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예술이다 / 이승훈
용인 공원 식당 창가에 앉아 맥주를 마신다. 앞에는 정민 교수, 옆에는 오세영. 유리창엔 봄날 오후 햇살이 비친다. 탁자엔 두부, 말린 무 졸임, 콩나물 무침, 멸치 졸임. 갑자기 가느다란 멸치가 말하네. "생각해 봐! 생각해 봐!"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라는 건지 원! 멸치 안주로 맥주 마실 때 "이형은 목월 선생님 사랑을 그렇게 받았지만 생전에 보답을 못한 것 같아." 종이컵에 하얀 막걸리 따라 마시며 오세영이 말한다. "원래 사랑 받는 아들 따로 있고 효자 아들 따로 있는 거야." 그때 내가 한 말이다. 양말 벗고 햇살에 발을 말리고 싶은 봄날.
"이군이가? 훈이가?" 대학 시절 깊은 밤 원효로 목월 선생님 찾아가면 작은 방에 엎드려 원고 쓰시다 말고 "와? 무슨 일이고?" 물으셨지. 난 그저 말 없이 선생님 앞에 앉아 있었다. 아마 추위와 불안과 망상에 쫓기고 있었을 거다. 대학 시절 처음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나올 때 "엄마야! 이군 김치 좀 주게. 이군 자취한다." 사모님을 엄마라 부르시고 사모님은 하얀 비닐봉지에 매운 경상도 김치를 담아 주셨다. 오늘밤에도 선생님 찾아가 꾸벅 인사드리면 "이군이가? 훈이가? 와? 무슨 일이고?" 그러실 것만 같다.
― 제 1회 〈이상 시문학상〉수상작
이승훈 1942년 강원도 춘천 출생. 196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사물 A 』『당신의 방』『비누』『너라는 환상』『이것은 시가 아니다』등.
오세영 시인의 입찬(?) 소리 한 마디가 파문을 일으켰을까. 그렇다. 스승이나 연인, 그 누군가로 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랑을 되돌려주는 일은 더 힘든 일 같다. 적절한 타이밍, 전달력 있는 마음, 시간을 견딤 등등, 조건이 맞아 떨어져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릴없어서, 대책 없어서, 아찔하여서, 양말 벗고 햇살에 발을 말리고 싶은 봄날. 화자는 또 어쩔 수 없어서, 추억 속으로 추억 속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나 보다. 술자리에서 툭 받아 친 말 한 미디 때문에 본의 아니게(?) 이런 헌정시(?)까지 쓰시고, 이상 시문학상까지 수상하게 되었으니, 요즘 아이들 말로 대박 아닌가?
그나저나 하늘나라에 계신 목월님은 아실까 모르실까? 엊그제 우리 술자리까지 오셨길래, 강나루 건너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취한 내가 기어갈 듯한 목소리로 낭송을 했는데, 아실까 모르실까. 하늘에 계신 우리 님. 30대 여성의 가느소롬한 눈매를 붉히게 했는데.
술자리 이후, 뒤풀이 삼아 나는 1년에 한 번 들을까 말까한 소식들을 귀에 담는다. 내가 그 얘길 다 하려면 책을 내야 될 거예요 정말... 평소 편안해 보이던 얼굴에서 그런 푸념이 나오는 걸, 그래, 나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 그렇구나, 예술이었구나. 책을 써야 할 정도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야 할 미완의 목소리들, 추위와 불안과 망상에 쫓기는 미완의 예술들. 사랑을 어떻게 되돌려 줘야 하는지 고민하는 우리들. 이제부터는 '그러려니 하는 거죠, 뭐…….' 라는 말 속에 '모두가 예술이죠, 뭐' 라는 의미를 심어두련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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