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주 시집『기담』비판ㅡ모국어의 운명에 대한 걱정 / 이승하
우리 민족의 모국어인 한글이 시방 바람 앞의 촛불 신세다. 복거일 씨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영어 상용화를 주장하고 있고, 그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고 있다. 최근에 모 회사에서 인턴사원 2명을 뽑았다. 채용 공고에 ‘영어회화 및 작문 능통자, 제2외국어 가능자 우대’라고 썼는데 600명이 몰려왔다. 지원자 대부분이 영어 토익과 토플 성적이 만점에 가까웠고, 중국어나 일본어 실력이 상당 수준에 이르러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이들의 국어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모 공사(公社)에서도 이 정도의 실력을 갖춘 신입사원을 뽑았는데 우리말은 짧은 문장 하나도 제대로 쓸 수 있는 실력이 아니어서 홍보실이나 출판부에 쓸 수 있는 자원이 없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유학을 못 가는 대학생들에게 어학연수가 필수코스가 되었고(환율 때문에 좀 줄어들었다고 한다), 영어 몰입교육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요즈음, 젊은이들의 외국어 실력은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혹자는 우리나라가 지금보다 영어교육을 더 강화하여 필리핀이나 인도처럼 국민들이 영어로 대화할 정도가 되어야 노벨상도 탈 수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는 한글과 영어를 공통 상용어로 채택해야만 국가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세계화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우리밖에 안 쓰는 한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학교 교육에서 조선어 교육이 폐지되었던 1938년 4월 이래 한글은 지금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해마다 외국으로 유학 가는 학생의 수가 엄청나다. 그들에게 과연 한글이 모국어가 될 수 있을까? 한국에 와서 직장을 구하거나 한국으로 시집오는 외국인의 수가 급증하고 있는 것도 영어 상용화를 부추기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때, 한글로 시를 쓰는 이 땅의 시인들은 모국어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최근에 어느 재미 교포 시인이 필자에게 원고 뭉치 하나를 보내 왔다. 고국에서 시집을 내고 싶다면서 안면이 있는 내게 부탁을 해온 것이었는데, 한 편 한 편 읽어보다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미국으로 이민 간 지 26년이 된 이분의 시 속에 낯선 우리말이 상당수 나와 국어대사전을 옆에 놓고 일일이 찾아보며 뜻 확인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분 중 우리말 어휘력이 뛰어난 분이라고 한들 반수 정도나 그 뜻을 알지.
느침:끈적끈적하고 길게 흐르는 침.
똘기:채 익지 않은 과실.
수통하다:부끄럽고 분하다.
궤란쩍다:행동이 건방지거나 주제넘다.
사발허통:주위가 막힌 곳이 없이 휑하게 터져 매우 허전함.
언죽번죽: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고 비위가 좋아 뻔뻔한 모양.
어리마리:잠이 든 둥 만 둥한 모양.
들떼리다:남의 감정을 건드려 덧나게 하다.
주니:① 몹시 지루함을 느끼는 싫증. ② 두렵거나 확고한 자신이 없어서 내키지
아니 하는 마음.
눈모시:잿물에 담갔다가 솥에 쪄 내어 빛깔이 하얀 모시. 백저(白苧).
밑절미:사물의 기초가 되는, 본디부터 있던 부분.
츠렁바위:험하게 겹쌓인 큰 바위.
짓둥이:몸을 놀리는 모양새를 낮잡는 뜻으로 이르는 말.
겨끔내기:어떤 일을 번갈아 하는 상태.
더뻑:앞뒤를 헤아리지 않고 마구 행동하는 모양.
도사리:자라는 도중에 떨어진 과실. 낙과.
물한년하다:햇수에 제한이 없다. 영원하다.
던적스럽다:아주 치사하고 더러운 데가 있다.
답치기:질서 없이 함부로 덤벼드는 짓. 또는, 생각 없이 덮어놓고 하는 짓.
몽동발이:딸려 붙었던 것이 다 떨어지고 몸뚱이만 남아 있는 물건.
잦추다:잰 동작으로 잇달아 재촉하다.
앤생이:잔약한 사람이나 보잘것없는 물건.
더그매:지붕과 천장 사이의 공간.
이분이 쓰는 우리말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어릴 때부터 예사롭게 써서 자연스럽게 입말이 된 우리말과 국어대사전을 옆에 두고 살면서 의도적으로 시어로 골라서 쓴 우리말 두 종류가 있겠는데 위의 23개 우리말 중 20개 정도는 거의 사어가 된 것이 아닌지. 시집 원고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나는 이분이 미국에 가서 시를 쓰면서(젊어서는 먹고사는 일에 정신이 없어 시를 쓰지 못했다) 모국어를 살려서 시를 쓰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시집 해설을 써드리기로 했음은 물론이다.
오늘날 이 땅의 시인 가운데 우리말 되살려 쓰기에 신경을 쓰면서 작업하고 있는 시인이 몇 명이나 될까. 나부터 이 점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시를 쓰고 있다. 한국 시단의 젊은 영웅 김경주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이런 문장이 있다.
나의 고대에선 목마름으로 육체의 가문은 한가롭지
(……)
나는 지금 단 한 번도 내가 찾아가지 않은 오지,
에서 환풍기가 돌아간다
―「환풍기」부분
이 시의 2개 문장은 명백히 비문(非文)이다. 주어와 술어의 어순 배치가 잘못되어 있다. 이런 식의 비문과 오문은 시집『기담』에 차고 넘친다. 앞뒤 뜻이 통하지 않는, 구문이 성립되지 않는, 한글 문법을 완전히 파괴해버린 문장 앞에서 당혹감을 느끼는 내가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일까? ‘애매성’을 현대시의 특징이라고 하면서 일곱 가지의 유형을 제시한 윌리엄 엠프슨이 영역된 김경주의 시를 하늘나라에서 읽는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애매성에도 정도가 있다면서 혀를 찰 것이다. 김경주의 문법 파괴 양상을 좀 더 살펴보자.
죽은 다음에야 풍선을 비울 수 있는 육체,
그건 내 나비의 실내에 부검이 못 들어오는 일
나는 배다른 구름의 일
―「풍선의 장례」제7연
낱말의 뜻을 왜곡해서 쓴 예로 든 것이다. 육체와 부검(剖檢? 負劍?)과 일과 내가 동급으로 취급되어 뜻 파악을 어렵게 하고 있다. “내 나비의 실내에 부검이 못 들어오는 일”이나 “나는 배다른 구름의 일”은 의미 전달은 차치하고 문법적으로도 옳지 않다. 김경주는 1976년생 시인으로서 차세대 선두주자로 주목받고 있는데 우리말 문법을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것일까.
겨울에 한 줄로 내려온 거미의 그림자를 밟아본 적이 없다 그것은 내가 아는 가장 고독한 문, 희귀하지만 색이 선명한 거미일수록 허기가 길다 허공의 계안에서 유일하게 풀색의 목젖으로 버티는 거미의 혈통은 인간이 완전히 사라진 수준의 음악을 닮았다 깃털을 달고 있는 산딸기처럼 그대는 결국 한밤중에 발견한 내 눈동자 안에서 사멸할 정적, 그대가 그 기타로 심해어처럼 뒤척이며 서러운 목구멍을 빚어갈 때 나는 아무도 모르는 목젖을 가졌다 내가 지나간 적이 있는 목젖으로 그대는 노래를 부른다
―「죽은 나무의 구멍 속에도 저녁은 찾아온다」종반부
한 개 문장 속에 ‘~의’로 연결되는 것이 네 개나 됨으로써 어색하기 이를 데 없다. ‘~의(の) 무엇’은 일본인들이 즐겨 쓰는 말투이고, 그래서 일제 강점기에 교육을 받은 이원수가 ‘내가 살던 고향은’이라고 썼어야 할 것을 ‘나의 살던 고향은’이라고 잘못 썼던 것이다. 다른 나라의 언어로 이 문장을 번역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허공의 계안”은 도대체 뭔가? (鷄眼? 繫岸?) 그 다음 문장은 27개의 어절로 되어 있으니 만큼 상당히 긴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비문이다. 그 다음 짧은 문장 “내가 지나간 적이 있는 목젖으로 그대는 노래를 부른다” 또한 비문이다.
백 년 된 여관에선 타인이 놓고 간 잠에 예의를 먼저 갖추어야 한다 양배추인형을 안고 돌아다니던 잠도 누웠다가 갔고 인형들이 들것에 실려 간 잠도 있었다 잠의 내력에 대해서 말하자면 당신은 어느 날 잠 속에서 앞치마를 입은 인형의 등에 업힌 채 따라가서 보았던 언어가 가장 추웠던 꽃을 따 올 수도 있다
―「구름이 백 년 전을 지나갔던 것일까?」제1연
문장은 그런대로 맞지만 언어라는 것이 사회적 규약의 산물임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쓰고 있다. 아니, “인형들이 들것에 실려 간 잠도 있었다”나 “당신은 어느 날 잠 속에서 앞치마를 입은 인형의 등에 업힌 채 따라가서 보았던 언어가 가장 추웠던 꽃을 따 올 수도 있다”는 문법적으로도 맞지 않다. 김경주 식 시 쓰기라면 ‘나는 하늘을 포켓에 넣고 가다가 심심하여 사람을 백만 명 총으로 쏘아 죽이고 수채에 봄꽃들을 안장하였다. 그랬더니 하늘을 날던 새들이 재미있다고 폭소를 터뜨리는 것이었다.’라고 써도 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시에 쓰는 언어는 의사소통을 위한 일상적 언어의 영역을 넘어서려고 하고, 그래야 시어로서의 매력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낱낱의 시어들이 사전적 의미를 무시하면서 수집되고 배열된다면 국어사전이 있을 필요가 없다. 또 하나의 문제는 한 권의 시집 속에 이런 식의 비문이 너무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필자가 국어학자가 아니어서 왜 비문인가를 일일이 밝힐 수는 없지만 주어와 목적어와 서술어가 뒤죽박죽 엉켜 있는 문장들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김경주 시인은 모 문예지의 ‘주목할 만한 2000년대 젊은 시인들’ 설문조사에서 52표를 얻어 1위가 되었는데 2위와는 표차가 무려 24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경쟁자가 보이지 않는, 우리 시단 최고의 젊은 영웅인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문체’에 자신감을 갖고 있는 듯한데, 문체도 문체지만 문장이 제대로 되어야 하지 않을까.
잠 속에 한 육체를 업고 지나가다가 백 년은 몸에 이륙할 것 같은 문체를 본 적이 있다 문체라니, 문육(文肉)이다!
육체를 구부려 꽃의 사인(死因)으로 죽고 싶은 적이 있다
―「구름이 백 년 전을 지나갔던 것일까?」마지막 2연
가운데 문장 “문체라니, 문육(文肉)이다!” 앞뒤에 있는 2개의 문장도 비문이다. 그래서 시집의 제목이 ‘기담’인가?
김경주 시인만 문법을 무시하고 낱말의 뜻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독일의 언어학자 요한 레오 바이스게르버는 모국어를 “한 민족의 공통의 문화재로서의 언어”라고 했다. 하지만 민족의 개념이 흐려지고 있는 것과 비례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모국어에 대한 애착도 흐려지고 있다. 글을 다루는 문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정확한 낱말 사용과 정확한 문법 적용이 오히려 구시대의 폐습인 양 받아들여지고 있으니 가슴이 아플 뿐이다. 언어 습득의 과정에서 영어에 투자하는 비용은 국방비에 육박할 것이다. 한글이 모국어인 대한민국 사회에서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더욱 우대받고 있는 이 시대에, 시인마저도 모국어를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하기는커녕 모국어를 훼손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미주문학』2008년 겨울호에 이런 시가 실려 있다. 미국 이민자인 박영숙 시인의 작품이다.
강산이 몇 번이나 변한 후
아늑한 고목나무 밑에서 비쩍 마른 모국어가
힘없는 가지를 쓸쓸하게 흔들 때면
가슴속으로 걸어갈 수 없는 두 개의 언어가
바람처럼 문 밖에서 서성이고
불꽃처럼 산화한
젊음의 어디쯤인가로부터
말려드는 회한
오~ 모국어여!
어머니의 젖줄을 타고 온 피의 모국어여!
핏줄 속에 흐르는 조국의 혼이여!
세월이 몇천 년이 흘러도
사는 곳이 달라도 미래를 하나로 묶어주는
영원히 변치 않을
내 조국 대한민국 모국어여!
―「어머니의 젖줄, 오~ 모국어여!」끝부분
시 자체야 소박하기 그지없다. ‘세련’이나 ‘참신성’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 시가 가슴을 뜨겁게 하는 이유가 있다. 수십 년 어려운 이민 생활 가운데서도 “어머니의 젖줄을 타고 온 피의 모국어”를 한시도 잊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를 쓰고 있다면서 시인은 시의 끝부분에 이르러 목청 높여 절규하고 있다. 또한 “빈 창자를 눈물겨운 발걸음에 매달고서/ 시베리아 벌판으로, 북간도로/ 멕시코 농장으로/ 하와이 사탕수수 밭으로 떠나 왔었다// 별이 희망으로 빛날 때면/ 태극기 펄럭이는 고국의 가슴속에 얼굴을 묻고/ 피 토하듯/ 어머니의 젖줄, 오~ 모국어를 노래했다”고 하면서, 나라를 떠나 갖은 고초를 다 겪은 우리 조상이 어떻게 모국어를 지켜왔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외국에 나가면 다 애국자가 된다고, 해외동포가 오히려 모국어에 대한 염염한 사랑을 토로하고 있다.
아래는 중국 연변작가협회 김현순 회원의 작품이다.
칼도마에 여름이 올랐다
계절이 식칼을 집어들었다
여름이 펄떡거렸다 잉어마냥
계절이 여름을 찔렀다
칼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새파란 피, 피……
히스테리마냥 킬킬 웃어대는
계절의 발밑에 깔린
여린 풀들……
뚝뚝 떨어지는 여름의 피를 먹고
파랗게 파랗게 계절이 웃었다
―「여름」(『숲문학』제9호, 2008) 전문
중국 국적을 가진 연변 조선족 시인의 작품인데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가 멋지게 어울린 가편이다. 거기서는 여름에 보양식으로 잉어를 잡아먹는 것인지, 잉어를 조리하는 과정에 녹음의 푸른색이 겹치면서 싱싱한 여름 이미지를 건져올리고 있다. 연변 땅에서 모국어로 쓴 이런 시에 우리 평단의 조명이 비쳐지지 않는 것이 아쉽다. 아래는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사범대학 어문학부 2학년에 다니던 강태수라는 시인의 운명을 바꾼 작품이다.
밭 갈던 아씨야!
이 가없는 들판에
땅거미 살며시 기여들어
모두를 거무숙 물들일 즈음
나는 차창에 목을 내밀고
네가 갈던 밭과
네가 뜨락또르에서 내려
기꺼이 걸어가던 모습
다시 한번 보구지여라.
내가 이렇게 차창가에 기대여
속 타는 그리움에 시달리는 줄
너는 아느냐? 모르느냐?
너는 아마 잠 이루지 못하고
비인 머리맡에 눈을 던지면서
말 못하는 베개나 못살게 구느냐?
너는 문을 열지 말어라
사랑하는 사람에겐
따로 문이 없다
―「밭 갈던 아씨에게」제1연
1933년, 신문 <선봉>에 「나의 가르노」를 발표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한 강태수는 1938년에 학내 <벽보신문>에 총 5연으로 된 이 시를 발표한다. <벽보신문>이란 정상적인 신문이 아니라 말 그대로 벽보신문인데, 종이와 인쇄시설이 부족한 당시 대학생이 문학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지면이었다. 이마저도 주필이 있어 게재 승인이 있어야 발표를 할 수 있었다. 이 시가 떠나온 원동(강제이주 전에 살던 곳)을 그리워하고 있고 “속 타는 그리움에 시달리는 줄 너는 아느냐?” 등의 내용이 반혁명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누군가 밀고함으로써 강태수는 체포되었다. 재판에 회부된 그는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에 맞물려 정당한 재판 절차도 거치지 못한 채 ‘당과 인민의 원수’로 몰려 북극 아르한겔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5년 동안 모범적인 수감생활로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우두므르트 삼림사업소로 이주, 거주지 제한 형태의 벌목공으로 일했다. 여기서 16년 동안 국가안전위원회의 감시를 받으며 사회와 격리된 생활을 하다가 1959년에 복권, 고향 크즐오르다로 돌아왔다. 21년 만의 귀향이었다. 강태수는 귀향 이후 이런 시를 썼다.
어린 전나무 저쪽
부끄러움 모르는
봇나무 밭 뒤에
새하얀 눈이 깔리여
흰빛 자랑에 반짝반짝
그러나 때로는
노을에 짐기여 볼그므레
구름에 드리워 가무스레
하지만
겨울의 추운 날
푸르무레한 눈만은
오직 내 눈에나 보이는 듯.
내 발밑에서
두터운 눈더미 속에서
쥐 본 고양인 양
어느덧 봄은 기여오면서
흰눈도 푸르게 군대요.
―「푸르무레한 눈」전문
이 시의 소재는 ‘잔설’이다. 아직은 여전히 추운 겨울날이지만 봇나무 밭 뒤의 잔설이 땅으로 전해지는 봄기운을 느끼고는 ‘푸르게 군다’. 이 시는 서정과 서경의 조화도 아름답지만 색깔을 묘사할 때 쓰는 우리나라 형용사의 다양한 울림을 아름답게 전해주고 있다. 수용소와 삼림사업소에 있는 21년 동안 강태수에게는 시를 쓰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고향에 돌아와서 쓴 이 한 편의 시는 평자로 하여금 그의 모국어에 대한 눈물겨운 사랑의 정신을 실감케 한다.
한국시인협회에서는 2007년에 방언시집『요 엄창 큰 비바리야 냉바리야』(서정시학)를, 2008년에 토박이말 시집『니 언제 시건들래?』(시로여는세상)를 펴낸 바 있다. 앞의 책은 오세영 시인이 회장으로 있을 때에, 뒤의 책은 오탁번 시인이 회장으로 있던 작년에 간행되었는데 머리말이 의미심장하다.
앞으로 100년 안에 대부분의 민족어들이 사라지고 영어, 중국어 등 대여섯 개의 세계어만이 살아남으리라는 비관적인 진단도 있습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언어는 민족의 영혼이자 정신입니다. 따라서 언어가 소멸되면 그 민족의 문화 역시 사라질 수밖에 없고 민족문화가 사라지면 민족 자체가 소멸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런데도 알게 모르게 우리의 일상에서는 외국어가 남용되고 여러 가지 물질적, 도구적 탐닉에 정신을 빼앗긴 사람들이 속절없이 우리의 국어를 팔아먹는 행태가 자심합니다. 이와 같은 현상이 지속되면 머지않아 우리의 국어 역시 세계어의 수준에서 폐기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따라서 언어의 주인이라고 할 오늘의 한국 시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국어의 중요성에 대해 성찰하고 그 보존과 발전에 심혈을 쏟지 않으면 아니 될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하겠습니다.(오세영)
무분별한 외래어 사용으로 상처난 우리 모국어를 되살리고 우리가 태어나서 자란 이 땅의 흙냄새가 마냥 묻어나는 토박이말로 시를 쓰는 것은 시인이 짊어진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모국어를 지키는 불침번이 되고 파수병이 될 때 시인의 품격과 위의가 한결 살아나는 것임을 생각할 때, 우리 겨레의 꿈과 눈물과 한숨이 배어 있는 토막이 우리말로 시를 쓰는 것이야말로 시인만이 할 수 있는 시대참여적인 임무라고 생각한다. 분단된 조국이라는 기막힌 역사가 시인의 무변무애한 하늘을 가리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 비춰볼 때 언젠가는 다가올 통일시대를 대비하는 시인의 시정신은 우리의 모국어를 보듬어 품는 일로 갈무리되어야 할 것이다.(오탁번)
두 원로시인의 말씀이 눈물겨운 애소로 느껴짐은 웬일일까? 그만큼 우리가 우리말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고 시를 쓰고 있기 때문이리라. 방언을 시어로 가져와서 쓰고 토박이말을 되살려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인이 우리 문법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낱말의 뜻을 제멋대로 바꿔서 쓰는 모국어 학대 행위는 더 이상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문학나무』 2009년 여름호 계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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