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류학 / 오은
인류학과인 줄 알고 들어갔는데 알고 보니 일류학과였다 알기만 해서는 안 된다 일류가 되려면 알고 봐야 한다 일류학과 교수는 인류보다 일류가 되는 게 먼저라고 했다 단상 위에 올라서서 첫날부터 올라서는 법을 가르쳤다 올라서기 위해서는 밟아야 한다 남을, 뒤를, 남의 뒤를
그는 올려다보는 법이 아닌 내려다보는 법만 가르쳤다 키 작은 아이들에게는 억지로 키높이 구두를 신겼다 새겨보는 법이 아닌 거들떠보지 않는 법만 가르쳤다 눈이 아직 초롱초롱한 아이들에게는 색안경을 씌웠다 눈이 높지 않으면 눈이 뒤집히는 건 한순간이라고 했다 눈이 벌겋지 않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눈 밖에 난다고 했다 수업 도중, 눈이 낮은 아이들이 한눈에 눈 밖에 나고 말았다 눈에 차지 않아서 눈이 시어 못 봐주겠다고 했다 눈에 불을 켜지 않으면, 눈이 핑핑 돌아가지 않으면 눈에 흙이 들어간다고도 했다 그 흙도 비옥토가 아니라 푸슬푸슬한 척박토라고 했다
살펴보는 눈, 톺아보는 눈, 새겨보는 눈, 헤아려 보는 눈이 아닌 가려보는 눈, 따져보는 눈, 달아보는 눈, 부릅뜨는 눈이 필요하다고 했다 눈은 마음의 거울이 아니라 모음의 저울이라고 했다 더 많이 모으기 위해, 더 높이 올라서기 위해 인류 저울이, 아니 일류 저울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려면 보는 눈이 정확해져야 한다고 했다 태풍의 눈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일류학과 교수답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수업이 끝나자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옆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아이도 있었다 알고 보니 우리는 사이좋게 눈엣가시가 되어 있었다 인류의 윤곽이 눈앞에 자꾸 아른거렸다 두 눈에서 일류(溢流)하는 물을 막느라 모두 눈을 감고 걸었다 맹목(盲目)으로 남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오은
2002년 《현대시》 등단.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가 있음.
박인환문학상 수상.
‘작란(作亂)’ 동인.
| 시인의 시론 | 어떤 시인은 조사(助詞) 하나를 가지고 일 년을 넘게 끙끙거렸다. 마치 단어 하나가 풍기는 뉘앙스가 전부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각각의 조사가 풍기는 느낌에 사로잡혀 헤매고 또 헤맸다. 그리고 그 느낌은 섣불리 말해질 수 없었다. 쉽게 말해져서는 안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번 내뱉고 나면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일 년이 흘렀지만, 그는 그 어떤 조사와도 이별할 수 없었다. 마음의 준비가 아직 안 돼 있었다. ⁎ 이 년 전, 늘그막의 나를 생각하며 쓴 글의 일부다. 시를 쓸 때마다 늘 조사 하나를 가지고도 고심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수만 가지의 단어들을 하나하나 가슴에 새기길 바라는 마음에서. 백지 앞에서 결코 자만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부디 그러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 책상 서랍을 열었다. 서랍을 여는 순간은 언제나 설렌다. 오늘도 몇 개의 단어들을 서랍 속에 집어넣었다.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책상 서랍을 닫았다. 서랍을 닫는 순간은 언제나 막막하다. 철썩철썩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20151115-20160511
단 한 편의 시
조사를 선택하는 동안, 그는 늙기 시작했다. 바다 위에 떠다니는 한 점의 물방울처럼, 그것은 끝끝내 잡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매일 바다에 나가 언제 밀려올지 모를 파도로부터 물방울을 구하는 심정으로 시를 썼다. 사실, 시를 썼다기보다 조사를 선택하느라 골몰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에게는 접미사나 구두점같이 일견 하찮게 보이는 것들조차 무겁고 버겁기만 했다.
그는 평생 단 한 편의 시만 남겼다고 한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책상 서랍에는 수만 가지의 단어들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그것들이 주는 질감이 너무나도 독특해서 그 누구도 섣불리 그것들을 주워담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얼마 전 세 번째 시집의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고 시를 쓰지 못하는 상태에 또다시 접어들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시작한다. 단어 하나에서 시작한다. 조사 하나를 가지고 골몰하다 보면 파도도 두렵지 않은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물방울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단 한 편의 시를 써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민정 <제 이름은 야한입니다> (0) | 2016.05.16 |
---|---|
오은, 「미니 시리즈」 (0) | 2016.05.11 |
김승일<미친 펭귄> (0) | 2016.05.07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황금 장수말벌> (0) | 2016.04.13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선택의 가능성>외 2편 (0) | 2016.0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