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국의 『유정의 사랑』을 읽고 / 정혁
작가 김유정의 짧고 어두웠던 삶을 관통한 병적 열정의, 그 섬광 같은 예술혼의 소설적 진단. 자기 구제의 길을 찾아 나선 오늘을 사는 젊은 남녀의 방황과 자연 친화적 사랑의 열정. 작가의 말에서 보듯 이 두 개의 모티브를 얼개삼아 그려낸 것이 <유정의 사랑>이다.
작가 전상국에 의하면 ‘전혀 별개일 수 있는 이 두 개의 작품 의도를 한 얼개 속에 뭉뚱그려 엮어낸 것으로 작가 평전(김유정 평전 - 필자 주)이 갖는 서술의 단조로움과 문학성의 결여, 작가론의 도식성, 사랑 소설의 한계인 깊이의 옅음과 통속성 등으로부터 한 발짝이라도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심이 이러한 낯선 이중주를 연주하게 된 진짜 이유’ 에서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저자 전상국은 총 10장에 이르는 서사 중 1장은 남자 주인공의 시각을 통해 김유정의 짧고도 음울했던, 그리고 당대의 명창 기생 박록주에 대한 일방적인 사랑을 되살려 내는 동시에 2장에서는 김유정의 고향 실레마을을 병풍처럼 감싸 안고 있는 금병산을 오르면서 만나게 된 여자 주인공을 통해, 그들의 사랑이 덧칠해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따라서 각 장은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시선이 교차되면서 직조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필자의 입장에서는 그런 과정을 무시하면서 중요한 부분만 발췌 요약하거나 필자의 생각을 가미하여 서술코자 한다. 유정(본명 백진우)은 어느 여름날 금병산에 오른다. 금병산은 실레마을을 감싸고 있는 병풍 같은 산이다.
나의 故鄕은 저 江原道 산골이다. 저 春川邑에서 한 二十里 假量 山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닷는 조고마한 마을이다. 앞뒤 左右에 굵찍굵찍한
山들이 빽 둘러섯고 그 속에 묻친 안윽한 마을이다. 그 山에 묻친 모양이 마치
음푹한 떡시루 같다 하야 同名을 실레라 부른다.
- 김유정《五月의 산골작이》 (〈朝光〉1036. 5)
김유정이 일찍이 그의 수필에서 자기 고향 실레마을을 설명하면서 부연한 산이 금병산이다. - 들판의 딸 하리. 여름 산행에서 그여자를 만났다. 금병산 중턱 조금 후미진 산등성이의 솔밭 속이었다. - 7쪽 이렇게 첫 구절로 시작되는 이 소설에서 유정은 그 여인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꺼릴 것 없이 자유스럽고 야성미를 가진 그네에게 <들판의 딸>과 같은 느낌을 강렬하게 받는다.
남자 주인공 유정은 어떤 사람인가?
38세의 대학 시간강사. 중학교 교장의 외아들로 유복하게 자라난 그는 아버지가 재직하던 학교의 여선생과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둔 가장이기도하다. 대학에서는 법과를 다니다가 지리학과로 전과하여 졸업을 한 후 대기업에 스카우트 되어 안정된 직장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 직장도 그만두고 다시 대학원에 들어가 국어학을 전공,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대학에서는 시간강사로 언어학을 강의하고 있다. 그러나 삶에 대한 회의는 그에게 무력증과 의욕상실증에 빠지게 한다. 따라서 대학전임의 조건이 되는 논문작성에 대한 열정이 식어지고 오히려 같은 지방의 소설가였던 <김유정>에 대한 연보를 작성하며 지내고 있는 중이다.
국어선생으로 김유정의 연보를 작성하는 일을 도와주고 있는 사촌 동생은 결정적인 순간에 학위논문작성을 포기하고 변덕을 부리는 그를 향하여 마치 짧은 생애를 불우하게 마친 천재작가 김유정의 영혼이 덧 씌어 있는듯하다고 책망을 한다.
유정에게는 두 살 아래의 아내가 있다. 단순하고 밝은 성격을 가진 국어선생이다. 그러나 그는 아내의 그 어느 곳에도 자신이 지고 있는 영혼의 짐을 부려 잠시도 쉴 곳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내에 대한 연민과 죄스러움은 있으나 사랑은 어느새 메마르고 시들었다. 그의 아내 역시 무기력하고 감정이 메마른 상황에서는 차라리 <이혼>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을 할 정도에 이르렀던 것이 그의 근황이다.
그 이유의 근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유정이 나이 사십을 바라보면서 삶에 대한 열정이 식어진 것은 하나의 열등감에서였다. 국민학교 때에 있었던 간질과 같은 발작증세… 자라면서 이 증상은 사라졌지만 그것은 그에게 하나의 무의식으로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게도 사랑에 대한 감정이 솟구치던 때가 있었다. 중학교 사춘기 때, 영어선생의 누이동생에게 사랑한다고 연애편지를 썼던 일로 인해 교무실에서 선생으로부터 - 야 이 새끼야 내 눈 똑바로 쳐다봐! … 사랑 좋아하네, 병신육갑 떨지마! -라는 욕설과 함께 뺨을 얻어맞았다. 그 순간 유정은 발작의 충동을 느꼈던 경험을 잊지 않고 있다.
또한 아버지의 전처가 일찍 죽은 후 재취한 어머니와의 사이에 출생한 자신에 대한 콤플렉스가 겹쳐있었다고 하겠다. 한 때, 비밀스러운 간질 발작의 경험에 대한 기억은 김유정이 휘문고보에 다닐 때에 말이 어눌하여 ‘눌언교정소’에 다녔다는 사실, 그리고 김유정의 출생 역시 어쩌면 서자였기 때문에 그의 성격과 삶 자체도 김유정 자신에게 은연 중 영향이 미쳤을 것이라는 가정은 백진우(유정)의 내면과 오버랩 된다.
김유정(1908. 1. 11~1937. 3. 29)은 천석꾼 부자 김춘식의 8남매 중 7번 째로 태어났다. 아들로서는 둘째였으나 나이 차가 20 여년이나 많은 형의 방탕으로 가산이 기울고 불화했던 가정의 형편, 그리고 말까지 어눌하여 발음교정소까지 다녀야 했던 불우가 있다. 또한 창을 잘하는 기생 박록주(朴綠珠, 1905. 2. 28~1979. 5. 26)에게 반하여 그를 연모를 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한 회한이 있다. 문단에 혜성처럼 나타나 농촌 현실을 풍자와 해학으로 눙쳐놓음으로써 필명을 날릴 무렵, 기어이 치질과 늑막염과 결핵으로 인해 스물아홉의 나이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김유정의 생애는 한마디로 천재적 작가의 그늘이기도 하다.
유정은 그날 금병산에서 우연히 마주친, 마치 들새와 같은 느낌을 주는 - 들판의 하리와 몇 번의 갈림과 만남을 거듭하면서 실레마을로 내려오는 동안 그녀를 향한 남모를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저자 전상국은 이 두 남녀의 이 산행 중간 중간에 작가 김유정과 그의 작품 <동백꽃>, <만무방>, <봄·봄>, 그리고 몇 개의 수필과 함께 농촌계몽을 위해 세웠다는 <금병의숙(金甁義塾)>등에 대한 이야기를 삽입함으로써 신비감마저 도는 여자를 향해 스며든 유정(백진우)의 감정 기복을 김유정의 작품과 연대기적 삶의 궤적에 맞춰 그리고자 했다.
유정은 그날 집으로 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는 <하리>를 향하여 다음주말 검봉에서 만나자고 허겁지겁 소리친다.
<하리>는 2장 첫머리에 금병산에서 만났던 유정에 대한 첫인상을 이렇게 썼다.
- 흘긋, 그를 본 순간 내 머리에 스친 생각은 ‘떠도는 영혼’ 이었다. 어쩌면 방랑자 혹은 보헤미안이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는 그런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좀더 구체적으로 그것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그의 얼굴에 덮씌워져 있다는 느낌 같은 것이었다. - 76쪽
그러면서 그 남자의 얼굴에 그늘 같은 것이 서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밝고 투명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이렇듯 나쁘지 않은 그에 대한 기억은 마침내 그녀로 하여금 검봉 산행을 결심하게 하고 유정과의 두 번째 산행이 시작된다.
여지 주인공 하리는 어떤 사람인가?
하리(- 문선생으로 알려진 하리의 본명이 어느 부분에서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어 처음부터 몇 차례 다시 찾아보았으나 끝내 발견하지 못함 - 필자 주)는 반듯하고 엄격하게 살아온 아버지와 대범한 어머니, 그리고 두 명의 언니와 남동생을 가진 서른 살 된 입시학원의 수학선생이다.
얼마 전까지 중학교 수학선생으로 재직하다가 트러블이 있어 사표를 던지고 입시학원에서 수학을 강의하면서, 가끔씩 산악회를 따라 등산을 하는 생기발랄한 여자이다. 활기차고 당당함, 그러면서도 주장이 강해 아버지로부터 결혼을 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으나 아직까지 미루고 있는 여자. 유정은 첫 만남에서부터 하리에게 소위 필이 꽂인 것이다.
서사의 전개는 하리가 성장해온 과정에 얹혀서 김유정이 연모하였던 명창 박록주에 대한 이야기 - 여기서는 한국일보와 잡지 『뿌리 깊은 나무』등에 연재되었던 박록주의 자전적 회고록을 빌려서 술하고 있다.
그녀는 유정과의 첫 만남에서 김유정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터였지마는, 그녀가 읽은 김유정의 작품은 고등학교 때 읽어 본 <동백꽃>과 <봄봄>이 고작이나 그 줄거리마저 희미하다. 그래서 유정과의 산행에서 돌아 온 그 주간에 김유정 작품집을 구해 30여 편에 이르는 단편을 설렵하면서 나름대로의 소감을 적어 놓을 줄도 아는 은연중의 열심을 보인다.
따라서 2장에서는 하리가 읽고 느낀 소감을 빌려 김유정의 많은 단편들이 소개되는 한편, 김유정의 첫사랑이었던, 박록주를 등장시킴으로서, 저자 전상국이 작가의 말에서 언급하였듯이 김유정과 박록주, 유정과 하리의 사랑에 대한 이중주가 시작된다.
유정이 불현듯 급하게 제안했던 이 두 번째 검봉 산행의 이야기가 바로 3장에서 이어진다. 여기에서는 특히 유정의 설명을 통해 춘천 부근의 많은 산들이 열거되고, 하리를 통해서는 많은 야생화들에 대한 설명이 가득하여 주변 산들과 들꽃에 대한 이해를 갖게 한다. 이런 부분에서 독자는 저자 전상국 작가가 이 방면에 상당한 지식과 안목이 어우러져 있음을 보게 된다.
유정과 하리
드디어 그들은 검봉 산행에서 애칭을 하나씩 갖게 된다. 이 때, 김유정의 영혼에 덮씌운 듯한 백진우에게 문 선생이 붙여 준 애칭이 <유정>이다. 그리고 ‘마타리’라는 꽃을 발견한 문 선생이 이 꽃을 좋아한다면서 마타리 꽃을 보면 일차대전 때 독일의 여간첩으로 유명한 ‘마타하리’가 연상된다는 설명을 하자 유정이 곧바로 그녀에게 지어준 애칭이 바로 <하리>이다. 하리는 야생화에 대한 지식이 상당하다. 꽃이나 자연을 사랑한다기보다는 자연을 자연 그대로 봄으로써 자연을 이해하게 되고 꽃들과도 교감하게 된다고 하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기 주변에 있는 인형이나 필기구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기를 좋아 했다. 마찬가지로 꽃들에게도 이름을 붙여 줌으로써 그 꽃들과의 교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 제가 꽃 이름을 기억하는 건 그 꽃에다 의미를 주겠다는 뜻이지요. 내가 의미를 주기 때문에 그 꽃이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거니까요. 내가 꽃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는 건 그 꽃과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걸 의미하지요. - 172쪽
- 내게서 이름을 불러 주는 순간부터 그것들은 존재했다. 내가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 216쪽
그런데 하리의 꽃들에 대한 인식의 과정, 인지의 과정이 마치 일찍이 김춘수의 시, <꽃>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여 유별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중에서
이렇듯 3장 이후의 각 장에서 엮어지는 유정과 하리의 사랑 이야기는 오봉산, 치악산 등의 산행을 통하여 밀도를 더해 가면서 김유정과 박록주의 관계설정을 지속해 나간다. 투병으로 지쳐가면서도 작품 활동에 열정을 기울이는 김유정의 삶의 궤적이 더욱 치열하다. 다만 김유정의 사랑이 일방적인 반면 박록주가 언제나 거리를 두었던 것과 같이 유정 백진우의 하리에 대한 연모는 간절하였으나 하리 역시 일정한 긴장과 간격을 가진 채 만남을 유지한다.
저자 전상국은 김유정의 연보를 작성하기 위해 김유정을 기억 하고 있는 실레 마을 사람들을 찾아 채록한 자료들이나 그의 인척(조카)들을 찾아 면담하여 얻은 자료들, 그리고 그의 작품 및 그와 관련된 당시의 글들을 소개를 하면서 김유정 평전을 서사로 이끌어 나가고 있는 한편 곳곳마다 꽃이나 산에 대한 설명을 곁들이면서 유정과 하리와의 관계를 이끌어 나간다.
유정과 하리가 만나는 주 무대는 주로 춘천 일원의 산이었지마는 때로는 팔봉산, 치악산, 월정사, 주문진, 동구릉, 신륵사, 영릉, 용문사 등으로 그 경계를 넓혀 간다.
하리에 대한 유정의 열정은 식을 줄 모른다. 서울에 살고 있는 하리에게 수시로 전화를 하고 수십통의 편지를 붙이기도 한다. 그만큼 사랑의 열병이 유정의 영혼을 잠식한다. 마치 김유정이 사모하는 연상의 여인 박록주에게 혈서를 써 보내거나, 죽기 전 연정을 품게 된 제 2의 여인 박봉자 (30년대의 구인회 멤버였던 박용철 시인의 여동생)에게 붙인 편지와 같다고 할 것이다.
김유정의 생애를 보면 하나의 아이러니가 있다.
박록주에게 실연당한 아픔을 않은 채 실레마을로 귀향한 후 불과 2년 사이에 쓴 17여 편을 포함하여 가난과 질병이라는 고통과 싸우면서도 총 31편에 이르는 주옥같은 단편을 써내려 갔던 김유정은 생의 마지막에서 알게 된 박봉자를 연모하게 되면서 역시 똑 같이 31통의 편지를 쓴다(30통은 보냈으나 1통은 안 붙였다고 함). 그러고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우연한 일치이다.
유정이 하리를 향한 사랑을 불태웠으나 하리는 유정을 향한 사랑의 감정을 용케도 절제하며 거리를 둔다. 그것을 그녀 자신은 살아오면서 가지게 되었던 염인증(厭人症)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스스로 자유롭고자 하나 어딘지 모르게 구속된 상태, 억압된 상태가 그녀로 하여금 염인증을 갖게 한다고도 생각한다.
그러한 염인증을 유정 자신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는 하리를 만나면 만날수록 그녀의 발랄함과 거침없음과, 때로는 차갑고 절제할 줄 아는 마력에 이끌린다. 하리는 마치 산의 정령, 자연의 정령처럼 다가오는 것을 어찌하지 못한다. 반면, 하리 역시 만나면 만날수록 떠도는 영혼을 가진 유정의 사랑에 구속되어 가는 감정을 어쩌지 못한다.
그러는 동안의 한 시점, - 그해 12월이었을 산행에서 돌아오면서, 그들은 결국 하나가 된다. 몸과 영혼이 합일되는 밤이 있었다. 그날 밤 하리는 그녀가 타고 다니는 프라이드에 유정이 <이드>라는 이름을 붙였듯, 자유분방하고 거침없이 살면서도 어딘가 억압되었던 자아(이드)가 한꺼번에 분출하듯이 유정을 탐하고 탐하였다. 하리는 그 날의 일이 비록 후회가 없다한들 한 번의 실수, 한 번의 일탈로 치부하려고 애써 마음을 고쳐먹으면서, 이제는 유정과의 관계를 정리할 때라고 생각한다. 반면, 유정에게는 그날의 일이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 한번 난 길은 쉬 없어지지 않는다. - 396쪽
하리가 유정과의 거리 두기를 결심한 겨율, 유정은 서울의 근교의 사립대학에 전임강사로 임용이 되고 그 이듬해 초봄, 하리는 학원에 사표를 내고 홍천군 내촌면의 한 중학교 선생으로 임용된다. 그러나 숨는다고 해서 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택에서의 첫날밤, 하리는 꿈 속에서 유정을 만난다. 그 후 혼자서 산행도 하면서 맘을 추슬러 보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이쯤해서 다시 한 편의 시를 인용해 본다.
까닭없이 마음 외로울 때는
노오란 민들레 꽃 한 송이도
애처롭게 그리워지는 데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이 아득한 거리에
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오느니
사랑한다는 말 이 한 마디는
내 이 세상 온전히 떠난 뒤에 남을 것
잊어버린다 못 잊어 차라리 병이 되어도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민들레 꽃 / 조지훈
4월 말경... 하리는 금병산 자락, 유정과 함께 다녀갔던 <산국농장>에 들렀다가 농장의 언덕배기에서 바라본 만발한 복숭아밭은 바로 도원향(桃園鄕)이었다. 탄성을 지르며 무릉도원에 서 있는 듯한 환상에 젖는다. 그리고 꿈결 속에 이어지는 농악대소리, 노랫가락, 춤사위, 굿판의 굿소리 같은... 절간의 범종이나, 교회당의 종소리가 들린다. 무녀의 춤사위 속에 김유정의 작품 속에 나오는 온갖 인물들이 나온다. 김유정, 박록주, 박봉자가 나타난다. 한 바탕 치러진 금병도원(金甁桃園) 굿판의 신명이 하리의 의식을 관통하는 찰나였다.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 들어서자 전화가 왔다. 유정의 전화였다. 유정은 이틀이 모자란 백일 동안 하리를 찾아 헤맸다고 하면서 오는 일요일에 산에 가자고 채근한다.
그러고 이어지는 말
<뽀그락>
보끄락은 그들이 보고 싶다는 비밀의 언어.
얌전한 쾌락이며 희망의 말이다.
하리도 그만
<뽀그락>
- 사랑은 진행형일 때만 아름답다. - 617쪽
이상으로 <유정의 사랑>을 나름대로 정리하여 보았다. 우리 문학사의 한 정점을 이루고 있는 김유정. 그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으면서도 기울어진 가세로 인한 가난과 질병, 애증의 격랑을 헤지면서 짧은 질곡의 생을 보냈다. 그런 환경 탓인지 선병질(腺病質)적인 음울함, 천재적 비범 속에 깃든 고독, 한껏 자유롭고자 하나 비상하지 못하는 자학, 콤플렉스에 따른 염인증과 멜랑콜리를 보게 된다.
일찍이 요절한 김유정의 모습, 그의 떠도는 영혼을 현시점으로 재생하여 유정과 하리의 사랑으로 엮은 것이 이 소설의 주제라고 하겠다. 특히 서사 형식을 남자 주인공 유정과 여자 주인공 하리의 시점에서 엮어나가는 독특한 방법을 취하고 있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서사가 각 장을 번갈아 가며 전개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서사방법은 일본의 작가 에쿠니 가오리가 쓴 <반짝반짝 빛나는>이라는 소설에서도 볼 수 있다. 요즈음은 그런 서사 형태의 작품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찌되었던 독특하다.
개인적 의견(문제점)
이 작품은 김유정 평전을 연대기적 서술이 아닌 하나의 소설로 재현하고 있다. 그러나 김유정의 삶과 얽혀 있는 이야기들을 단순히 평면적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유정과 하리라는 현재적 인물들 등장시켜 복층으로 레일을 깔고,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넘나들며 사랑의 이중주, 아니 사랑의 사중주를 엮어 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독자의 한사람으로써 몇 가지 느낀 소감을 여기에 적어본다.
첫째, 단순한 사량의 서사가 아닌 평전이 가져야할 사실의 얼개를 허물지 않으려는 노력이 돋보임에도 불구하고 유정과 하리의 이야기의 전개가 산행과정과, 야생초들에 대한 설명에 지나치도록 치우쳐 있어 지루한 감마저 들게 한다는 점이다.
둘째, 유정은 김유정의 생애와 그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어서 연보작업을 하고 있으나 하리와의 대화에서 보면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음을 강조하는 겸양을 보이면서도, 실제 그의 김유정에 대한 설명 부분은 작품연구자 이상의 식견으로 접근하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어리둥절하게 한다는 점이다.
셋째, 하리 역시 김유정 작품에 대해서는 고등학교 시절에 겨우 두 편 정도 읽은 경험이 밖에 없다고 하면서, 그리고 자기의 어휘력의 부족함을 고백하고 있으면서도 유정과 만난 지 일주일 만에 김유정의 작품집을 읽고 이를 평하는 과정을 보면, 단순한 메모나 감상문의 정도를 지나쳐 전문 비평가적 안목으로 쓰고 있다는 점이다.
하리에 의하면 김유정의 작품은 물론 소설을 읽어본 경험이 거의 없다. 따라서 김유정은 물론 다른 작가들과 작품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리의 서술 장면은 단순한 작품 소개가 아닌, 김유정의 문학사적 위치를 시대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상당한 국어학이나 문학적 용어들과 어휘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더 더욱 그러하다고 할 것이다. - 116~7쪽
게다가 모더니즘에, 포스트에, 포스트모더니즘을 설명하는가 하면 이념소설이나 역사소설에 함몰된 시대가 지나고 따분해 질 때, 경박하여지다 못해 구토가 날 때에는 차라리 김유정 소설을 읽을 일이다! 라고 적어 놓는 장면에서는 너무도 엉뚱하다는 느낌이 든다. - 344~5쪽
물론 여기에는 김유정의 문학을 이해시키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다분히 실려 있다고 이해 할 수 있다. 그리고 지루한 점이 없지 않았으나 작품에 등장하는 산과 지명, 야생화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저자가 그만큼 산행의 경험과 야생화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연구의 결과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보아지며 그 노력에 감탄과 찬사를 보내고 싶다.
넷째, 하리는 자신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상당부분을 세상과 등지고 사는, 세상의 일에 극도로 무관심하여 신문도 제대로 안 보는, 1980년 대학교 2학년 때 휴학 중 일어났다는 전두환 정권에 항거한 광주사태 조차도 그 이듬해 복학하여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사실 설명에서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게 어디 조그마한 시골 동네에서 일어난 일인가?
실제 전두환이 정권을 잡은 것은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 사건 후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 전두환이 합수부사령관으로 권력을 휘두르고 12월 12일 정권을 찬탈하다시피 하여 나라가 온통 시끄럽고 혼란의 와중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알고 싶지 않아도 알았을 사태였다. 더구나 하리가 대학 2학년 때 촉발된 5 . 18 광주항쟁은 나라가 아수라장이 된 시기였다. 전 대학에 휴교령이 내리고 학생과 민중들의 시위와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과 살육으로 피비린내가 진동하던 때에, 휴학한 대학생이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어찌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였을 것이며, 복학한 후에서야 선배에게 <전두환>이 누구냐고 물었다는 하리의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그야말로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또한, 그토록 세상과 소통을 안하고 살았다는 하리가 한 때, 세상의 관심이 되었던 봉고차의 인신매매 단이나 새우젓 배에 팔려 노예처럼 일하는 소년, 일시에 살아져 버린 대구의 개구리 소년 등등의 사회적 사건과 성노예가 되다시피 한 여성들의 세태에 대해서는 나름대로의 주장을 펴고 있을 정도로 알고 있었는지, 그 부분 역시 의아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 231~233쪽
다섯째, 유정과 하리의 학교 임용방식이 비현실적이다. 학교나 대학에서 전임강사나 교수를 임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신문에 채용공고를 내게 되어 있다. 그리고 교원인사위원회에서 지원자에 대한 면접과 평가가 필수적이다. 여기에서 통과가 되어야 일차 임용이 되고 이사회의 승인과 더불어 교육부에 보고가 되어야 한다. 아무리 인맥, 학맥, 금맥을 동원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최소한의 절차이다. 이런 절차가 없이 대학전임으로 임용되었다는 사실은 한마디로 난센스다.
중고등학교의 교사임용도 마찬가지이다. 면접의 절차도 없이 이력서 하나 달랑 가지고 교장의 제청만으로 채용하는 법이 없다. 더구나 사립학교라면 역시 이사회(장)에게 제청되고 승인을 받는 절차를 따라야 한다.
여섯째, 여러 곳에 오자가 발견되어 유감이다. 대략 살펴 보건데,
1) 77쪽 18째 줄 - 만져지지 않은 것는(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2) 196쪽 14째 줄 - 저 물이 대륭상(산) 밑에~
3) 285쪽 9째 줄 - 그 사람들은 사람(랑)을 나눌만큼~
4) 295쪽 19째 줄 - 저는 거지(기)다 덧붙여~
5) 363쪽 18째 줄 - 돌아와 하염없지(이)~ * 이 글은 박록주의 회고록 인용부분으로
원본이 틀렸는지도 모르겠다.
6) 527쪽 15째 줄 - 세상을 떠나지(기) 11일 전~
7) 550쪽 16째 줄 -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게(데) 크게 기여한~
8) 577쪽 20째 줄 - 재단에 재(제)청을 했던~
이상으로 이 책을 읽으며 나름대로 몇 가지 느낀 점을 적어 보았다. 지난번 김유정문학촌에 다녀오면서, 그곳의 사무국장 고규원 선생님으로부터 문학촌장이신 전상국 선생님의 소설 <유정의 사랑>을 소개 받고 한권 붙여 달라고 부탁했던 책이 도착하여 읽게 된 것이다.
그 때, 전상국 작가님이 야생화에 대한 연구와 안목이 대단하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에도 상당부분 반영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진다. 노작가를 만나 뵙지 못하고 와서 서운했지만 이 책을 통하여 오랜만에 김유정을 다시 대할 수 있었던 점과 심혈을 기울여 쓴 전상국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동명의 소설이 1993년 고려원에서 출판된 것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필자는 2005년 4월 ‘일송포켓북’에서 출판된 것을 읽었으며 따라서 내용이 같은 것인지, 개작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음과 아울러 혹시 이 글 중에 잘못 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필자의 책임이며 지적하여 주시면 바로 잡도록 하겠다.
전상국
1940년 3월 24일 홍천출생
196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동행'으로 등단
경희대학교 국문학과, 동대학원
춘천고, 경희고 등에서 교편, 강원대학교 교수, 현 김유정문학촌장, 황순원기념사업회회장
/ 2009. 11. 3 보헤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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