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배수연 <야간주행>

미송 2014. 9. 7. 11:31

 

  야간주행 / 배수연

 

  거대한 수사슴을 치었어요 

 

  입을 벌리면 잉크가 쏟아지는 밤이었고

  내 영국산 지프 앞에 숨을 헐떡이며 피를 흘리는 큰 뿔 사슴이 있었어요

  나는 사슴을 넘을 수도 태울 수도 없어 어느새 한 시간째 경적만 울렸어요

  사슴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향해 자신의 이름을 말하려고 해요

  제발 그만,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알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거야

  왜 내 앞으로 뛰어든 거야?

 

  사슴의 터진 몸에서 나오는 빛나는 주홍 알갱이들

  그건 껍질이 벗겨진 귤의 살처럼 쓰러진 채 물을 흘렸고

  나는 뒷좌석에서 얼굴을 싸매고 밤을 새웠어요

  고개를 숙일수록 차오르는 주홍 강물

 

  이 밤이 지나면

  우린 달리는 것과 흐르는 것들의 목적지에 닿을 거야

  그곳에선 너와 나의 이름을 말하는 이도 부르는 이도 없겠지만-

  태양 아래에 서서

  나는 너의 무늬들을 기억하고 하나하나 불러줄게

  우리 둘의 그림자는 착한 방향으로

  눈썹을 가지런히 정련하고 있을 거야

 

 

배수연 시인  1984년 제주에서 출생. 2013년 《시인수첩》으로 등단.

 

 

둘의 그림자가 착한 방향으로 눈썹을 가지런히 정련하고 있을 거라 고 진짜 믿어진다. 다만 조근조근 사건과 마음의 흐름을 들려줬을 뿐인데 독자는 그래그래 정말 너희 둘의 미래는 그렇게 될 거야, 아니 미래뿐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너무 예쁘고 착한 걸, 하며 스스로 설득당하고 싶어진다. 시를 읽자니 내게도 저보다 숱한 우연사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기억이 떠오른다. 사슴인지 노루인지 아니 강아지인지 고양이인지, 30대 폭주족 시절, 나도 아마 그 누구인가를 치인 적이 있었지. 아냐, 환청이었을 거야 하며 뒤도 안 돌아보고 달리며 찝찝했던 기억이 마구 떠오른다. 얼만큼 살생의 피를 외면한 채 길을 지나 왔을까 생각하자니 자책감이 돋는다. 2년 전 하얀 겨울 집 근처 시골길을 드라이브할 때 산에서 내려온 두 마리 고라니가 길 양 옆으로 마주서서 우리 자동차가 지나갈 때를 기다리던 그 눈빛은 오랫동안 선연하였다. 아무튼, 얼굴 예쁜 시인이 시도 잘 쓴 걸 보니 마음이 설레고 즐겁다. …… 늙었다 싶다, 나도.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