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정연수<추전역>

미송 2009. 7. 17. 00:20

 

 

 

추전역 / 정연수

 

희망은 언제나 높은 곳에 자리했다

우리나라 제일 높은

해발 855m 추전역

 

서민의 애환 덜컹이는 태백선 완행열차

그 화력 좋던 석탄 다 실어 보내고

가슴 비운 사람끼리 꿈을 안고 찾아드는

태백의 관문

 

일상에 지친 삶의 아픔도

구름 벗한 높이쯤 다다르면

어느새 길고 긴 정암 터널 빠져 나온

환한 세상

 

저 아래 발원지에서 흐르는 한강 낙동강

팔도의 애환 굽어보는

싸리밭 가득한 우리의 희망은

해발 855m  

 

 

 

 

한중대역시집<시의 소통, 경계를 넘어선 만남> 가운데 특별히 정연수 시인의 '추전역'을 주의깊게 읽었다. 아무래도 오프라인 공간에서의 친숙한 만남- 나의 독서지도사 교수님이기도 한 - 이 전제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 의미를 붙이자면 20대 초반 나의 추억이 그 곳에 고스란히 묻혀있기 때문이다. 추전역, 이름만 들어도 달려가보고픈 충동이 일어난다. 탄광촌에서 근 2년간 선교활동을 한 적이 있었는데, 막장인생이라 불리우던 광부들의 삶과 그 가족들의 애환이 아직도 생생하다. 희한하다. 어두컴컴한 동굴에 대한 기억이 이토록 오래남는다는 것이. 하여간 추전역은 잃어버린 청춘의 한 조각을 부상시켜준 가로등 불빛같은 시다. 새삼 그리워지는 내 역사(歷史)의 간이역같은 시임에 분명하다.    

 

 

울 아버지 붕락사고로 막장에 갇혀

밖에 있는 가족 걱정 이틀 밤낮 사경 해맬 때

강씨도 덩달아 퇴갱을 안 했다

들여다주는 도시락 먹으며 갑 을 병방

꺼내야 돼 살려야 돼

씨름판에서 소 타던 힘으로 삽질을 해댔다

아버지가 갱구 밖을 나왔을 땐

아득한 아버지 숨만큼 강씨도 탈진했다

술만 거나해지면 아버지는 날 앉혀놓고

강씨는 우리 집안 은인이야

날 살리려고 같이 죽어갈 뻔했다

니 평생 잊으면 그거도 불효다 이놈아 알겠지


   강씨가 규폐병동에 입원한 지 삼 년이 못 돼

영안실로 옮겼다는 전화를 내가 받았다

아버지는 그럴 리 없다며 규폐병동으로 달려갔고

강씨가 누워 있던 침대 머리맡엔

반쯤 남은 링겔병만 대롱대롱 걸렸다


   아버지는 당신보다 먼저 간 게 못내 마음에 걸렸던지

소주 서너 병을 비우고도 연신 강씨 얘기다

칠월의 오후보다 더 뜨겁던

해저(海底) 아득한 막장에서의 삽질 곡괭이질

애쓰지 않아도 떠오르는 기억은 있는 법이다

실연 혹은 첫 경험 같은

강씨 생각이 더욱 선한가 보다

그때 내가 먼저 갔어야 되는데, 내가 먼저 갔어야

강씨의 죽음이 아버지 탓이라도 되는 양

아버지의 목쉰 울음 안개비처럼 서럽더니

은혜 갚을 일이 막연해진 게 원통해선지

하늘도 덩달아 비를 잔뜩 뿌렸다.

   

― 정연수, 「규폐병동에서 2」 전문


 

진폐증을 다룬 작품들은 대부분 죽음의 문제를 담고 있다. 해방 이후 1990년까지 5천 명이 넘는 광부들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듯이, 광산 노동의 위험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광부들은 붕락사고, 가스 폭발사고, 출수사고, 그리고 각종 안전사고 등에 노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진폐증으로도 시달리고 있다. 진폐증은 전체 광산 노동자의 10% 정도 걸린 것으로, 20년 이상 근무한 경우는 50% 이상 걸린 것으로 추산된다. 초기에는 증상 없이 서서히 발병하다가 어느 순간 진단되는데, 흉부x선 검사에서 병변이 보이고 폐기능 검사에서 이상 소견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치료 시기를 놓쳤다고 볼 수 있다.  

 

‘강씨’는 단오절이면 동네 씨름판을 휘어잡아 “상으로 탄 큰 소 한 마리로/사택마을 잔치를 벌여주곤 했”(「규폐병동에서 1」)을 정도로 신체가 건장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 역시 광부로서 ‘규폐’라는 산업재해를 벗어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규폐병동에 입원한 지 삼 년이 못 돼/영안실로 옮”겨지고 만 것이다.

 

시인이 ‘죽음’을 인식하고 있는 것은 살아남은 자로서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이다. ‘강씨’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넘어 살아남은 자로서 어떻게 하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다. 시인이 “강씨는 우리 집안 은인이야/날 살리려고 같이 죽어갈 뻔했다니/ 평생 잊으면 그거도 불효다 이놈아 알겠지”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새기고 있는 것이 그 모습이다. 붕락사고로 막장에 갇혀 있는 동료를 살려내기 위해 퇴갱을 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삽질을 한 ‘강씨’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죽어 혼령이 되어서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는다는 ‘결초보은(結草報恩)’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포기할 수 없는 인간 가치이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진정한 가치이다. “당신보다 먼저 간 게 못내 마음에 걸렸던지/소주 서너 병을 비우고도 연신 강씨 얘기”를 하는가 하면, “그때 내가 먼저 갔어야 되는데, 내가 먼저 갔어야” 하며 서럽게 울고, “은혜 갚을 일이 막연해진 게 원통”하다고 미안함을 나타내는 아버지의 모습 또한 그 본보기이다.

 

그와 같은 예는 친기즈 아이뜨마토프(Chingiz Aitmatov)의 소설 『백년보다 긴 하루』에서도 잘 볼 수 있다. 한 인간의 죽음을 통해 살아남은 자가 의리를 지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그렇지만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작품의 주인공인 예지게이는 철도 노동자로서 30년 이상 함께 일해 온 동료 까잔갑이 죽자 그의 유언을 들어주기 위해 그의 집으로부터 30㎞나 떨어진 아나-베이뜨 묘지에 묻으러 간다. 아나-베이뜨는 만꾸르뜨(mankurt)가 된 자식을 구하러 갔던 어머니 나이만-아나가 오히려 아들이 쏜 화살에 맞아 묻혔다는 슬픈 전설이 담긴 곳이다. 즉 츄안츄안족에 정복당한 선조들이 포로가 되어 잔인하게 묻힌 역사적인 땅인 것이다. 그런데 그곳은 정부의 비밀사업이 추진되고 있는 장소로 변해 있어 무덤을 쓸 수 없었다. 이에 예지게이는 그냥 되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함께 간 사람들을 설득해 아나-베이뜨 묘지 근처의 낭떠러지에 무덤을 쓴다. 그곳 역시 까잔갑의 고향땅이었던 것이다. 예지게이의 그와 같은 행동은 인간이 인간답게 의리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진폐증을 다룬 광산 노동시들의 또 다른 특징은 이야기시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야기 형식으로 광산 노동의 상황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시 형식은 카프의 제2차 방향전환 후 임화가 제시한 ‘단편서사시’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카프문학은 무지하고 안일한 대중들을 일깨워 역사의 주체가 되도록 하려는 것이었는데 실제로는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카프 내부에서는 대중들을 자각하기 위한 전략이 제기되었고, 임화의 단편서사시가 관심을 받았다. 임화는 <우리 오빠와 화로>와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기존의 서정시 양식으로는 현실을 제대로 담아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선동식 서술이 아니라 쉬운 어휘와 구체적인 사실, 그리고 독자들의 정서에 호소하는 형식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동안 광산 노동시의 산출이 많지 않았고 또 예술적 성취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다. 그렇지만 이야기시 형식의 차원으로 보면 재고하게 된다. 광산은 일반 창작자나 독자에게 특수한 장소이다. 즉 광산은 산간오지에 위치해 접근이 쉽지 않기 때문에 창작자나 독자들의 관심을 끄는데 불리하다. 따라서 광산 노동시의 창작 방향에는 “탄광 노동자와 탄광촌 주민들의 창작능력 부족, 문학에 몰두할 만큼의 경제적 문화적 여건의 불충분, 문학을 노동운동의 일환으로 실천하지 못한 탄광 노동운동권의 무자각 등도 함께 지적할 수 있”지만, 광산이라는 장소의 특수성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야기시가 필요한 것이다. 광산 노동의 특수한 상황을 특수한 감정이나 이미지로 그려서는 보편성을 획득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기존의 민중시가 추구했던 이야기시 형식이 유용한 것이다. 이미지나 감각을 추구하기보다 삶의 실제를 이야기시 형식으로 전달하는 것이 작품의 난해성을 극복하는 데에는 물론 구체성을 갖는데 유리하다. “장성 규폐요양소에는 나의 종질 녀석이 있다/도계탄광에서 얻은 병으로 삼 년째 있는데/사촌 형수는 미망인으로 요양비 받아/별 내색 없이 내가 찾아가면 반긴다”(정일남, 「요양소」)와 같은 모습이 좋은 예이다.

 

그렇다면 이야기시는 어떻게 그려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상황이나 대상을 정확하게 그려야 한다. 실제든 상상이든, 외면적이든 내면적이든,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미적 성취를 획득하는 길이다. “보기 흉한 동물이나 시체를 그린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들을 보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정확하게 그렸을 때 즐거움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 한 예로 뭉크(Edvard Munch)의 그림 「절규」를 들 수 있다. 그림에 등장한 인물은 양손으로 귀를 막고 아주 놀란 표정으로 눈을 치켜뜨고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어 해골 같기도 하고 태아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 인물을 한번 보게 되면 다시 보게 되고, 종국에는 미적인 즐거움까지 갖는다. 그 이유는 인간의 내면을 사로잡고 있는 불안과 공포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상을 정확하게 그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  그것은 상황을 관찰하는 차원을 넘어 간파하는 세계인식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깊게 인식하고 그 본질을 반영해내야 하는 것이다. 반영이란 거울이나 물동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수동적으로 바라보는 차원을 넘는다. 거울이나 물동이는 정태적인 대상이기 때문에 소극적으로 바라볼 수 있지만, 인간의 삶이 영위되는 사회는 부단히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적극적인 성찰이 요구된다. 자신이 사회 속에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 어떠한 존재 가치를 지니는지 등을 깊게 인식해야 되는 것이다.  

 

<제1회 태백문학제>, 2007년 10월 맹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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