동대문과 남대문을 다 올라갔었다. 천정에 그려진 용과 꽃의 괴기스런 모습과 붉은 기둥, 그리고 마룻장에 먼지만 잔뜩 갈렸었다. 히뜩히뜩 둘러보다가 꼭 귀신이 나올 것만 같아서 쫓기듯 내려왔던 기억이다.

 

서울 사람은 정확히 말하면 종로의 보신각을 중심으로 한 한양 4대문, 동쪽은 흥인지문, 서쪽은 돈의문, 남쪽은 숭례문, 그리고 북쪽은 소지문 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말한다. 더 엄격히 3대를 내려오며 한양 4대문 안에서 쭉 살아야 비로소 서울 사람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3대를 살았건 4대를 살았건 개발되기 이전의 서울 태생은 고향을 상실한 사람들이다. 근대화의 바람을 타고 지방 사람들이 서울로 무작정 몰려들고 도시계획이라는 횡포에 옛 기와집이 헐려 큰 도로가 마구 사방으로 뻗고 빌딩이 숲처럼 들어섰으니 사람도 낯설고 길도 낯설어, 이북에 고향을 둔 사람들은 돌아갈 곳이라도 있겠지만 서울 사람은 그곳마저 없는 셈이다. 호적을 떼면 눈에 띄는 서울시 종로구 원남동이라는 내 본적에서 겨우 고향의 향수가 느껴질 뿐이다.

 

그런 서울 사람에게 분명하고도 강렬하게 고향을 느끼게 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내가 어릴 때 철조망 아래의 개구멍으로 몰래 드나들던 창경궁이나 그 옆에 종묘, 그리고 위풍당당한 장수를 연상케 하는 동대문과 남대문인 것이다. 북문인 소지문은 왕터인 경복궁의 팔다리와 같기에 그 곳에 길을 내면 맥을 자르는 일이라 하여 태종 때부터 병사들 이외에는 출입이 금지된 곳이고, 서문인 돈의문은 일제시대에 전차 복선공사로 헐어버렸기에 역시 서울 사람에게는 동대문과 남대문이 가장 친숙했던 것이다. 그러나 풍수지리로 따져 동대문과 남대문은 예부터 왈가왈부가 많았다. 동쪽이 매우 허하다하여 다른 문들은 석자씩의 이름을 지었지만 유독 동대문은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하여 풍수지리에서 산을 상징하는 자를 하나 더 넣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더욱 동쪽을 보강하는 의미에서 동대문 밖 십리에 관우의 사당인 동묘(東廟)를 들였다.

 

그러나 한양천도에 있어서 더욱 골칫거리는 관악산이었다. 풍수설에 의하면 경복궁 정면으로 보이는 관악산은 화기(火氣)가 등등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한양천도 당시에 성안이나 궁궐에 화재가 빈번히 일어났다. 이에 나쁜 자리를 고쳐 쓰는 비보(裨補)풍수를 동원하였으니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물의 상극을 상징하는 해태상을 경복궁 앞에 세워 관악산을 바라보게 했다.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다른 성문에는 다 횡으로 쓴 현판을 남대문만은 유독 불이 타오르는 형상인 세로로 숭례문(崇禮門)이라 써 붙였던 것이다. 그렇게 남대문은 화기(火氣)와 굳건히 맞서서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동란을 버텨 600년간 제 자리를 지켰 왔는데, 그만 라이터 하나로 전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이유도 딱 한 가지, 제 값을 안 주고 땅을 정부에서 수용해갔다는 것이니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이다. 구전문사(求田問舍), 큰 뜻을 품지 못하고 그저 땅이나 구하고 집값이나 물으러 다니며 제 이익에만 몰두하던 촌로(村老)의 욕심과 울분 하나가, 밤낮 화염을 뿜어내던 관악산의 화기를 끌어들인 모양이다.

 

이번의 남대문 화재사건으로 새로 들어설 정부에 대한 각종 유언비어가 떠돈다. 지맥을 끊으며 낙동강과 한강을 잇는 새 정부의 대운하 공사에 땅이 분노했느니, 한글을 무시하고 영어몰입 교육을 하려고 해서 세종대왕이 화가 났느니, 자못 민심이 흉흉해지는 것이다. 대운하 사업이야 토목에 대하여 문외한인 내가 나설 일은 아니지만 영어몰입식 교육에는 적이 우울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윗사람이 앞장서서 지켜도 그 수명을 장담치 못하는데 정부를 인수하는 수장이 오렌지는 못 먹는다나? “어뢴지만 먹는다나? 그렇게 누가 비꼬고 들어가자 이번에는 미국 사람이 나서서 거들기를, 미국 사람의 귀에는 오렌지나 어뢴지나 다 똑같다나, 아침 인사는 굳모닝으로 한다고 한다.

참으로 암담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한글의 역사가 500년이라고 하지만 한글이 대중화된 것은 겨우 100년뿐이 안 된다. 그것도 일제시대 말에는 일체 한글을 못 쓰게 했다. 해방이 되어 겨우 한글이 살아나는가 싶더니만 이제는 윗대가리들이 제 손으로 한글을 내쳐 버리듯 하다니 정말 어이가 없다. 이 사람들이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이야?

 

이번 화재에서 양녕대군이 쓴 숭례문(崇禮門)이라는 현판은 겨우 건졌다고 한다.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윤동주 시인이 쓴 몇 편의 수필 중에 이 현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내용에 의하면 시골에서 한양으로 올라온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이 남대문 높이 달린 숭례문이라는 현판을 가리키며 저것이 뭐라고 썼는지 아냐고 잘난 척을 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질세라 기세등등하게 남대문이라는 글자라고 대답했다. 이에 물어봤던 사람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만 남대문(南大門)이라는 글자를 아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저 멀리 만주의 용정에서 한글로 시를 쓰던 윤동주 시인의 수필 한 토막으로, 오늘의 암담함을 떨쳐 버리고 싶은 밤이다.

 

2008년 2월, 이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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