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쓴 시집 / 파블로 네루다 시선집
그러니까... 그때 나는 고등학교 2학년에 해당하는, 5년제 전문학교 2년차 학생이었는데, 네루다라는 시인이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기념강연회가 동숭동 흥사단 본부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읽었다. 시에 대해 거의 무지했던, 겨우 교과서에선가 윤동주의 시편들을 읽고, 표지가 푸른 그의 시집을 종로서적에서 구입한 전력에 불과한 내가 어찌하여 네루다라는 대시인에 관심을 가졌었는지는 미스테리지만, 어쨌든 나는 강연회장을 교복차림으로 찾아갔다. 조병화 시인이 닉슨에 대한 시를 낭송하던 것을 기억한다. 거기에서 아마도 임시로 묶어 판매하던 네루다 시선집을 구입했는데, 특히「슬픔에 II」라는 시가 내 가슴을 강타했다. “슬픔이여 검은 날개를 펴 다오/목원에 빛나는 해...”로 시작하여 “빛이여 사라져다오”라고 끝나는 그 시편이 오랜 후에 나를 시인으로 만든 셈이다.
그 오랜 빙하의 시간 동안에 나는 네루다를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 유학 시절 책방에서 틈틈이 그의 시를 읽으며 언젠가는 시인이 되리라는 예감을 버리지 않았다. 그 책은 그러나 어느 날 책장 밖으로 걸어 나간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정식으로 출판된 것이 아니니 중고서점에서 찾을 수도 없어, 나는 그 후 네루다의 이런 저런 시집들을 구입했으나, 그 어릴 적 추억을 되돌리기에는 부족했다. 돌이켜보면 그 책의 번역은 참으로 아름다웠는데, 번역자의 이름은 선명히 기억한다. 임중빈. 정진규 선생님에 의하면 이미 작고했고, 외롭게 사신 분이라고 한다. 또 한 가지는 그 책이 일본어판을 중역한 것이라는 것 (이 부분은 최동호 선생님이 확인해 주셨다). 그 책에 실린 빛나는 시편들.「오늘 밤 나는 쓸 수 있다」를 비롯한, 초기 시집『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의 농염한 시들과, 남아메리카 역사와 민중에 대한『Canto General』의 서사적인 노래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로 시작하는「詩」등의 절편들은 이 대시인을 내 시의 스승으로 만들었다. 회고록에서 네루다는 시론에 별 관심이 없다고 고백했는데, 나는 이러한 생각이 그를 대시인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남미의 민중들이 그의 시를 광장에서 한 목소리로 낭송하는 이유는 네루다의 시에서 고동치는 힘찬 맥박과, 낮은 존재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 때문일 것이다.
그에 의하면 시는 삶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러므로 시는 피로 쓰는 것이다. 사실, 시론이라는 것은 시의 그림자를 멀찌감치 뒤쫓아 가는 것 아닌가. 체험이 부족한, 지나치게 머리 좋은 사람들이 어려운 시론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시를 때려 맞추는 것 아닌가... 하는 편견을 나는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시인도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냥 생겨나는 것이다. 만년에 칠레 바닷가에 <검은 섬 (isla negra)>이라는 집을 짓고 그곳에서 칩거하며 회고록을 쓰는 시인, 그것은 나의 꿈이다. 내가 그를 만난 후 1년 만에 네루다는 우파 쿠데타의 와중에서 병사한다. 그 직전 그를 만났던 평론가는 이렇게 기록한다. “수염투성이의 네루다는 눈을 크게 뜬 채, 죽음을 똑똑히 보고자 몸을 반쯤 일으킨 자세로, 드디어 ‘진실’과 대면하였다. 그가 사랑했던 민중과 대자연, 여인들은 여전히 이 우울한 행성에서 부대끼며 몸부림치는데, 남은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은 후진들의 몫이리라.
-출처: 계간 <시평> 2009 가을호
詩 / 파블로네루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말야
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
그건 건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으며,
내 영혼 속에서 뭔가 시작되어 있었어,
熱이나 잃어버린 날개,
또는 내 나름대로 해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넌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
풀리고
열린
하늘을,
유성遊星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그림자,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진 그림자,
휘감아도는 밤, 우주를
그리고 나, 이 미소微小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虛空에 취해,
신비의
모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점(點) / 파블로 네루다
아픔보다 더 넓은 공간은 없다
피를 흘리는 아픔에 견줄만한 우주도 없다.
그들은 모든 꽃들을 꺾어버릴 수는 있지만 결코 봄을 지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커다란 기쁨
네루다 시 / 김남주 시인 역 옛날에 추구하고 있었던 그림자 따위는 이제 소용없다 나에게는 저 돛대가 가지고 있는 이중의 기쁨이 있는 것이다 숲의 유산에 대해서 해로(海路)의 바람에 대해서 아는 것과 그리고 어느날 나는 결의했던 것이다 이 세상의 빛 아래서 나는 감옥에 처넣어지기 위해서 쓰는 것은 아니다 백합꽃을 꿈 속에서 찾아 헤매는 젊은 승려를 위해서 쓰는 것도 아니다 나는 쓰는 것이다 소박한 사람들을 위해서 변함없는 이 세상의 기본적인 요소들 - 물과 달을 학교와 빵과 포도주를 기타나 연장류 등을 갖고 싶어 하는 소박한 사람들을 위해서 쓰는 것이다 나는 민중을 위해서 쓰는 것이다 가령 그들이 나의 시를 읽을 수 없다 하더라도 나의 생활을 일신시켜 주는 대기여 언젠가 내 시의 한 줄이 그들의 귀에 다다를 때가 올 것이다 그때 소박한 눈동자는 눈을 뜰 것이다 광부는 바위를 깨면서 웃음을 머금고 삽을 손에 쥔 노동자는 이마를 닦고 어부는 손 안에서 뛰노는 고기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볼 것이며 산뜻하게 갓 닦은 몸에 비누 향기를 뿌린 기관사는 나의 시를 찬찬히 들여다 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틀림없이 말할 것이다 "이것은 동지의 시다"라고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바라는 꽃다발이다 명예다 바라건대 공장이나 탄광 밖에서도 나의 시가 대지에 뿌리를 내려 대기와 일체가 되고 학대받은 사람들의 승리와 결합되기를 바라건대 내가 천천히 금속으로 만들어낸 견고한 시 속에서 상자를 차츰차츰 열 수 있기를 젊은이가 생활을 발견하고 그곳에 마음을 다져넣어 돌풍과 부딪쳐 주기를 그 돌풍이야말로 바람 센 고지에서 나의 기쁨이었던 것이다 동방의 종교 네루다 詩 / 김남주 詩人 譯 그곳 랑군에서 나는 알게 되었다 신들은 하느님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사람들의 적이라는 것을 설화석고(雪花石膏)와도 같은 신들은 하얀 고래들처럼 늘어져 있었다 보리이삭처럼 도금된 신들 탄생의 죄를 똘똘감고 있는 뱀의 신들 보기에도 섬찍한 십자가의 예수처럼 공허한 영원의 칵테일 파티에서 미소 지으며 우아하게 벌거벗고 있는 부처님들 그들 전지전능한 신들은 우리에게 천국을 강요하고 고문과 권총으로 신앙심을 매수하기도 하고 피를 태우기도 했다 자기들의 비겁함을 감추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 낸 이 잔인무도한 신들은 그리고 그곳 랑군에서도 모든 것이 똑같았다 지상은 온통 천국에 이르는 천국의 상품으로 악취를 뿜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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