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맛 / 김현승
멋진 날들을 놓아두고
시를 쓴다.
고궁엔 벚꽃,
그늘엔 괴인 술,
멋진 날들을 그대로 두고
시를 쓴다.
내가 시를 쓸 때
이 땅은 나의 작은 섬,
별들은 오히려 큰 나라.
멋진 약속을 깨뜨리고
시를 쓴다.
종아리가 곧은 나의 사람을
태평로 2가 프라스틱 지붕 아래서
온종일 기다리게 두고,
나는 호올로 시를 쓴다.
아무도 모를 마음의 빈 들
허물어진 돌가에 앉아,
썩은 모과 껍질에다 코라도 부비며
내가 시를 쓸 때,
나는 세계의 집 잃은 아이
나는 이 세상의 참된 어버이.
내가 시를 쓸 땐
멋진 너희들의 사랑엔
강원도풍의 어둔 눈이 나리고,
내 영혼의 벗들인 말들은
까아만 비로도 방석에 누운
아프리카산 최근의 보석처럼
눈을 뜬다.
빛나는 눈을 뜬다.
김현승의 이 작품은 작품 쓰기의 축복됨 혹은 작품 쓰기를 행복한 잔치로 만들려는 시인의 노력이 잘 드러나 있는 보기 드문 시편이다. 완성의 성취감 이외에도 글쓰기 그 자체에도 그 나름의 쾌감이 따를 것이다. 시편을 통해 우리는 그것을 엿볼 수 있다. 조금은 쓸쓸하고 비어 있는 마음으로 시를 쓰면서 시인은 스스로 거처 없는 세계의 고아라고 느낀다. 시를 쓰는 것은 집 잃은 아이가 제 집을 짓는 행위일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시를 쓸 때 시인은 세상의 어버이가 되고 어버이로서 말을 한다. 모든 시인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김현승의 경우 이 말은 아주 어울린다. 정갈하고 담백하면서도 <시의 맛>은 한결 구체적이고 호흡이 길다. 그 점에 이 시편의 매력이 있고 호소력이 있다. 시 쓰기는 힘든 사랑의 노동이기도 했겠지만 참된 어버이가 되는 길이기도 했던 김현승은 겸허한 행복의 시인이었다. 그의 시학에서 그는 스스로 축복을 빚어낸다. 그의 시학은 긍정과 행복 수락의 시학이다. <유종호, 삶과 꿈 中에서>
'내가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소란<정전停電>외 1편 (0) | 2015.02.03 |
---|---|
이원 <일요일의 고독1> (0) | 2015.01.31 |
정영효<같은 질문들> (0) | 2015.01.22 |
장정일 <충남 당진 여자> (0) | 2015.01.17 |
이제니 <가지 사이> (0) | 2014.1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