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칼럼

윤관영<시에 말걸기, 혹은 시비하기>

미송 2010. 3. 1. 09:34

시에 말걸기, 혹은 시비하기 - 윤관영


나는 난해성이 목표가 될 때,

그것은 가장 타기할 만한 악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김현


신인을 등단시킬 때 빠지지 않는 선자의 評語가 있다. ‘실험정신’, ‘패기’가 바로 그 것이다. 역으로 ‘안정’, ‘능숙’은 터부시 된다. 옳은 말이다. 문제는 개성적인 드러냄, 그 자체가 목적이 될 경우다. 시평을 쓰기 위해 문예지를 읽다 보면 모든 시가 <튀기 위한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읽는 사람에 대한 배려나, 소통을 위한 흔적이 안 보이는 경우가 흔하다. 소통을 위한 어떠한 무엇은 개성을 죽이는 독으로 취급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月刊詩誌에 발표된 20여 명이 넘는 시인의 시를 읽겠다는 의도는 그래서 대단한 결심을 요한다. 주목을 난해로 받으려는 시도들이 넘쳐난다. 시가 길어지고 산문이 난해의 형식처럼 간주되고 있다. 김현 선생이 말한 ‘악덕’이란 지적이 떠오를 정도다.   

 

 ‘시의 애매성은, 그것이 의도된 난해성이 아닐 때, 다시 말해 어쩔 수 없는 시의 흐름의 결과일 때, 흔히 강력한 시적 환기력을 갖는다.’ 김현 선생의 이 지적은 그래서 유효하다. 아니 절실하다. 의도가 읽히는 난해는 난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난해를 빙자한 무례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철학적으로는 ‘정직’의 부재에서 오며 기질적으로는 ‘독선’에서 오지 않나 싶다. 관념이든, 상상이든, 몽상이든, 체험이든 시적대상을 최소한 일반화하려는 노력을 포기한, 무대포 정신이 이러한 결과를 불러오고 있다. (이 무대포를 개성이라 믿어야 막무가내가 가능하긴 하다.) 여기서 ‘정직’이 빠졌다고 말하는 것은 나의 무엇에 대한 무엇인지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김수영 시인에게는 과도할 망정 자신의 무엇이 소스였다. 나의 무엇이 아닌 것에 대한 발언은 멀리, 그리고 다양하게 펼칠 수 있지만 그것을 회수하는 것을 포기한 상태를 의미한다. 정직의 부재는 여기서 나온다. 정직의 부재는 사실상 긴장의 부재를 의미하고 긴장의 부재에서는 정직이 자리할 틈이 없다.

 

난해에도 예쁜 난해가 있다. 김현 선생은 ‘어쩔 수 없는 시의 흐름의 결과’를 그 잣대로 삼았지만 화자의 긴장의 끈이 잡혀야 난해도 힘있는 난해가 된다. 그런 면에서 박형준의 지적(창작과비평)은 다시한번 음미해 볼 만하다.  ‘최근 젊은 시인들 사이에서 보이는 낭만적 상상력은 대개 자신의 고통과 관념, 유희에 매몰된 감상의 산물일 때가 많다. 이들의 시에서 나타나는 표현의 화려함과 환유적 사고, 무의식에 대한 과다한 집착은 전시대의 시와 자신들의 시를 구별해내 독자적 미의식을 창출하려는 조급함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잎과 가지만을 보며 앞으로 내달리면서 자기도 모르게 뒤로 모습을 드러낸, 자신의 뿌리를 간과하는 태도는 지나치게 인위적인 시로 연결된다. 중요한 것은 키치든 문화든 기억이든 무엇이든 시인이 그것에 대한 ‘중독자’이자 ‘반성자’(김현)가 되지 않으면, 그 양자간의 거리에서 빚어지는 ‘긴장의 시학’은 물론이려니와 새로운 미적 가치도 태어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긴장의 시학! 좋은 말이다.

먼저 서정과 난해 사이에 그 줄타기를 하고 있는 시를 보기로 한다. (이번 호부터 출전과 시인은 尾註로 처리한다. 시에 대한 편견을 다소나마 줄여보려는 나름의 의도이다.)


1)_「만남의 광장」


내가 오른손을 들자 당신의 왼손이 마술처럼 올라간다.

당신과 나는 가까워져.

아지랑이, 아지랑이,


우리는 하나의 現場을 이룩했는데, 우리는 왜 점점 무능력해지지? 당신은 꿈속의 악어를 생각하지 않고 나는 한가한 남자이기를 그쳤네. 당신은 도주할 수 없고, 나는 혓바닥을 내밀 수 없지.


우리는 모여들었다.

나는 예의 바르게 살아갈 것이며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전방을 주시하지만

내가 실루엣이 되어 당신의 동공을 점령하자 드디어,

당신의 낡은 입술은 열렸다.


안녕.


나는 최후까지 당신의 첫마디를 떠올리지 못하리.

트로트 리듬과 함께 테러리스트의 마지막 눈동자와 함께 타타타 떠가는 헬리콥터와 함께,

인생은 불길한 예언 따위를 기억하지 않지.


광장이 宇宙船처럼 떠오르자, 누군가 있는 힘을 다해 고함을 질렀다.


내가 오른손을 천천히 내리는 순간

당신의 왼손은 아지랑이 속으로

홀연히 사라지고,


 ‘스스로 천변만화하는 오늘의 세계와 시인 자신을 보여주기 어렵다.’는 전래의 서정과 다르게 이 시는 무엇을 구축하고 있는가. 이 시엔 사람을 끄는 분명한 힘이 있다. 그러나 어떤 것도 분명하게 보여주지는 않는다. 시에 접근하는 단서로 그 공간이 ‘만남의 광장’ 이라는 사실을 알고 등장인물이(화자라고 또 딱히 지정하기도 뭣한) 나와 당신, 우리(의 이야기) 라는 사실을 알아도 뭔가 확실하게 그 의미가 이해되지는 않는다. 온점에 유의하며 읽으면 시의 흐름과 분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용이 선명하게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만남의 광장은 현대사회가 인위적으로 조성한 장소. 만남이 이루어지면 그 의미와 장소는 해소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이고, 당신은 다수일 수도 있고 남녀 누구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불특정이며 따라서 우리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만남의 광장이란 공간에서 하나의 현장을 이룩했다고 해도 그것은 전체이기도 하지만 그 전체는 제각각의 종합일 수밖에 없다.

 

손을 들어 접선(괜히 이 말이 타당한 것 같다)하기에 ‘당신의 첫마디를 떠올리지 못’할 수 있지만 ‘안녕.’이란 말은 공히 들어맞는 말일 수 있다. 어쨌거나 광장에 모인 모든 사람(나를 포한한)들의 공통된 특징은 ‘인생은 불길한 예언 따위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다른 모든 내용, 나와 당신의 어떤 다름이나 일치는 제각각한 만남의 여러 변용이다. ‘인생은 불길한 예언 따위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진술이 많은 만남을 통해 얻은 생철학이라면 ‘광장이 宇宙船처럼 떠오르자, 누군가 있는 힘을 다해 고함을 질렀다.’는 만남의 광장에서 얻은 이미져리다. 자꾸만 읽게 만드는 힘, 분명하지는 않으나 묵직한 힘, 이 시에는 있다.


2)_「발견」

 

귀에 꽃 꽂은 채

빈방에

먹구렁이처럼 잔다


봄밤에 취해

널부러진 달빛이여

언젠가 골목에서

귀에 꽃 꽂아주고 입 맞추던

소녀여


이런 밤엔 뿌리내려라

허벅지는 수령이 오래된

옹이가 박힌 떡갈나무가 되고

유방은 방바닥에 계속 흘러내리다

용암처럼 굳어버려라


술 취해 들어온

중년 사내를 위해


먹구렁이처럼 말고 있다

창문은 활짝 열려 있다


비좁은 방바닥

어둠과 빛에 섞인

저 희뿌연 뿌리,

오늘은 봄밤 더위가

백 년 만이라고 하는데

말씀이야


 벚꽃이 절정일 때 차를 몰고 외중방리(구단양)에서 선암계곡으로 들어간 일이 있다. 벚꽃은 서로 가지를 뻗어 꽃터널을 이루었는데, 압사당하는 느낌이 들어 어깨를 핸들에 묻고 차를 몬 적이 있다. 그때, 내 옆엔 댓병 소주가 있었다. 이밤사 아니 취하고 어이하리, 하는 심정이었다. 모든 게 기꺼웠다.

이 시의 ‘봄밤’도 그런 봄밤이다. 그래서 달빛은 널부러지고, 나도 귀에 꽃 꽂은 채 봄밤에 취해 먹구렁이처럼 자는 것이리라. 그래서 중년 사내는 술 취했으며 귀에 꽃 꽂아주고 입맞추던 소녀도 그래서 회억되었으리라. 이런 봄밤엔 대취하지 않을 수 없다. ‘이밤사 아니 취하고 어이하리’ 하는 심정으로 시가 가면 신파가 된다. 그러나 그런 심정에도 이미지는 있다. 이 시에는 빛나는 이미지가 있다.

 

허벅지는 수령이 오래된

옹이가 박힌 떡갈나무가 되고

유방은 방바닥에 계속 흘러내리다

용암처럼 굳어버려라


 ‘이런 밤엔 뿌리내려라’는 열망이 빚은 이 이미지. 열망이 토해낸 투정 같은 바람이 섬뜩하면서도 아름답다. 허벅지가 떡갈나무가 되고 유방이 흘러내려 용암처럼 굳다니… 봄밤엔 그처럼 되어도 좋으리라. 다만 당연한 사실이지만 창문은 열어두어야 한다. 활짝, 문이란 문은 몽땅! 이런 분위기는 혼자 있어야 절절히 느낄 수 있고 또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이 시에는 쓸쓸함이 있고, 축축하다. 뿌리처럼 좀 어둡다.


3)_「신 포도 기제⁰」


포도가 영그는 동안

한때 나는 개였다

한때 나는 늑대였다

한때 나는 고양이였다

포도가 익었을 때

나는 이미 여우였다

“저 포도는 아직 덜 익었어”

너무 높아 딸 수 없는

신 포도를 짐짓 버려 두고

술취한 개발바닥이 되었다가

굶주린 늑대의 침이 되었다가

담을 넘는 도둑고양이 눈빛이 되었다가

번번이 뒤집는 여우 혓바닥이 되었다

그 혀에서 말이 나왔다

이때부터다 맛의 분별점이

혀에서 말로 옮겨 간 것은

담장 저편, 다시 포도가 영글어간다

벌써 내 입에는 침이 고인다

담장 이편, 내게 저 포도는 실 것이다

말이 있자 포도알들이 스스로 시어졌다

단맛과 신맛 사이엔 담벼락이 서있고

포도나무는 아무일 없다는 듯

담 너머 넝쿨손을 건네는 그 때

나는 이미 여우였다


*기제 - (심리학 등에서) 사람의 행동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는 심리 작용이나 원리


무엇보다 이 시는 재미있다. 골계미, 해학 같은 것이 있다. 더욱이 그마저도 대타적인 것이 아니고 자신에 대한 자신의 발언이어서 읽는 맛을 더하고 있다. ‘우화적 상상력’이라 이름할 만한 재미가 이 시 속에 있다. 그러니까 우화를 뒤집는 우화라고나 할까. 재미라고는 없는 세상에 재미있는 시는 그 자체로 커다란 미덕을 내장한 셈이다. 능청!  ‘능청’이야말로 이 시를 끌어가는 어조이자, 또한 방법이다.

고백! ‘고백’도 이 시를 끌어가는 한 방법이다. ‘포도가 영그는 동안/한때 나는 개였다/한때 나는 늑대였다/한때 나는 고양이였다/포도가 익었을 때/나는 이미 여우였다’ 포도가 영그는(‘익는’이 아닌) 동안 ‘개’에서 ‘늑대’로, 또 ‘고양이’가 되었다가 익었을 때는 ‘여우’가 된 고백이 이 시의 전제다. 뭐랄까. ‘고백적 능청!’, 고백을 빙자한 능청이 이 시의 흐름을 끌어가고 있다. 그러니까, 이 네 짐승의 변주가 이 시의 특징이다.

 

 ‘포도가 익었을 때’ 도달할 수 없는 열망을 이기려고 “저 포도는 아직 덜 익었어” 하며 화자는 스스로를 위무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열망을 접을 수는 없는 일. 따라서 그(화자)는 ‘술취한 개발바닥’이 되고 ‘굶주린 늑대의 침’이 되고 ‘담을 넘는 도둑고양이 눈빛’이 되고 ‘번번이 뒤집는 여우혓바닥’이 된다. 여기서 머무른다면 순환적인 행태에 그치고 말 것이 ‘그 혀에서 말이 나’옴으로 인해 전환된다. ‘맛의 분별점이/혀에서 말로 옮겨 가’게 됨으로써 형질을 달리한 순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담장 저편, 다시 포도가 영글어’가는 상황은 이제 체험된(완전한 극복은 아니고) 것이다. 그렇기에 ‘저 포도는 실 것이다/말이 있자 포도알들이 스스로 시어졌’고 ‘단맛과 신맛 사이엔 담벼락이 서있’다는 사실을 감지해낸다. 여기서 또 한 번의 비약이 이루어지니 ‘담 너머 넝쿨손을 건네는 그 때/나는 이미 여우였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이미’가 중요하다. 여우 같이 얄미운, 마무리까지 깔끔한 시. 이 시는 그의 수일한 작품 중의 하나로, 詩論詩로 볼 수도 있다. (친절한 주석은 없는 것이 낫지 싶다.)



4)_「쑥대머리」


제가 다니던 삼선교회엔 유난히 숙이 많았죠

恩淑이, 愛淑이, 良淑이, 賢淑이, 京淑이, 南淑이, 蘭淑이, 美淑이, 貞淑이……

그야말로 쑥밭이었죠 제일 믿음이 좋았던 애는 은숙이,

애숙이는 잠시 나를 사랑했고

양숙이와 현숙이는 정말로 현모양처가 되었죠

경숙이는 지금도 서울에 살지만, 남숙이는

먼 데로 이사갔답니다

난숙이는 청초했고 미숙이는 예뻤는데

지금도 제일 기억나는 애는 정숙이에요

어렸을 때 귤껍질 넣은

뜨거운 주전자 물을 뒤집어썼지만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이 단정했던 아이,

그러던 어느 성탄절에 성극을 하다가

두건과 함께 가발이 홀랑 벗겨진,

울지도 않고 끝까지 마리아 역할을 하고는

그 길로 교회를 떠난 아이, 지금도 어디선가

거지꼴을 한 동박박사들을 기다리는 거나 아닌지요

아니면 마패를 숨긴 어사라도 대면했든지요


이 시가 불러오는 기억이 하나 있다. 가난했던 시절, 말린(사실 말릴 겨를도 없기가 대부분이었지만) 귤껍질을 주전자에 삶아 찻물로 먹던 그 기억. 이 시도 재미가 있다. 알고보면 다 만들어쓴 시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의 맛이 감소되는 것이 아니다. 굳이 한문으로 쓰면서 그 의미에 들어맞게 해설한 것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는 ‘淑’이 ‘쑥’으로 비약된 1차적인 관문이 시를 들어올린다. 내 기억으로도 여학생 이름의 태반이 ‘淑’과 ‘順’이었으며 그 윗세대가 ‘子’가 많았다. 일단 이 시는 그것을 끌어올린 것으로 출발하고 있다. 이장욱이 ‘다른 서정’의 시대를 언급한 것과는 달리 나희덕은 (자신을 변명하는 듯하지만) 전통 서정시를 구축하는 회로로 ‘기억’과 ‘자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시가 지나간 시간과 공간을 수용하는 복잡한 우회로를 감안한다면, ‘기억’과 ‘자연’의 빈번한 채택이 곧 현실의 결여를 낳는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오히려 ‘기억’과 ‘자연’에 대한 제대로 된 되새김질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데 있다. 서정시의 노화(老化)를 막기 위해서라도 ‘기억’과 ‘자연’이 현실과 살아있는 관계를 맺도록 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억에 의존할 때 기억 자체보다는 기억을 드러내는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결핍을 ‘기억’과 ‘자연’을 통해 역상(逆像)으로나마 비추기 때문이다〉(나희덕)고 했지만 여기서는 관음에 가까운 이미지를 기억이라는 물꼬를 통해, 전통적인 서정시 방식이 아닌 ‘쑥대머리’ 귀신형용의 모자이크로 형상화하고 있다. ‘기억’이라는 회로를 통하되 이미지로, - 그리고 새로운 어조로 - 이것이 이 시의 한 특장을 구축하고 있다. 정숙이가 야물딱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존재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래서 울지도 않고 끝까지 마리아 역할을 했겠지만) 여자 이름에 ‘貞’자 만한 억압도 없을 듯하다. 그러고 보니 이름 뒤에 ‘姬’자는 왜 그리도 많았던지, 여자를 여자라 이름한.


 

5)_「유물—순간을 기억하는 뼈」


골수암을 앓아 아홉 살 어린 나이에 죽은

동생을 양지로 옮기려고 무덤을 열었다

팔뼈를 수습하는데

왜 갑자기 자치기를 하고 싶은 것이냐

가늘고 흰 손가락뼈를 수습하는데

왜 자꾸만 토끼풀꽃을 꺾고 싶은 것이냐

동생의 귀밑머리가 그리운 것이냐

내 귀밑머리는 왜 이다지도 허전한 것이냐

엄숙하게 들어올리는 해골은 왜 또 경망스레

떼굴떼굴 굴리고 싶은 것이냐

공놀이를 하고 싶은 것이냐


고스란히 두고 간 것이야

지상에서 누린 아름다웠던 순간들


황천에선 여태껏

‘뼈에 사무친다’는 전보가 한 건도 오지 않았어

간혹 아름다웠던 순간을 기억하는 뼈의 집으로

토끼풀꽃 같은 눈이 송이송이 내릴 뿐이었어

그때마다 동생의 얼굴이 가슴에 사무치고 사무쳤어


 이 시를 보니, 생각난다.

 “더 좋은 데로 옮겨 드릴라고 하는 거니께 놀라지 마셔유, 조상님. 파묘요!”

 큰아버지가 이장을 하면서 묘에다 대고 하셨던 말, 그리고 송판 위에 얹혀져 묶이던 뼈들. 그러나 그것은 나 잘되려고 나 편하려고 날 잡아서 했던 일. 뼈와 아무 연관이 없던, 아니 추억이 없던 나는 무료를 일로 달랬던 것 같다.

 

이 시를 보면 니체(Nietzsche)가 기억술의 가장 강력한 보조수단으로 ‘고통’을 들었던 사실이 실감난다. 여기서 시적대상이 화자에겐 동생이지만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이 교통사고 등 일순간의 재난에 의해 죽었다면 화장을 하거나 애장터에 묻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골수암으로 고생만하다 죽은 자식을 그리하기는 쉽지 않은 일, 그 고통스런 과정 속의 기억을 모두가 내장하고 있으므로 그 고통은 추억을 환기하는 요소가 많고 또 깊을 수밖에 없다.

 

내가 이 시에서 주목하는 것은 그런 안스러움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죽음에 대한 엄숙주의가 아니고,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드러내는 장난스런 방식은 주목받을 만하다. 죽음이 불러오는 그 대상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그리움, 죽음 자체에 대한 엄숙한 마음 그 이면에 있는, 스스로 느끼기에도 당혹스러운 이율배반적인 엉뚱함—그에 대한 장난끼—에 대한 고백이 이 시에는 있다. ‘팔뼈’를 수습하는데 ‘자치기를 하고 싶은’ 충동, ‘손가락뼈’를 수습하는데 ‘토끼풀꽃’ 꺾고 싶은 충동, 그리고 ‘해골’을 들어올리는데 ‘굴리고’ 싶고 ‘공놀이’를 하고 싶은 충동 들은 어쩌면 지나친 슬픔이 누른 그 이면이 아닌가 한다. 축제가 사회적 관습적 억압을 푸는 계기이듯이 여기서 동생의 이장은 그래서 축제 같은 성격을 띤다. 골수암으로 죽은, 그렇기에 지닌 체험이 육화된 죽음을 다시 대하는 것이기에 엄숙으로는 사실상 이길 수 없는 지경인지도 모른다. (시적 방식이면서도 시적 상황이 밀고 가는 자연스런 상황이기도 하다.)

 

‘사무치는’ 슬픔이면서도 사무치게 느껴지지 않게, 슬픔이되 슬픔 아닌 것처럼 하기는 쉽지가 않다. 여북했으면 ‘시치미떼기’가 시를 육화하는 한 방식일까. 여기선 시치미떼기라기보다 슬픔을 드러내는 역의 방식, 그러니까 밝음으로 보여주는 슬픔 같은 것을 본다.

   


6)_「윤중호 죽다」


그런데 ‘죽’은 대체 어디서 굴러온 글자일까

윤중호 석 자 뒤엔 아무래도 낯설다

‘지읒’이 ‘기역’에 가 닿기까지

길가엔 어허이 에하 상두 소리 울릴까

저 산 모양 ‘죽’ 자 날망에는

고봉밥처럼 황토 봉분 외로울까

‘지읒’과 ‘욱’ 사이 나지막한 양지녘

고통도 시름도 이제는 내려놓고

가벼이 문지방 넘어가는 넋은 있으리

‘주’의 복판 웅덩이엔

차마 못다한 말들 썩어 고여 우울하리

우울하여 마침내 긴 주름 아득한 ‘지읒’ 이겠네

‘주’와 ‘기역’ 사이 어느 고샅에

산동네 자취의 날들 있으리

떠나간 아버지와 삭발하는 여동생 있으리

눈물 훔치며 돌아나오던 옛동네도 숨어 있으리

그 고샅 끝에서 새 옷 갈아입고

쌀 세 알 물고

다락 같은 일주문 ‘기역’ 자 문턱에 덜컥 걸려 넘어지면

그대 문득 저승이리

이승엔 왈칵 쏟는 뜨거운 국솥같이 통곡 있으리

기어이 일어나버린 저 ‘죽’ 자의 식은 정강이를 붙잡고

감꽃처럼 툭 떨어진 몸 허물 앞에서

어머니는 우신다

그저 우신다


시인 윤중호는 지난 겨울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시집 세 권이 있다.


 ‘죽음’이 시가 될 때는 어떤 사람의 죽음이냐가 중요하다. 죽음의 내용이 중요하다. 그것은 화자의 상태에 미치는 영향 정도를 좌우하고 형상의 내용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허나, 어떤 죽음이 시가 되려할 때, 시로 육화될 때 화자에게 절박하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는가. 따라서 어떤 ‘죽음’이 시가 될 때는 드러내는 방식이 중요하게 된다. (내용은 거기서 거기다. 거기서 거기가 아니라고 주장하면 시가 화자의 절박성만 더해지고, … 영웅적인 요소를 더해야 되고 … 그러나 모든 죽음은 보기 따라서 영웅적이 아니기에 영웅적이다.)

 

이 시는 간단하다. 제목을 ‘죽다’로 붙이고(시의 제목이 중요하다는 걸 다시한번 보여주고 있다.) ‘ㅈ’과 ‘ㄱ’ 자체에 대한 탐구와 더불어 ‘ㅈ’과 ‘ㄱ' 사이, ‘주’와 ‘ㄱ’ 사이, ‘ㅈ’와 ‘욱’ 사이를 변주하면서 고인의 삶에 대해 노래한다. 산 내용은 거기서 거기나 여기엔 분명 화자를 울리는 내용이 있다. 이러한 형식의 새로움이 ‘산동네 자취의 날들’이나 ‘떠나간 아버지와 삭발을 하던 여동생’이 있던 가계사, 그리고 ‘눈물 흘리며 돌아나오던 옛동네’를 떠난 청년기의 가출, ‘그저 우시는’ 현재적인 어머니—일상적 혹은 과거적 사실이 형상의 옷으로 작용하게 하는 것이 형식의 새로움이다.  그러나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그것이 진심이고 존경하는 내용은 많이 보았으나 이러한 형식적 진심은 보지 못했다. 좋은 시다. 그래서 해설이 짧다.



7)_「봄날-주꾸미회」



앵두꽃도 살구꽃도 피었다 일러라

그 사이 복사꽃도 배꽃도 다 피었다 일러라

할머니 마루 끝에 나앉아 앞산을 보고

등이 간지러운지 자꾸만 등을 긁으신다

올해는 철이 일들었나 보다라고 말하는 사이

그 앞산에도 진달래 분홍 불이 붙는다


앞대 개포가에선 또 나직하게 뱃고동이 운다

집집마다 부뚜막에선 왱병*이 울고 야야, 주꾸미

배가 들었구나, 할머니 쩝쩝 입맛을 다신다

빙초산 맛이 입에 들척지근하고 새콤한 것이

달기가 햇뻐꾸기 소리 같다


아버지 주꾸미 한뭇을 사오셨다

어머니 초고추장을 버물여 또 부뚜막의 왱병을 기울이신다

주꾸미 대가리를 씹을 때마다 톡톡 알이 터지면서

아삭아삭 씹히는 맛, 아버지 하신 말씀,

니 할마씨는 이 맛을 두고 어찌 갔을거나


환장할 환장할 봄날이었다

집집마다 부뚜막에선 왱병이 오도방정을 떨고

앞대 개포가에선

또 나즉히 뱃고동이 울었다.


*왱병- 가전 비법으로 대물림하여 내려온 식초의 눈을 살리는 촛병.


그러고보니, 죽음은 맛을 잃는 것. 아니 맛을 보지 못하는 신세를 말한다. 그래서 죽음을 두고 ‘밥숟갈 놓았다’라고 하나 보다.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또 다른 측면의 죽음을 두고 말함이다.)  ‘니 할마씨는 이 맛을 두고 어찌 갔을거나’ 하는 그것은 진정한 안타까움이나 그보다는 이 맛을 보는 자들의 미안함이 섞여있는 그리움이다. ‘아버지 주꾸미 한뭇을 사오’신 것도 그래서 일 것. 

 

이 시는 원경에서 내려다 보는 그윽한 맛을 준다. 높이서 보면 갯벌도 보이고 들어오는 배도 보이고 왱병이 오도방정을 떠는 집집이 보인다. 참 편안한 풍경이 천천히, 아니 느리게 하루치 흘러가는 듯하다. 하루치의 봄 서정.

 

봄날, 화자는 앵두꽃도 살구꽃도 피었다 ‘일러라’ 복사꽃도 배꽃도 다 피었다 ‘일러라’ 하면서 시의 장을 연다. 봄은 또 봄이라 할머니의 등마저 자꾸 간지럽게 하는 것이라서 ‘올해는 철이 일들었나 보다’는 선언을 불러오고 그 선언이 진달래에 불을 붙게 한다. 등이 간지럽고 진달래 불 붙고 늙은 할마씨가 입맛조차 다시게 만든다.

 

‘달기가 햇뻐구기 소리 같다’는 이 맛에 끌린다. ‘주꾸미 대가리를 씹을 때마다 톡톡 알이 터지면서/아삭아삭 씹히는 맛’ 그 맛을 보고 싶게 만든다. 그러니까, 그것이 이 시가 환기하는 힘이다.

계절이, 특별한 음식(주꾸미)이 불러오는 죽음의 이미지가 개포가를 내려다 보고 있다.  

환장할 환장할 봄날, 주꾸미 얼은 주꾸미 전골이라도 먹으러 가야겠다. 아, 환장하겠다. 

음식을 가지고 쓴 시를 여러 편 보았지만 그 중 좋은 시에 꼽힐 것 같은 시다.


 

8)_「해변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긴 칼 한 자루를 갖고 싶었다

푸른 달빛처럼 빛나는 칼


물결들이 닦아내고

모래알들이 날을 갈아

해변이라는 길고 긴 칼이 완성되었다

부드러운 곡선과 시퍼런 날을 가진

녹슬지 않는


바다와 연결된 푸른 몸에는 사시사철

아름다운 새들이 맨발로 날아다니고

위험한 줄도 모르는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닌다


무엇을 베어낼 것인가

때때로 길게 드러누운 칼이 빛나곤 하지만

해변은 쏴아-쏴아- 간곡한 음악을 연주할 뿐

몸을 열어 텅 빈 조개껍데기나 부드러운 해조 같은

마음을 토해낼 뿐


저 푸른 칼

바다의 새순을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좀처럼 제 무딘 칼날 보여주지 않는다


이 시를 보았을 때, 낙산사에서 낙산비치호텔 쪽을 바라보았던 광경이 떠올랐다. 해변이 어떻게 칼로 태어나는지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아, 칼 같은 바다. 하얗게 밀고 밀리는 파도는 칼날처럼 보인다. 무협지로 치면 검이나 도는 아니고, 반월도인데 뒤에 손잡이가 있어서 양손에 쥐고 쓰는, 아니다 복어의 배처럼 길고 투명하게 누운 길고 큰 칼이다.

 

시에서는 어떤 이미지를 잡으면 그 나머지는 어떻게 해도 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이 시가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해변이 ‘칼’이라는 이미지로 본, 이 사실 하나로 이 시는 완성된다. 나머지는 거기서 거기다. 그만큼 그 이미지의 수일함이 이 시를 끌어간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칼은 함부로, 쉽게 태어난 것이 아니다. ‘물결들이 닦아내고/모래알들이 날을 갈’았기에 가능한 해변이라는 길고 긴 칼이 완성되었기에 그렇다. ‘부드러운 곡선과 시퍼런 날을 가진/녹슬지 않는’ 칼은 분명 매력적이다. 사실상 녹이 슬어야 갈아쓰고 그래서 더 빛나는 것이 칼이지만 이 칼은 써서 녹슬지 않는 칼이자 제 몸 안에 몸 밖에 살아있는 것들을 살아있게 하는 유기체이다.

 

무엇을 베어낼 의도가 없는 칼!

 ‘저 푸른 칼/바다의 새순을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좀처럼 제 무딘 칼날 보여주지 않는다’

 이 마무리는 걸린다. 사족 같다.   



9)_「상처 4」


소나무 숲길을 지나다

솔 잎내 유독 강한 나무를 찾으니

둥치에 깊은 상처를 가진 나무였네.

속내를 내보이는 소나무에서만

싱싱한 육신의 진정을 볼 수 있었네.


부서진 곳 가리고 덮어주는 체액으로

뼈를 붙이고 살을 이어 치유하는지

지난 날 피맺힌 사연의 나무들만

이름과 신분을 하나 감추지 않네.

나무가 나무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네.


나도 상처를 받기 전까지는

그림자에 몸 가리고 구름처럼 살았었네.

소나무가 그 냄새만으로 우리에게 오듯

나도 의외의 피를 흘리고 나서야

내가 과연 누구인지 알게 되었네.

우리들의 인연도 천천히 숲으로 돌아가네.


 수박이 잘 익었는지 여부는 일단 색깔로 판명한다. 색 자체가 선명하면서도 다른 색의 부분과 분명하게 구분되면 일단 상품으로 친다. 다음으로는 두드려 본다. 좀 아는 사람은 누르면서 소리를 듣는다. 다음으로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본다. 요즘이야 그럴 필요조차 없다. 안 익으면 바꿔주고 또 반 갈라서도 파니 수박이 잘 익었는지 하는 판단이 무용하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과정은 대상에 대한 파악이라는 점에서 보면 결코 간과할 일 만은 아니다. 시각과 청각, 후각으로 이어지는 이미지의 흐름, 깊이 라는 점에서 후각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상처도 보이는 상처는 작다. 들리는 상처도 작다. 그러나 그 상처가 후각의 형태로 감지될 때는 심각한 상태이기에 가능하다. (심각성을 잘 느끼는 만치 잘 마비되는 후각이기에 인간은 살아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 시에서도 그렇다. 화자를 사로 잡은 것은, ‘나무를 찾게’까지 만든 것은 상처를 냄새로 풍기는 소나무였다. 구부러진 소나무가 멋지게 보인다는 것은 외형을 보는 것이고 사실 그 멋진 부분은 그 나무의 상처였다. 그 상처는 나무가 ‘체액으로/뼈를 붙이고 살을 이어 치유’한 결과이겠지만 당시의 상처는 냄새를 일으켰을 것이다.

 

문을 만들 때 부러진 소나무 옹이를 잘라다 박으면 아주 훌륭한 손잡이가 된다. 전체가 부러진 가지 말고 상처를 입고 줄기에 붙은 부분이 짧게 남아 그 가지 쪽으로 잎이 자라는 발현이 차단될 때 부러진 가지는 상처를 견디는 일만 골몰하게 된다. 이 부분이야말로 썩지도 않으면서 좋은 모양을 낸다.

 

‘나도 상처를 받기 전까지는/그림자에 몸 가리고 구름처럼 살았었네.’

 

나무는 상처를 가리지 않지만 스스로 치유를 한다. 가릴 수 있을 상처는 아주 작은 상처다. 그 만큼 여유가 있고, 체면을 버릴 정도로 급박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상처가 가려도 그 냄새가 퍼져나갈 정도면, 후각에 감지될 정도의 상처면 심각한 상태다. 다만 인간은 상처를 입되 늘 그 상처를 ‘의외의 피’ 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의외라고 믿어야 시도 되고 살아지기도 하긴 한다.) 그런데 그 상처야말로 ‘내가 과연 누구인지 알게 되었네’라는 고백을 불러오니 상처가 준 그 역이다. 허나 그것은 상처를 입어보지 않은 자의 말. 상처, 상처는 무슨, 그냥 사는 것 자체가 상처인 것을. 상처라고 말한다면 이미 엄살일 수도 있다.



10)_「혼몽(昏懜)의 집」


떠돌이 복서 무하마드 알리가

죽음의 링에서

그 집을 발견했다


맞고 터지고 정신을 잃다 보면

들어가 쉬고 싶은 방문이 보인단다


나, 지금 그 앞에 와 있다


시대의 슬픈 관능 위에서

더불어 궁핍했던 지상의 촉수(觸手)들아


아프고 병든

인간들의 극장에서

맹인가수처럼

우리는 노래했다


세상의 혼란과 사랑의 목마름을

저 완강한 삶의 공허 앞에

주저앉은 사람을, 인생을, 이별을


이제 목도 쉬고

듣는 이도 없다

나도 들어가 편하게 눕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하마드 알리가

링 위에 누우며 했던 말을 떠올린다


너를 먼저 보내고 싶었는데

내가 와서 이렇게 기다리는구나


이 시의 화자는 아직 괜찮다. 엄살도 있다. ‘맹인가수처럼/우리는 노래했다’가 그렇다. 나의 노래가 아닌 ‘우리’라서 그렇다. ‘내’가 아닌 ‘우리’를 얘기한다는 것은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말이 된다. ‘시대의 '슬픈 관능’을 얘기하고 ‘궁핍했던 지상의 촉수’를 얘기한다는 점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내가 긍정하는 것은 긴 마라톤을 완주하고 누운 주자처럼 그 극은 분야와 상관없이 같다는 것이다. 특히 목숨을 건 몸의 도박은 더욱이 그렇다. ‘맞고 터지고 정신을 잃다 보면/들어가 쉬고 싶은 방문이 보인단다’가 공히 느끼는 접점이다.


  ‘나, 지금 그 앞에 와 있다’


지상의 촉수였던 이들은 지금 삶이 문제다. 생존, 생존 말이다. 그러니 ‘너를 먼저 보내고 싶었는데/내가 와서 이렇게 기다리는구나’ 하는 자책은 극한을 추구하다 생의 바닥을 본 자 만이 할 수 있는 말이겠지만 어찌 그 만의 말이겠는가. 상처가 냄새가 되어 손가락 사이를 빠져 나가는 절망을 맛보지 않은 자, 외치는구나. ‘너를 먼저 보내고 싶었는데/내가 와서 이렇게 기다리는구나’ 저주나 탄식도 여유의 다른 말일 수 있다. 이 시는 엄살이지만 엄살 만은 아니다.

 

남의 삶을 꺾으려면 회의하지 말고

오직 그 행위의 목적만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삶은 늘 정당하고

아름답고 평화로울지니

 

「남의 삶을 꺾으려면」부분, 조은, 『현대문학  6』


상처를 입히는 자의 특성은 목적만 생각한다. 당하는 자는 그렇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늘 절감 만하며 사는 존재다. 후자는 반성만 많이 한다. 사실, 반성 외에는 별로 할 것이 없다.


동물의 왕국에서

큰 나무 잎새를 말아넣는 기린이

어딘가 기형적으로 보이는 것은

한번도 그 울음소리를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함부로 토해내지 못한 말들이

차곡차곡 쌓여

길어졌을

 

「기린 울음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부분, 고영서,『愛知』 05년 여름호


기린의 울음을 듣고 싶어졌다. 그 발톱이 보고 싶다. 그러니까 용불용설이, 거꾸로 쓰지 않아서(울지 않아) 목이 대신 길어진 셈? 이 상상력!


거름을 못 얻어먹고 늦되어

이파리들을 다 오므리지도 못하는 봄동은

아무리 얼어도 썩지 않고

오히려 그것 때문에 이파리가

얼음장처럼 두꺼워지지 않더냐


그것은 이미

꽃이라 부르지 않아도 꽃이었던 것을

봄은 알기에 겨울을 밀어낸다

 

「大寒에 서서」부분, 박형진, 『창작과비평』05년 여름호

 

이 시엔 모처럼 보는 남성적인 힘이 있다.

봄동 겉절이에 밥 비벼 먹고 싶다, 바가지 밥으로. 어머니께서는 바가지밥 보고 지집 내쫓는다 하셨는데…….


평론가들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김수영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잘은 모르지만 그의 말이 상당한 세월이 지났는데도 영향력을 미치는 데 대한 반감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 힘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는 거다. 그의 말은 알리가 링에서 누우면서 뱉어낸 말과 같은 ‘절실함’, 그리고 ‘치열성’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내게도 밉다. 달리 인용할 사람의 말이 많지 않아 좀 많이 매달리게 된다.)


‘詩人이라는 혹은 詩를 쓰고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큰 부담이 없다. 그런 의식이 적으면 적을수록 事物을 보는 눈은 더 순수하고 명석하고 자유로와진다. 그런데 이 의식을 없애는 노력이란 똥구멍이 빠질 정도로 무척 힘이 드는 노력이다.’


지금 시인들이 ‘똥구멍이 빠질 정도로 힘드는 노력’을 하고 있는가? 묻고 있다, 당신과 나에게. 그리고 질책하고 있다. 진짜 ‘난해한 시’와 ‘不可解한 시’를 구분하면서(「生活現實과 詩」) 양심이 없이 기술만을 구사하는 시인들이 ‘詐欺를 세련된 현대성이라고 오해하고’(「難解의 帳幕」)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사기 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대와 나는.

 

되지 않는, 의도적 난해는 역겹다. 대책없는 서정시(?)는 — 무대책하다고 해야 옳을/형식에 대한 고민이 전무한 — 짜증난다. 이장욱의 말을 인용하면서 평을 마친다. 

 

 ‘지금은 서정의 시대가 아니다. 오늘의 삶과 세계는 전래의 서정적 어법으로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다. 이제 후위(後衛)에 남은 서정시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의 도원(桃源)을 이루는 것 정도인지도 모른다. 전래의 서정은 마음의 신화를 구축하는 방법이며, 이것으로는 전체나 본질 같은 관념과 무관하게 스스로 천변만화하는 오늘의 세계와 시인 자신을 보여주기 어렵다.’


1) 이장욱, 『문학과사회』05여름호

2) 박형준, 『문학사상  6』

3) 채풍묵, 『창조문학』05년 여름호

4) 권혁웅, 『現代詩學  6』

5) 원무현, 『시와사상』05여름호

6) 김사인, 『현대문학  5』

7) 송수권, 『愛知』05년 여름호

8) 박서영, 『시인세계』05년 여름호

9) 마종기, 『시안』05년 여름호

10) 김형수, 『시와반시』05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