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칼럼

윤관영 <시에 말걸기, 혹은 시비하기>

미송 2010. 3. 1. 01:07

《2006년 봄호 계간 시평》- 시에 말걸기, 혹은 시비하기

 

 

1

시가 어렵다고, 더 쉽고 투명하게 노래할 순 없느냐고, 말하지만

독자여, 그러기엔 이 세상엔 너무 많은 흐린 비가 내리고,

(김상미,「담쟁이덩굴」부분)

 

위 시에는 시인이 독자와의 관계를 설정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는 고민이 담겨 있다. 이는 독자가 창작자인 이와 같은 시인의 어려움을 긍정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시인이 독자와의 소통을 내세워 쉽게 쓴다고 해서 될 문제도 아니라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왜 현대시는 난해한가? 왜 이해하기 쉽게 쓰지 않는가? 이러한 질문은 대체로 시 이해에 대한 노력이 부족한 문학 독자의 입에서 나오기 일쑤다. 현대시가 어렵다는 사람들은 대체로 시 자체를 즐길 줄 모르는 처지에 있다>고 독자의 문제를 지적한 유종호의 말이 있는 반면에 <시에는 화자의 존재가 크게 부각될 뿐 의미전달의 대상인 청자가 뚜렷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화자의 이야기를 들어줄 청자의 자세 같은 것은 아예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고 시인의 문제를 지적하는 이숭원의 말은 그 반대편에 있다.

 

그렇다면 독자와 시(시인)는 왜 이렇게 양극단화 되었는가?

<이따금 나는 좋은 독자들은 좋은 저자들보다 더욱더 난삽하고, 독특한 존재들이라고 생각한다>고 보르헤스가 그의 『불한당들의 세계사』 서문에서 언급한 독자는 지금의 우리 시에도 존재하는가. 답은 부정적이다. 그들은 장르로는 영화 쪽으로 기울었으며 기호로는 텔레비전과 컴퓨터, 모바일로 이동했다. ‘좋은 독자’는 스스로에게 만족스러운 것을 찾는 존재로 변이해 갔다. 여기에는 시인도 한 역할을 했으니 그 바탕에는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사회에서 시는 ‘무가치한 잉여’로 전락함으로써 자신을 보존한다. 아니, 성장케 한다.(김수이)>는 자학에 가까운 독자 포기가 있었다. 교환가치에 대한 고려가 없다는 측면에서 보면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게다가 <지금 많은 시인들에게 ‘해체’와 ‘균열’은 이상적 상태를 전제로 한 결여의 상태가 아니라 그저 삶의 당연한 조건>으로 여기며 <좋은 시가 지닐 수 있는 당대성이란, 당대의 현실을 뛰어나게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문학 인구들에게 강력한 ‘매혹’이나 ‘거부반응’을 일으킴으로써 성취되는 것인지도 모른다(이장욱)>는 믿음을 가진 시인 일군들에게 독자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도 못 되었다. 

 

여기서 새롭게 등장하는 과제가 있으니, 그렇다면 이제 누가 시의 독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시인들이 독자에게 다가가기 위한 어떤 노력을 기울인다고 하여 독자층이 넓어질 것 같지도 않다. 엄정하게 따져 보면 시의 독자는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 시를 쓰는 사람들, 시를 평하는 사람들로 한정되어질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시인 지망자의 양적인 규모가 좋은 시를 알아보고 즐기는 과정에서 한국 시를 부축하는 양질의 독자층의 유지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문제(최원식)>라는 진단에 이르면 독자의 문제는 수용과 소비에 있어서 더욱 비관적이다.

 

고전적인 의미의 독자 개념이 사라진 자리에는 시인 본인들이 독자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데, 상대적으로 그 자리는 커졌다. 여기서 발생하는 독자의 문제가 또 있으니 시인 독자 내부의 분열과 서로간 불인정이 그것이다. 식상하다고 폄하되기 일쑤인 기존 서정시풍이 있는가 하면 ‘젊은 시인들’ 혹은 ‘실험성의 시들’이라 명명되어지는 ‘난해성’의 시들이 다른 한편에 있다. 젊은 시인들의 시가 시인 독자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불소통의 시라는 문제와 더불어 이해받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는 불소통이 목적이라는 면에서 문제라면 그 반대편의 시는 안이하다고 말하여질 수밖에 없는 형식과 내용이 문제다. 여기서 불신과 불화는 서로를 독자로서 염두에 두지 않으며 그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데에서 온다. 이 동업자이자 독자인 관계(시인 독자)는 고전적인 독자 관계와는 달리 그 거리가 줄어들 수 있고 불화를 극복할 수 있는 여지가 그나마 존재하기에 다소간 희망적이긴 하나 그 골이 깊은 것 또한 사실이다.

 

‘젊은 시인들’은 박형준의 다음 글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최근 젊은 시인들 사이에서 보이는 낭만적 상상력은 대개 자신의 고통과 관념, 유희에 매몰된 감상의 산물일 때가 많다. 이들의 시에서 나타나는 표현의 화려함과 환유적 사고, 무의식에 대한 과다한 집착은 전시대의 시와 자신들의 시를 구별해 내 독자적 미의식을 창출하려는 조급함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잎과 가지만을 보며 앞으로 내달리면서 자기도 모르게 뒤로 모습을 드러낸, 자신의 뿌리를 간과하는 태도는 지나치게 인위적인 시로 연결된다. 중요한 것은 키치든 문화든 기억이든 무엇이든 시인이 그것에 한‘중독자’이자‘반성자’(김현)가 되지 않으면, 그 양자간의 거리에서 빚어지는 ‘긴장의 시학'은 물론이려니와 새로운 미적 가치도 태어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젊은 시인들의 시에 감정에 가까운 반감을 가진 시인이라 생각하면 권혁웅의 다음 글을 참고하면 좋다.

 

……그래서 젊은 시인들은 앞의 비판을 이렇게 고쳐 말해도 좋을 것이다. 최근의 젊은 시인들은 중언부언을 중요한 발화의 방식으로 만들었다, 단형의 틀에 우겨넣기에는 시의 전언이 너무 풍부하다, 그들은 음악을 위해서 전언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미지가 풍요롭다, 그들은 여러 화자를 무대에 올린다, 사회와 역사에 대한 통찰은 존재론적인 통찰에 자리를 물려줄 때가 되었다, 추(醜)와 불협화음은 처음부터 미의 범주였다……미적 형질의 변화를 그들은 비평이 정식화하기에 앞서 실현하고 있었다고 해야 한다.>

 

2

삼거리에 용달차가 멈춘다

얼기설기 묶인 가구들이 잠시 기울고

액자 속 사진에서 머리칼이 휘날린다

저 이삿짐의 주인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낙향한다고

함부로 단정지어본다

국도는 매일 고만고만한 차들을 고만고만한 속도로 실어나른다

하루를 기점으로 순환하고 있는 걸까

이 삼거리는 세트장인지도 모른다

나는 꽃과 나무를 돌보는 역할을 한다

주기적으로 새순과 어린 나무들이 실려오고

아무도 그들의 생일을 기념하진 않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열기는 신생아실처럼 들끓는다

내가 그리 비중있는 배역은 아닌 것이

그들은 스스로 잘 자라기 때문이다

나는 약간의 손질과 이동을 도울 뿐이다

시절이 새초록해지면 아이들이 소풍을 온다

도시락을 흔들며 목련원피스를 입은 여자와 함께

삼거리를 건너온다

아이들은 나무를 흔들고 꽃을 쥐었다 놓지만

나는 내버려둔다

천적들은 서로를 아름답게 한다고 어딘가에서 읽었다

아이들은 꽃을 닮고 꽃은 아이들을 닮고

그런 밤이면 달무리가 겹으로 서고

삼거리에 초승달과 그믐달이 함께 뜬다

 

—김성대, 「일월식물원」, 『창작과비평』겨울호

 

이 시는 생이 극히 부정적인 상태에 처해 있음에도 희망을 읽어내고 있다. 여기서 생이 부정적인 상태에 있다함은 화자와 주변인의 모습들이 그러하다. ‘내가 그리 비중있는 배역은 아닌 것이’라는 독백에서 보듯 화자는 스스로를 대단찮게 여기고 있다. 소도시의 삼거리에는 이사 전용 차량이 아닌 ‘용달차’가 오는 곳이며 ‘얼기설기 묶인 가구들이 잠시 기울고’에서 보듯 포장이사가 아닌 짐 등속이 훤히 보이는 날림 이사를 하는 이들이 지나가는 곳이다. 게다가 자주 보게 되는 ‘이삿짐의 주인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낙향한다고/함부로 단정지어’도 그 예상이 크게 빗나가지 않는 부류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단정’이 들어맞었던 사람들이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꽃과 나무를 돌보는 역할을 하’는 존재가 화자이다.

 

이 시가 돋보이는 것은 세상을 읽는 코드의 새로움 때문이다. ‘국도는 매일 고만고만한 차들을 고만고만한 속도로 실어나른다’는 진술에는 생의 단조로움과 별것없음에 대한 인식이 깔려 있다. 여기에는 모험이라고는 없다. 그런데 이러한 반복적인 일상이 끌어낸 ‘하루를 기점으로 순환하고 있는 걸까’ 라는 회의는 ‘이 삼거리는 세트장인지도 모른다’는 근본적인 세계 인식을 거쳐 ‘나는 꽃과 나무를 돌보는 역할을 한다’고 단정하는 준엄한 자기 검열에 이른다.

 

내가 그리 비중있는 배역은 아닌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화자가 보잘것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스스로 잘 자라기 때문’이다. 비록 소도시의 작은 식물원이지만 그곳은 ‘뿜어내는 열기는 신생아실처럼 들끓는’ 곳이다. 따라서 화자는 간섭하는 존재가 아닌 ‘도울 뿐’인 존재다.

 

여기서 화자가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세계관을 드러내 보이는 것은 ‘천적’ 개념이다. ‘천적들은 서로를 아름답게 한다’고, 그것도 자신의 주장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읽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삶에 쫓겨 주기적으로 이사를 하는 그들도 사실은 세상의 천적들이 그들을 강하게 만든다는 것의 다른 말이 된다. 이러한 인식은 아이들에게로 이어지는데, 꽃을 쥐고 흔드는 아이들을 내버려두는 데까지 이른다. 분명 아이들의 체온이 꽃에게는 고통이겠지만 길게 보면 그것이 꽃을 강하게 해준다는 말도 된다. 역설적으로 아이들도 강한 존재가 된다. 그러한 인식은 아이들에게나 이사하는 사람들에게 한발 물러선 긍정을 가능케 해 준다. 여기서 ‘일월’식물원은 인생을 말하는 변형된 이름이다.

 

천적들은 서로를 닮게도 하는데, ‘아이들은 꽃을 닮고 꽃은 아이들을 닮고/그런 밤이면 달무리가 겹으로 서고/삼거리에 초승달과 그믐달이 함께 뜬다’니 궂은 일을 겪었거나 복된 일이 있은 연후에는 달 한번 볼 일이다.

 

두 평 반 방에 두 평 반 볼트의 형광등 불빛

내 음부까지 환하게 밝힌다

창 밖 은행잎이 은행, 은행 하고 떨어진다

내가 나, 나, 나 하고 나를 부른다

이름이 나나가 된다

내 이름 가운데 너를 깨뜨려본다

우리라는 Hommelette

나이프로 나를 잘라 포크로 너를 찍어올린다

시간이 같이 찍혀올라와 간간이 씹힌다

방의 노른자위로 빛나고 있는 불빛,

을 흰자위로 흐물거리는 내가 먹고 뚱뚱해진다

두 평 반 킬로그램의 나, 나나

사각으로 사각거리는 사각의 방

사각의 나나, 나

모서리가 날카로워진다

시간이 내 몸을 사각으로 갉아먹는다

사각으로 지워지는 나, 나

점멸하는 형광등 불빛

방의 각도가 기울어진다

내가 기울어진 채 깜빡인다

기울어진 시간이 방금 전에 멈춰 서 있다

 

—장희정, 「두 평 반의 나나」, 『문학동네』겨울호

 

 

이 시를 보면서 김남주 시인이 시구가 떠올랐다. 독방에 갇히면 가지고 놀 것은 제 자지밖에 없다는 말. 이 시에서도 두 평 반 방에 유폐된 자의 특징이 ‘내 음부까지 환하게 밝힌다’로 드러나 있다. 갇혀서는 외적으로 관심을 가질 것은 그것밖에 없다. 유폐시킨 자는 도망갈 곳 없이 가둔 이상 감시해야 하므로, ‘방의 노른자위로 빛나고 있는 불빛’을 설치하게 마련이다.

 

에릭. 프롬에 의하면 매저키스트적 성격 혹은 매저키스트적 사고의 공통된 특성은

개인의 삶이 자신의 의지와 관심 밖에 있는 힘들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는 데 있다. 유폐된 자들의 특징이야말로 그렇다. 화자는 ‘창 밖 은행잎이 은행, 은행 하고 떨어진다’는 진술에서 보듯 밖을 내다보는 것까지만 허용된 갇힌 존재이다. 그에겐 달리 호명할 대상이 없으며 따라서 ‘내가 나, 나, 나 하고 나를 부르’는 지경에 이른 자이다. 그는 자신을 처벌하고 자신에게 고통을 주도록 설득하며 그 고통을 즐긴다. ‘내가 나, 나, 나 하고 나를 부르’며 그렇게 하면 ‘이름이 나나가 된다’고 믿는 상태에 있다. 즉 음부를 가지고 노는 식상을 넘어선 곳에서 내면의 자해로 들어간다. ‘내 이름 가운데 너를 깨뜨려본다’는 말은 소중한 어떤 것을 분리하여 제거한다는 면에서 소외의 극단을 뜻한다. 또 ‘나이프로 나를 잘라 포크로 너를 찍어올린다’는 진술은 사실상 나를 자르는 것을 의미하는데 생명체로서 존재를 포기한 극단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시간이 같이 찍혀올라와 간간이 씹히’는 지경에 이르면 이는 현재의 육화인 과거까지 부정하는 극단의 행동이기도 하다. 그가 어떤 인식을 하건 그는 갇힌 존재이며 그렇기에 ‘먹고 뚱뚱해지’는 실존재이기도 하다. 또 오랜 갇힘은 ‘사각으로 사각거리는 사각의 방’에서 ‘사각의 나나, 나’로 변이 분화 되며 ‘모서리가 날카로워지’는 것을 인식하는 자이다. 갇히면 모서리만 보인다.

 

이 시를 보면 최승자의 시를 평한 엄경희의 평문이 떠오른다.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철저하게 자기를 축소하고 분해시키는 이 같은 사랑의 방식(매저키스트적)은 부조리한 세계의 폭력성을 폭로함과 동시에 무가치해진 주체의 삶을 회복하기 위한 시인의 의지를 나타낸다.

 

시 「두 평 반의 나나」에 나타난 화자의 의지는 회복하려는 어떤 의지가 아니다. 방의 각도가 기울어지고 시간이 멈춰 선 비극적 현재이다. 그런 상태를 보여주고 다만 말할 뿐이다.

 

3

오늘은 자식을 위해

기도합니다

세상의 허구 많은 사람의 자식 중에

유독 제 자식을 지목함을

부디 용서 하십시오

오늘따라 생의 쓸쓸함이

별스러운 폭풍으로 그에게 덮치고

앞뒤 출입문 막혔습니다

저의 허물로 제가 유전시켜 과민, 더하여

감상보따리를 메고 사는 일이

출생 이래의 지병입니다

차마 보고 있지 못하겠습니다

비오니 제 자식을 구해주시고

저의 죄값을

두 몫으로 셈하소서

 

—김남조, 「자식의 일」, 『시와정신』겨울호

 

가족은 모든 인간에게 일차적인 관계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삶의 기반이라 할 수 있다. 사랑에 대한 최초의 경험들이 여기서 이루어지며, 참된 행복의 꿈 또한 가족에서 출발한다. 가족은 타자가 아니다. 막무가내에 가까운 정서적 동일체이다. 따라서 가족이 흔들리는 것은 자신이 흔들리는 것이며 자신의 뿌리가 위협 받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물며 그것이 자식의 일일 때 정서적 동일성은 너무 가까운 것이어서 맹목적이기조차 하다.

 

기도문 형식의 이 시는 독자와의 거리가 비교적 가깝다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한 것은 대가의 풍모다. 시가 어렵고 쉽고의 문제를 떠나 고백이냐 묘사냐를 떠나 감동이냐 발견이냐를 다 떠나, 그냥 시가 좋다. 울린다. 쉽게 이해된다고 해서 가볍지 않으며 또 자식의 문제를 다룬다고 하여 ‘감상’으로 떨어진 신파도 아니다.

 

‘저의 허물로 제가 유전시켜 과민, 더하여/감상보따리를 메고 사는 일이/출생 이래의 지병입니다’라는 고백, 즉 시인은 이런 지병을 안고 사는 존재가 아닌가 한다.

 

비 오는 날 아버지는 전자오르간을 만지시네

벽돌 나르던 손으로 샤시를 하던 뭉툭한 손으로 아버지, 그것은 音樂이 아니어도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지요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뽕짝이 나는 싫었네 영동대교에 밤비 내리던 날에 나는 휴학계를 쓰고 강원도 절에 갔었는데…… 아버지, 비 오는 날은 동생이 手淫하는 날이어요, 내가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시를 쓰는 날이어요

왜 장마철에는 남동생이 야위어갈까요, 내 방에는 쓰다만 詩들이 벽돌조각처럼 구겨져 있을까요, 너는 내가 만든 창문이오 베란다요 현관이요

동생을 데리고 나는 비 오는 오락실에서 테트리스를 하고 아아, 쓰다 만 건축자재처럼 떨어지는 블록들 끼워 맞추며 우리들의 집을 지었네 짓고 또 짓고 또 지어도 다시 지어야 하는 어두운 테트리스의 거리, 지나서

아버지 전자오르간이 멈춘 집에는 죽음보다 막막한 고요가 집안 구석구석 도배를 하네 오얏꽃 활짝 핀 벽으로 기어들어가 나, 옷걸이용 못이 되고 싶었네

아버지 작업복을 목에 걸고서 나, 아버지 오르간이 못 다다른 音域으로 가, 萬年雨를 내리게 하는 음악이 되고 싶었네

 

—박진성, 「아버지의 전자오르간」, 『시작』겨울호

 

  

김남조의 시가 ‘자식’의 일을 다루고 있다면 박진성의 시는 ‘아버지’를 다루고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해 ‘아버지 오르간이 못 다다른 音域으로 가, 萬年雨를 내리게 하는 음악이 되고 싶’어하는 화해의 염원이 담겨 있다. 자식(아들)이 아버지를 이해하는 경로는 다양할 수 있으나 그 출발은 제 삶의 질곡에서 나온다. 그 질곡이 제 삶을 반추하고 아버지의 삶을 유추하게 하고 동일시해 보게 한다.

  

‘비 오는 날’은 막일하는 아버지가 쉬는 날이다. 그런 날 아버지는 자신의 꿈인 ‘전자오르간’을 만진다. 아버지의 꿈은 양식이 될 수 없기에 연주할 손으로 ‘벽돌 나르’고 ‘샤시를 한’다. 화자의 생이 아직 질곡이 아니었던 시절에 아버지의 연주는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뽕짝이 나는 싫어’ 경멸 받았던 대상이었다. 막노동을 하는 아버지는 일의 특성상 장마철에는 피치 못하게 쉰다. 따라서 가족 모두가 질곡인 계절이 장마철이다. 동생은 수음을 하고 나는 시를 쓴다. 동생은 야위어 가고 나의 시는 구겨진다. 철이 들어 아버지의 삶을 이해해도 그것은 이해에 그칠 뿐, 나는 별다른 수가 없어 가상 공간에서 집을 지을 뿐이다. 그마저도 ‘지어도 지어도 다시 지어야 하는 어두운’ 것을 되풀이할 뿐이다.

  

아버지는 그 천박한 전자오르간 소리마저 내기를 멈추었다. 꿈을 완전히 닫은 것이다. 한때 가족이 환하게 좋았던, ‘오얏꽃 활짝 피’었던 그 시절로 돌아가 ‘아버지 작업복을 목에’ 거는 옷걸이용 못이라도 되고 싶은 나는 지금의 죽음보다 막막한 고요가 견디기 힘들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더불어 동일시가 이루어졌기에 가능해진 감각이다. 그 이해는 꿈에 대한 이해까지 치달아 ‘아버지 오르간이 못 다다른 音域으로 가, 萬年雨를 내리게 하는 음악이 되고 싶’다는 열망에 이른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한 온전한 합일이 된다. 시인의 지병이 아버지에 대한 전면적 이해를 불러왔다. 타자에 대한 이해보다 제 꿈에 빠져 눈 돌릴 틈 없는 젊은 나이에 이와 같은 아버지에 대한 이해는 흉내내어질 수 없는 그 만의 개성이 되겠다.

 

배롱나무 꽃도 벌써 지고

헐거워진 교정의 녹음 속에

단 하나 붉은 포인트

넓적한 푸른 잎사귀 위로 솟아

긴 대궁 끝에 달린 꽃은

싸릿대에 묶어 매단

파르티잔의 마지막 적기 같다

한때는 영광이었으나

한때는 패배였으나

비바람처럼 격정은 가고

이제는 단지 순정만이 붉어

가슴속 잔잔히 눈물은 배고

가을 하늘 기울어가는 어깨 위

칸나가 붉다

 

—윤재철, 「가을 칸나」, 『문학판』겨울호

 

이 시를 보았을때, 격렬한 색 바탕과 굵은 선을 특징으로 하는 <조르주 루오>의 그림이 떠올랐다, ‘헐거워진 교정의 녹음 속에/단 하나 붉은 포인트’처럼.후일담 시 같으면서도 그 영역을 녹여 버리는 확장이 이 시에는 있다.

  

계절 꽃은 피는 순서가 있다.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복사꽃, 배꽃, 자두, 살구꽃, 목단, 박태기, 벚꽃, 불두화, 무궁화, 능소화, 장미, 배롱나무가 필자가 아는 개화 순서다. 배롱나무는 그 이름처럼 백일 동안 피는 듯 오랫동안 여름을 장식한다. 왠지 고맙게 생각되는 나무가 그래서 배롱나무다.

  

배롱나무가 견딘 자리는 크다. 방학 내내 물이 고였다 마른 운동장은 거뭇하고 정구장 바닥을 미는 로울러도 녹이 슬어 붉다. 구름은 그림자를 만들어 게으르게 운동장을 지나가고 정구장에는 풀이 그득하고 멀리 열린 한 학급의 창문 틈으로 커튼이 비어져 나와 흔들린다. 그런 세월을 함께 한 배롱나무가 진 자리는 쓸쓸하다. 그 자리를 칸나가 메운다. 온통 푸른데 단 한 점이 붉다. 이것이 단 하나의 이미지, ‘싸릿대에 묶어 매단/파르티잔의 마지막 적기 같다’는 서정을 불러온다. 물론 이 서정은 화자의 상태- 현재화 된 과거 -가 불러온 것이다. 그런 그것은 ‘격정은 가고/이제는 단지 순정만이 붉’어 ‘가슴속 잔잔히 눈물’을 배게 한다. 그런 칸나는 <조르주 루오>의 그림처럼 저 멀리 서서 화자인 나를 건드리는 한 폭의 그림이다.

 

4

절에서 사는 개야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개야

 어쩌다 절밥을 먹게 됐다 이건데

 그래 고기 한 점 없는 절밥, 맛 있냐 맛 없냐

 그래도 공양이란 거 싹 싹 비울 만하냐

 어떻냐

 아직 멀은 것 같다

 밥을 먹다 말고도 숲속 저 편으로

 귀를 바짝 세우질 않나 짖지를 않나

 사람만 보면 몸을 기며 꼬리를 흔들며 아는 척하는 것이

 아직 멀었다.

 가소롭다

 개가 이리뛰고 저리뛰고 할 때마다

 몸쪽 어디선가 풍경風磬 소리가 나오는데

 아마 처마 끝 종에 달린 물로기라도 낼름 삼켰을라구

 그랬을라구

 다만 개야 나는 네가 오래오래 개이기를 바라겠다

 

—신현정, 「공양供養」, 『시인세계』겨울호

 

신현정은 모든 시에서 1행 1연 형식을 고수하는데, 그런 고정화된 습관이 그의 시에 대해 거부감을 갖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느리게 돌아가는 화면처럼 1행 1연의 시 구성이 들어맞는다. 이 시를 보면 절에서 본 개가 떠오른다. 풀어진 개가 있었던 곳은 강화 청련사였고 개가 묶여 있던 곳은 칠장사였다. 묶여 있는 곳의 땅을 파, 그 먼지를 뒤집어써서 누르스름해진 하얀 개가 떠오른다. 하도 문댄 흙은 반질반질했고 개밥그릇도 비워져 테두리가 반질반질했다. 그러고 보니 짖지를 않는 것이 공통적인 특성이었다. 육식이 없던 탓에 밥그릇은 늘 비어 있었던 것 같다.

 

개는 무슨 사연이 있어서 절집의 개가 되었을까. 그냥 그 정도의 의문이면 좋다. 시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어야 한다거나 의미를 찾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다. 그냥 절에서 개를 보고 화자가 자문자답하는 풍경이 이 시다. ‘다만 개야 나는 네가 오래오래 개이기를 바라겠다’는 진술이 이 시를 살렸고 돋보이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절에 사는 개는 절에 사는‘사람’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풀귀얄로

풀물 바른 듯

안개 낀 봄산

오요요 부르면

깡종깡종 뛰는

쌀강아지

산마루 안개를

홑이불 시치듯 호는

왕겨빛 햇귀

 

—오탁번, 「春日」, 『시안』겨울호

 

  

시를 선정할 때 홀릴 뻔했다. 함께 발표한 앞의 시 「폭설」이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시가 재미있다는 사실은 소중한 미덕이다. 독자를 전제로 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볼수록 빛나는 이 시는 손때 묻어 잘 단련된 다듬이 방망이를 떠오르게 하기도 하고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기도 하다. 좋은 그림이 다시 볼 때마다 전에 못 느끼던 어떤 것을 떠오르게 하듯 이「春日」은 다시 보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시는 봄날 한때의 정경이다. 1연은‘안개 낀 봄산’으로 정지된 모습인데 반하여 2연은‘쌀강아지’가 뛰는 동적인 모습이다. 3연의‘왕겨빛 햇귀’는 靜中動이다. 春日이 원경의 여백 속에서 빛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시에서 주목할 사실은‘언어’에 관한 운용이다. 시에서 언어를 잘못 사용하면 그 인위성이 드러나 오히려 시가 그 위의를 잃기 쉬운데, 짧은 시행 안에 낱말 하나하나가 이미지의 역할을 잘하고 있다. <낱말들의 걸맞음에서 나오는 조화에 작품의 성질이 의존된다>는 말처럼 낱말이 녹아들어 부조처럼 입체감을 주고 있다.

  

1연의 봄산이 풀물 바른 듯 안개 낀 것은 그 색과 움직임을 보여준다. 젖은 안개는 잿빛으로 무겁다. 2연의 쌀강아지는 흰빛으로 동적이다. 게다가 공간을 가로지르는 소리 이미지의 떨림이 정경을 감각화하고 있다. 3연은 정지된 채 움직이지 않는 안개를 홑이불을 호듯 밀어올리는 것이 햇귀다. 왕겨빛 햇귀는 젖어있는 봄을 밝은 이미지로 출렁거리게 하고 있다.

  

<시인이란 언어를 이용하기를 거절하는 사람이다>라는 사르트르의 명제를 생각나게 하는 이 시는 시인은 언어를 이용하기를 거절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부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여름 저녁 집 앞 골목에서

강호동 머리만한

왕수박을 한 통

휘청거리며 들고 오시는

옆 집 할아버지

오른쪽 어깨 때리며

손자들이 온데요, 하시네, 만세!

땀 철철 붉은 얼굴로

뒤돌아보며 또 한 마디

8,000원이라우! 하시는

세상에! 저 보름달보다도

자랑스런 목소리라니, 만세!

10,000원짜리 수박 없으니,

만만세~!

 

—박의상, 「8,000원 수박 할아버지 만세!」, 『리토피아』겨울호

 

좋은 시 속에는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 물론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시가 모두 좋은 시인 것은 아니지만, 좋은 시가 제시하는 풍경은 삶의 본질적인 모습을 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시의 풍경은 아름다우며 또 삶의 모습 그 자체다. 이 글을 쓰는 아침 신문 기사에 생계수단을 잃은 노인들이 지하철에서 읽다 버린 폐지를 줍는데 하루 종일 100kg을 주으면 7,400원을 번다는 기사가 나왔다. 8,000원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시에서 주목되는 것은‘세상에! 저 보름달보다도/ 자랑스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인의 귀이다. 다른 것으로는 감탄으로 쓰인‘만세’의 적절성과 수박을 들고 즐거우면서도 힘들어 하시는 할아버지를 드러내는 시 형식의 변화가 주목 받을 만하다. 무엇보다‘만세’를 부를 수 있는 낭만성은 이 화자만의 특징으로 보인다. 이 시에서 개성이 확보된 자리도‘만세’ 바로 이 자리가 아닌가 싶다. 이 시는‘8,000원 수박 할아버지 만세!’인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더니‘10,000원짜리 수박 없으니, 만만세~!’에 이르면 독자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씁쓸하지만 따스한 웃음을 준다.

 

5

한 소리 또 하고

또 하고.

당숙은 죽어서 산새가 되었다.

한 노래 또 하고

또 하고.

—윤제림, 「당숙은 죽어서 새가 되었다」, 『문학마당』겨울호

 

시 참 간단명료하다. 그러나 그 전언은 새소리처럼 끊임이 없다. 이상한 일이다.‘당숙’이라는 말도 묘한 울림을 준다. 앞의 ‘당’소리가 울림소리로 길게 이어지다‘숙’에서‘수욱’으로 길게 폐음절로 끝나 묘한 여운을 준다. 좀 정답다.‘당숙’이라 하면 호칭하는 사람에게는 육촌 아저씨 뻘이고 그에게는 조카가 된다. 그러면 왜 당숙은 ‘한 소리 또 하고/또 하고' 그랬을까? 죽어서도 그렇게까지 했던 것일까? 그것은 둘 중의 하나지 싶다. 하나는 그 조카의 상태, 즉 집안의 여러 일들이 어떤 안쓰러움과 더불어 연민을 불러일으켜 당숙으로 하여금 볼 때마다 잔소리라 해야 마땅할 - 하나마나 한 소리라야 마땅할 - 한 소리를 또 하고 하고 했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당숙 자신의 삶의 질곡으로 인해, 제 삶으로부터 유추해 그 위해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조카에게 지겨울 정도의 한 소리를 또 하고 또 했을 수 있다.

  

살아서는 잔소리꾼이라야 마땅할 당숙은 죽어서 새가 되었는데, 그것도 <죽어서야> <산새>가 되었다. 이제는 역설적으로 그 소리가 그립고 그것을 좋게 들을 줄 아는 화자가 되었다. 시에서 새는 보이지 않는데, 새소리는 들리는 게 이 시다. 당숙은 보이지 않으나 당숙이 보이는 게 이 시다. ‘한 소리 또 하고’를 환기 시키는 삶의 어떤 결곡함이 이 시에는 있다.

  

새소리는 밤에 들을 때 더욱 잘 들리며 슬프다. 이 시는 제목에서 ‘당숙은 죽어서 새가 되었다’고 선언할 때부터 이미 시가 되어 울린다. ‘한 소리’는 죽은 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한 노래’가 되었다. 어디선가 새소리를 들으면‘당숙’이라는 낱말이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보통 때는 잘 모른다

땅에 돈 떨어진 것 발견했을 때

내가 내 멱살을 잡고 뒤흔들어 놓을 때

참다 참다 말 안 듣는 자식 등짝 몇 대 후려칠 때

망설일 것 없이 왼손이 스프링처럼 확 튀어 나간다

아버지 앞에서 오른손 부들부들 떨며 숟가락질 배운 탓에

ㄱ, ㄴ, ㄷ, … 오른손 덜덜 떨며 완고하게 구부려 쓴 탓에

지금은 오른손으로 글을 쓰고 오른손으로 밥 먹고 살지만

위기가 닥칠 때 맨손으로 버티는 것이 왼손의 근성이다

유년 시절 한 봉지의 과자를 훔치던 손이 성공했더라면

어느 하산 길 왼손이 나무뿌리 부여잡고 피 흘려주지 않았더라면

내 생의 지도는 극도로 우회되었을지도 모른다

오른손은 왼손의 쓸모를 수시로 빌려 쓰고 있다

바느질 할 때, 돈 셀 때, 생선 지느러미 가위질 할 때,

친정 이불장 사이에 봉투 찔러놓고 올 때

왼손이라야 더 날렵하게 끝을 낸다

상처의 칼집인 왼손이

생활의 현장 속으로 손 내밀 준비를 하고 있다

사십 년 넘게 교육 한번 받지 않은 왼손이

 

—김나영, 「왼손의 쓸모」, 『시와정신』겨울호

 

‘시가 생활의 절실한 반영이면 된다’고 말한 것은 김수영이지만 이 시는 생활에서 그 구체적인 존립 근거를 가지고 있다. 뭐라고나 할까, 생활의 세세한 근거가 시에서 진정성을 획득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화자는 왼손잡이다. 그런데 3연에서 보듯 아버지의 완강한 교육으로 그의 왼손은 무시되고 기능이 떨어지는 오른손이 바른손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것이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보통 때는 잘 모르’다가도 ‘땅에 돈 떨어진 것’을 줍거나 ‘내가 내 멱살’잡이를 하거나‘참다 참다 말 안 듣는 자식 등짝 몇 대 후려칠 때’는 왼손이 스프링처럼 튀어나가는 것이다. 교육과 정상이라는 말은 화급과 분노 앞에서는 죽고 본능이 일처리를 하는 것이다.

 

젊은 작가들에게 아주 초보적인 충고를 하나 하고 싶습니다. 작품의 발표가 아닌 작품 자체에 대해 생각하라고. 발표를 하려고 서두르지 말고, 독자를 망각하지 말라고. 그리고 픽션을 쓰려거든 진지성을 가지고 상상할 수 없는 그 어떤 것도 쓰지 말라고. 단지 놀랍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것들을 쓰지 말고, 자신의 상상이 용인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들을 쓰라고. 그리고 문체에 관해서는 어휘의 풍요함보다는 어휘의 빈곤함을 추종하라고 충고하고 싶습니다. 문학 작품에서 흔히 발견되는 도덕적 흠집의 하나를 말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공허성>입니다. 내가 비록 그의 재능이나 천재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루고네스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들 중의 하나는 그의 글쓰기에서 어떤 공허함 같은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 윤관영(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