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김현승 <시의 맛>

미송 2015. 1. 24. 10:37

 

시의 맛 / 김현승

 

멋진 날들을 놓아두고

시를 쓴다.

고궁엔 벚꽃,

그늘엔 괴인 술,

멋진 날들을 그대로 두고

시를 쓴다.

 

내가 시를 쓸 때

이 땅은 나의 작은 섬,

별들은 오히려 큰 나라.

 

멋진 약속을 깨뜨리고

시를 쓴다.

종아리가 곧은 나의 사람을

태평로 2가 프라스틱 지붕 아래서

온종일 기다리게 두고,

나는 호올로 시를 쓴다.

 

아무도 모를 마음의 빈 들

허물어진 돌가에 앉아,

썩은 모과 껍질에다 코라도 부비며

내가 시를 쓸 때,

나는 세계의 집 잃은 아이

나는 이 세상의 참된 어버이.

내가 시를 쓸 땐

 

멋진 너희들의 사랑엔

강원도풍의 어둔 눈이 나리고,

내 영혼의 벗들인 말들은

까아만 비로도 방석에 누운

아프리카산 최근의 보석처럼

눈을 뜬다.

빛나는 눈을 뜬다.

 

 

김현승의 이 작품은 작품 쓰기의 축복됨 혹은 작품 쓰기를 행복한 잔치로 만들려는 시인의 노력이 잘 드러나 있는 보기 드문 시편이다. 완성의 성취감 이외에도 글쓰기 그 자체에도 그 나름의 쾌감이 따를 것이다. 시편을 통해 우리는 그것을 엿볼 수 있다. 조금은 쓸쓸하고 비어 있는 마음으로 시를 쓰면서 시인은 스스로 거처 없는 세계의 고아라고 느낀다. 시를 쓰는 것은 집 잃은 아이가 제 집을 짓는 행위일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시를 쓸 때 시인은 세상의 어버이가 되고 어버이로서 말을 한다. 모든 시인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김현승의 경우 이 말은 아주 어울린다. 정갈하고 담백하면서도 <시의 맛>은 한결 구체적이고 호흡이 길다. 그 점에 이 시편의 매력이 있고 호소력이 있다. 시 쓰기는 힘든 사랑의 노동이기도 했겠지만 참된 어버이가 되는 길이기도 했던 김현승은 겸허한 행복의 시인이었다. 그의 시학에서 그는 스스로 축복을 빚어낸다. 그의 시학은 긍정과 행복 수락의 시학이다. <종호, 삶과 꿈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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