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의 시간
아무 거리낌 없이 인생은 시작됐다
어린 나뭇가지들이
계절과 계절 사이에서 죽어갈 때
나는 양미간을 찌푸려
그 가냘픈 육신들을 이마 위에 옮겨 심었다
시간의 무덤에 꽃과 향과 초를 바치는
번제(燔祭)의 밤마다
나는 백 일치의 기억을 불태우곤 했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과 상관없이
늙어갔지만 늙어간다는 것과 상관없이
죽기는 싫었다
모든 방황은 무익했으며
모든 여행은 무가치했다
파도의 음계는 어느 바다인들 다르지 않았고
구름의 울음은 어느 그림자도 흔들지 못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기어이 머물 수 없음이여
또한 결코 사라질 수 없음이여
오래전 길 위에서 만난 어느 현자는 말했다
인도네시아의 일만 사천 개 섬들은
모두들 하나씩 화산구를 지니고 있다네
그대는 멸망으로 나아가는 그대만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가
오늘 나는 오래된 현자의 말을 떠올렸지만
하얀 얼굴로 밥을 떠먹는 너를 바라보며
강퍅한 결심 하나를 몰래 거두어야 했다
너는 내 옆에서 아이처럼 잠들었다
잠든 너를 바라보며
나는 지금 인간의 침묵에서
벌레의 침묵 쪽으로 조금씩 나아간다
멸망에 관한 한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미래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20140317-20160819
탄생과 죽음의 공존. 지구라는 플래닛planet과 태양이라는 항성恒星의 공전. 아직도 천동설적 발언들이 난무하는 세기말을 지나고 있지만, 지구는 멸망을 향하는 것이 뻔하다. 자신의 빛을 반사하는 지구와 별과 모든 은하계들을, 중력으로 당기고 있는 저 태양. 태양도 곧 폭발할 것이다. 지구와의 일정한 거리를 무시한 태양은 지구를 불태우고 자멸할 것이다.
8월 16일 말복이 지나자, 천지불인을 증명하듯 폭염이 가차없이 꺾였다. 절기가 무섭다, 수군대는 사람들.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구의 모서리가 태양과 가까워졌다 다시 태양을 등지고 그림자에 숨었다, 반복할 뿐이다. 햇살도 햇볕도 그저 동일한 태양.
시인과 의사의 차이점을 발견한다. 의사들은 죽을 수도 있어요 란 말을 협박조로 하고, 시인들은 속삭임조로 한다. 결론은 같지만, 시인들의 태도는 아직도 인간적이다. 비록 자신은 벌레의 침묵으로 꿈틀거리더라도, 잠든 이의 곁에서 흘리는 눈물은 얼마나 따스한가, 단도직입적으로, 저 시인의 특장점은 저런 부분이 아닐까 다시 생각한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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