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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선은 지킵시다

난 어릴 적에 정말 많이도 싸우고 다녔던 것 같다.잘 참지 못하는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조금 핑계를 대자면 그 또래 남자아이들은 대부분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불의에 맞서서 이 한 몸 내던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주먹서열을 가리거나 별것 아닌 경쟁의식을 동반한 패싸움들이었던 것 같다.그런데 이런 유치한 싸움들 속에는 암묵적인 룰이 존재했다.안경은 벗고 싸우기, 주먹으로는 때리되 발로는 차지 않기, 쓰러져 있으면 때리지 않기, 패싸움이라도 두 명이 한 명은 때리지 않기, 뒤에서는 공격하지 않기 코피가 나면 끝내기 뭐 이런 것들이다. 특별히 약속한 적도 없고 교칙으로 정해진 것도 아니었지만 이런 룰을 지켰던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던 것 같다.내가 그렇게 하면 나도 그렇게 당할 수 있다는 단순..

평론과 칼럼 2025.03.21

Aphorism

행동이 없으면 사상은 숙성하여 진리가 되지 못한다. -『자연론』 에머슨 대담한 어떤 일을 수행하는 자는 자신이 이미 그것을 완수했다고 생각해야 하고, 마치 과거처럼 절대로 바꿔놓을 수 없는 미래를 자신에게 강요해야 한다. -『픽션들』 보르헤스 네가 아는 것을 모두 말하지 말라.  -『백살의 노파』 도스토예프스키 세상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더군요. 하나는 말없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라는 거고, 또 하나는 말없는 사람은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는 거죠. 나는 후자가 옳다고 생각해요. -『에덴의 동쪽』 존 스테인벡 (1962년 노벨문학상) 건강한 팔을 잘라 낼 때의 아픔은 병든 팔을 잘라 낼 때의 고통보다 더욱 깊은 법이다. - 발자크 사람을 분류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어리석은 자와 영리한 자로 나누는 게 아니..

좋은 문장 2025.03.05

김인숙,「벌거벗은 임금님과 눈 먼 자들」

명색이 글을 쓰는 사람인데, 무슨 글자로 이 글을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다. 할 수 있는 모든 말, 토해낼 수 있는 모든 말들이 이미 신문 지면, 그리고 인터넷을 도배한 상태다. 참담하다, 부끄럽다, 비참하다, 끔찍하다, 슬프다, 암담하다, 기막히다…. 이런 점잖은 말들은 글로 쓰였을 뿐이고, 더 진심에 찬 것은 알고 있는 모든 험한 말들을 합친 욕설일 것이다. 하야라는 말은 너무 점잖고, 탄핵이라는 말도 너무 구태의연해서, 이런 상황에서 정말 어울리는 말은 무엇일까 고민하게 된다. 말로도 되지 않고, 글로도 되지 않으니, 남는 게 욕뿐이라는 게 글쓰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이겠나. 그러니 이런 날은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대신 거리에 나가 촛불을 들 일이다.  며칠 동안 뉴스를 보느라 읽고 있던 ..

평론과 칼럼 2025.02.14

한강<작별하지 않는다>

33쪽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꿔나가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생각해내기 어려운 선택들을 척척 저지르고는 최선을 다해 그 결과를 책임지는 이들. 그래서 나중에는 어떤 행로를 밟아간다 해도 더이상 주변에서 놀라게 되지 않는 사람들.   105쪽접시에 김치를 덜어 식탁에 올려놓은 인선의 얼굴이 서울에서 보다 평온해져 있다고 나는 그때 생각했다. 인내와 체념, 슬픔과 불완전한 화해, 강인함과 쓸쓸함은 때로 비슷해 보인다. 어떤 사람의 얼굴과 몸짓에서 그 감정들을 구별하는 건 어렵다고, 어쩌면 당사자도 그것들을 정확히 분리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291쪽하지만 확신할 수 있을까? 그런 지옥에서 살아난 뒤에도 우리가 상상하는 선택을 하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      ​

좋은 문장 2025.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