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이승희, 「갈현동 470 — 1번지 세인주택 앞」

미송 2015. 11. 8. 09:42

 

 

 

 

어떤 지명들은 기억을 소환하는 장치이지요. 몸 담아 살았던 과거의 장소들을 떠올리는 것은 쓸쓸한 일이지요. 장소들이 육화된 친밀성이 휘발되어버린, 아주 창백한 그림자와도 같이 가슴을 아리게 하는 기억들을 머금기 때문이지요! 기억으로 호명된 장소와 현재적 삶 사이에는 엄연한 ‘간격’이 있습니다. 이 시가 제시하는 “갈현동 470 1 세인주택 앞”이라는 지명은 현재의 것, 아직은 과거 속으로 잠겨들기를 거부하는 장소지요. 저녁이 옵니다. “아리랑 슈퍼 알전구”에 불이 들어오고, 세상에는 “저녁이 아닌 것이 없는 저녁”이 날개를 접고 내려앉네요. 이 저녁에 사과 궤짝 의자에 앉아 오락에 열중하는 소년과 수학학원 간 딸애를 기다리는 애비가 서 있네요. 막 과거로 진입하려는 이 골목 속으로 “딸아이가 불빛을 따라 헤엄쳐”오겠지요. 이 저녁 풍경은 곧 지상의 가장 따뜻한 온기를 지닌 채 과거를 향하여 쏟아지고 말겠지요.  20140928 <문학집배원 장석주>

 

 

갈현동 470-1 골목
-이승희 시인에게

 

시를 쫓다 보니 어느새 시인은 저만치 가고 보이지 않는다. 글자크기를 폰트 10으로, A4용지 열여섯 쪽은 족히 나올 분량의 시를 한꺼번에 읽다가, 불빛에 모여드는 하루살이처럼 집중하게 되는 시란 시인이란 과연 어디에 확실히 남겨지는 것일까, 생각한다. 시와 시인 시인과 독자 사이에 시의 맛이 살고 있다. 막막한 틈새로 계절과 무관하게 눈발이 날린다. 눈길 위로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떠나간 당신은 내일의 만남을 위해 징검다리가 되었을까.

안녕!
내 몸에서 꽃폈던 당신의 입술자국이 희미해지며 물결무늬를 닮아가는 지금
눈길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떠나가는 당신. <관계- 삼월의 눈에 바치는, 일부>

물속에 집을 짓는 이는 눈 속에도 집 한 채 짓고, 물기가 고인 자리로부터 눈이 녹는 그 때로부터 사랑의 관계와 시의 존재 이유를 노래한다. 모든 경계의 문턱을 허문다. 구석이 구석을 지우고 지워진 문장을 읽는 당신 문장 속에서 꽃들의 한 생이 다시 시작된다 말한다. 몸의 지도를 따라 빗방울 속으로 들어가는 저녁 무렵 그는 빗방울 속에서 그리운 얼굴을 만나고 있을까. 안녕을 고한 후로도 오랫동안.

항상 구석의 풍경이었던 시간들이 모래알처럼 흩어지며 구석을 지워낼 때 바람의 지워진 문장을 읽어주던 당신. 그 문장 속에서 꽃들의 한 생이 다시 시작되고 내 몸이 기억하는 빗방울의 무늬 속으로 걸어가는 저녁이었다. <비를 맞는 저녁, 일부>

어느 여름날 그리고 아무도 듣지 않고 보지 않아도 혼자 말하고 빛을 뿜어내는 텔레비전 한 대가 있는 헌 책방에서 그는 혼자였다. 시인에게 결핍은 필수 감각. 울림을 줄 수 있는 따뜻한 목소리 역시 필수 조건이다. 상징으로서 그의 시에 따라 다니는 불빛은 푸성귀처럼 매일 자라나는 식물성이다.
남은 자들의 그늘을 키우는 힘이 되어, 세상을 조금씩 들어 올릴 수 있을 때까지 전 생애가 씨앗으로만 굴려진다고 해도 <식물기간, 일부>

 

기다림 끝에 설령 봄이 오지 않는다 하여도, 광합성 활동을 멈추게 할 수 없다 노래하는 씨앗의 의지. 갈현동 470-1 골목에 가면 그 단단한 씨앗인 계집아이 하나가 팔랑 뛰어가는 걸 볼 수 있을까.

 

가만히 얼굴을 대어보면 안다. 불빛 속에서는 어떻게 비가 내리는지, 어떻게 내 몸이 말라가는지, 먼지 같은 어젯밤이 왜 계속되는지. 쓸쓸할 땐 촛불을 켜보면 안다. <촛불, 일부>

 

빛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한 '어둠' 속에서, 진정성이 느껴지는 촛불을 켠다. 창가를 서성이다만 나는 쓸쓸하게 돌아오리라.

순하고 둥글고 허기에 아파보이는 얼굴은 표면의 그것과 반대다. 그의 시에 살고 있는 화자들은 온통 아프고 몹시 가난하고 끝나지 않을 듯한 슬픔이 느껴진다. 물방울과 빛과 꽃 투성이다. 강요하는 대상이 결핍 자체일 수도 있다. 둥굶과 각진 슬픔의 원형은 서로 닮아 있다.

 

둥근 돌이나 구슬을 깨뜨려보라. 그 속에 존재하는 무수한 각, 그 날카로움, <둥근 것들의 다른 이름, 일부>

 

진주의 상처를 보는 듯 한 구절. 근원적인 모습이다.


따뜻한 울음을 보내고 나서도 그에게는 천형처럼 굳어진 마음의 수몰지구가 남아 있다. 열여덟 살의 쪽방 속으로 들락거렸던 계집애. 추억 하나에 불빛, 시절 하나에 조숙했던 종말, 시절과 불빛 사이 영원히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동정童貞이 어쩌면 시를 발송케 하는 원동력일지도. 그의 불빛의 시원일지도.
          
그 불빛들
나무들의 손가락 사이에서
물방울처럼 흘러내렸고
아직도 무거운 외투를 걸치고 앉은 시절
(중략)
한 시절이 가서 다시 오지 않았다.

 

<시절, 불빛>

그가 그리워하는 것은 소녀뿐이 아니라 다시 오지 못할 시절의 채송화 꽃씨보다 작고 작은 이야기. 무료한 얼굴위로 천진하게 달려들던 열여덟 계집아이의 주근깨만큼이나 귀여운 까만 목소리다. 각진 속엣 것들로 인해 더 많은 눈물이 필요했던 나와 시절과 발자국 없는 소녀의 그림자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둥글어져 갈수록 연신내 약국 앞 포장마차라는 현존 공간에서 소주잔을 기울이게 되는 그. 술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비틀거리는 사람의 어깨를 잡아주려고 그는 손을 호주머니 속에서 꺼낸다. 세상에 아픈 이가 어디 나 혼자뿐이랴, 하면서. 저녁 불빛을 따라 걷다 누구의 집인지 모르지만 불 켜진 창문 속으로 손가락을 넣어본다. 물컹 붉은 피가 묻는 손. 다시 그리움이 시작되고 끝내 그는 절망에 항복한다. 말라죽은 고양이 같은 달빛이 전봇대 아래 버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란다. 따뜻한 손을 지녔다고 해서 울림이 긴 목소리를 가졌다고 해서 그 안에는 희망만 있을 거라 속단하지 말자. 그는 다 말하지 않았다. 불빛에 대하여, 눈물과 슬픔의 그림자에 대하여, 씨앗으로만 굴려지고 있는 시인에 대하여. 내일은 어디쯤서 서성이며 낯선 골목을 헤매고 있을지, 누가 알랴.      

갈현동 470-1 골목 / 이승희

 

어둠을 이해하는 건 불빛이다. 그래서 밤새 빛으로 남을 수 있는 거다. 저녁 불빛을 보면 안다. 어떤 사랑도 저보다 아름다운 스밈일 수는 없다.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밝아지는 이유들. 불빛이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걸 굳이 화해라고, 용서라고 표현할 일이 아니다. 빛 속에서 어둠이 만져지거나, 어둠 속에서 빛이 만져지는 건 다 그런 이유이다. 늙은 불빛 한 정물처럼 오랜 물길을 흘러 집의 지붕을 적시고 사람의 집은 이제 물방울 같은 불빛 하나하나로 도랑을 이루며 흘러간다. 서둘러 불을 켜는 사람을 보면 눈물나게 고맙다.

 

20101002-20151108 오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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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가을 즈음이었던가? 이승희 시인의 쪽지를 받은 기억이 있다. 어디선가 나의 흔적을 보았던 시인은, '어디가 많이 아프신가요?, 슬픈 일이 많으신가요?' 하고 물었던 것 같다. 뭐라 대답을 했는지, 나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도 비통한 것은 널려있었고 변한 것은 한 개도 없었을 터인데, 나는 그것들이 기억나지 않는다. 왼쪽 뺨이 유난히 패인 그의 옆모습이 기억났듯, 지금도 패인 한 구석 어렴풋 떠오르는 것이 내 과거의 한 조각일 뿐, 그와의 짧은 대화는 기억나지 않는다. 비 오고 기온도 뚜욱 떨어져 외출할 의지도 움츠러드는 주말. 그래도 도서관에나 가 볼까 동작을 취하고 있다.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그의 얼굴이 반갑기만 하다. 시를 먼저 보고 얼굴은 나중에 보던 10년 전의 습관은 변했다. 시 보다 관상을 먼저 보게 되는 요즘의 나, 눈 속에서 따스했던 얼굴들을 만나러 도서관에나 가 볼까 싶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