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란 문학실

자화상

미송 2016. 10. 16. 09:12

 

에곤 실레 (이중 자화상, 1915)

 

 

자화상 / 오정자

 

 

 

세수하지 않아도 깨끗한 나팔꽃처럼

투명함을 원했지

가령 마른 빛 속내를 들여다보듯

 

2

낯익은 시선이 고개를 돌린다

기다렸다는 듯이 던지는 화두

작년 나뭇잎들의 색깔을 묻는다

누런 잎이 더 좋아

 

3

평범한 하늘이 물기를 나른다

아직 살아 있다고 말하는 삶만이 또 하나의 세상을 연다

고엽과 산책과 발자국 

자그만 손거울이 등허리를 비추며 따라간다

그림자에 거울을 들이밀던 유년의 놀이는

어느 갈피에 있을까

밖으로 나서기를 몹시 꺼리는 나는

게으르다

 

4

수만 개의 거울이 뒤집힌다

고지식하게 햇살을 담아내는 낙엽들

크로키한 이미지들 

투명한 것은 아픔이다

누구도 분명히 비춰주지 못했으니

오해로만 점철되었으니

원형이란 원래 없었으니

 

5

깨지지 않을 거울을 말하려 할 때면

당신과 내가 하나의 거울이라

온전한 거울이라 말해야 한다.

 

 

 

 

에곤 실레 [1890.6.12~1918.10.31]

오스트리아의 도나우 강변의 한적한 시골에서 태어났다. 실레를 가리켜 요절한 천재 화가라고 말하며 그의 삶이 영화화 되었는가 하면 벌거벗은 영혼이라는 제목으로 책도 나왔다. 클림트는 실레의 스승이자 동료이며 친구였다. 실레와 클림트가 달랐던 것은 클림트가 두루 뭉실하게 포장하여 성을 표현했다면 실레는 외설 혐의로 수감될 줄 알면서도 적나라하게 표현한 점이다. 클림트가 19세기말을 풍미했다면 실레는 1차대전 직전의 불안과 고독한 시대를 대변하다 간 화가이다. 실레는 진정한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선 화가는 궁핍하고 고난에 처해야 한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그는 미남인데다가 외모도 출중해서 기생 오래비 같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궁핍해도 궁색해 보이는 옷은 절대 입지 않았다. 발리는 원래 클림트의 모델이었는데, 실레를 만나 그의 모델이 되고 동거한 사이다. 그는 그녀와 이별하고 하름스와 결혼했지만 아기를 임신한 채로 독감에 걸려 죽었고 실레 역시 아내가 죽은 3일 만에 감기로 사망한다. 에곤 실레의 나이 28세 때이다

 

 

20140925-201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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