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추풍령유감 / 오탁번
참새 똥 뒤집어쓴 허수아비 하나
수수밭 두렁에서 웃고 있다
아득하기만 한 이 가을날
오직 나 하나 눈물방울 사이로
가까운 山 더 멀리 보이고
먼 山 더 가까이 보인다.
풍령이 뭔가 하여 사전을 뒤적인다. 듣도 보도 못한 어휘들이 아직 내게 남아있다는 것은, 뭔지 모를 풍요로움을 꿈꾸게 한다. 이미지들도 참 예쁘다. 맑고 투명하여 바람이 슬쩍 손만 대도 흔적이 그대로 남을 것 같은 유리병. 어제 축제장에서 보았던 안데스 쪽 소품, 드림케쳐와 비슷한 기원이 담겨있을 것 같은 풍령을 짐작해 본다. 오 시인의 시는 주제와 이미지가 선명해서 편안하다. 시인의 해피버스데이를 읽은 날 나는 바로 그걸 아이들 앞에서 써 먹었는데, 아이들 반응은 그 유머 이미 알고 있었어요, 였다. 유행하는 유머조차 시를 통해 겨우 배우곤 하는 느림보 습성. 어쨌든 시 제목이 마음을 끄는 데 성공적이고, 길고 복잡할 수 있는 인생 주제를 무엇보다 쿨하게 말하는 것도 그렇다 싶다. 그렇다. '인생은 짧고...' 란 문장에서, 인생은 문장 그대로 짧을 뿐이고, 그걸 예술적으로 논하려는 뒷세대의 말이 그저 기일~ 뿐, 인생 뭐 별거 있나요? 요즘 5학년 아이들도 50대 아줌마도 같은 말로 운을 떼는 인생, 인생이 아니던가. '가까운 것 안경을 벗어야 보이고, 멀리 것 안경을 걸쳐야 보이고, 이건 바로 내 요즘 형편이 아니던가. 누군가 이제 돋보기를 쓰시지요? 하고 놀리면 번번 아직 그 정도는 아니예요 하며 웃긴 하지만, 속으로는 C~벌이라니...원! 어쨌든 오씨 성을 가진 시인들 중 맘에 드는 시인들, 오세영 시인의 원시(遠視)까지 연상이 되는 오탁번 시인의 가을을 읽는 오후, 이 아름다운 가을도 곧 지나가리라.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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