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빨리 걸어라 발발아, 나의 말은 지름이 점점 커져서
넓이를 측정할 수 없는 비문이 되고 있다
교수님 말은 비문도 법문도 아니에요 걸어 다니는 성기예요
코를 킁킁거리며 π는 이교수가 뱉는 말을 핥는다
제로의 그림자 원은 각(角)의 나라로 망명하고 싶다
─ 함기석,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와 발발이 π」에서
일찌감치 수학을 포기했어도 수학이 추상적인 개념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건 안다.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를 보면서 더 잘 알게 됐다. 특정한 맥락과 관습화된 용례 안에 갇혀 오히려 무한한 상상력을 제한하고 불통의 근거가 되기도 하는 언어의 한계성이 추상적 개념을 언어화한 수학적 수사와 만나 오히려 편안하게 전달되고 자유롭게 표현되는 장면은 놀라운 경험을 준다. 수학은 전적으로 논리와 독립된, 결코 논리에 의해서만 근거지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데 생각을 함께한 힐베르트처럼 논리를 넘어서는 감각이 시를 통해 전달된다.
─ 출판사 서평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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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음이의어 비문의 의미도 여럿이겠다. 상상력을 동원하면 웃을 이유도 그러하겠다. 쉽게 미끄러져 거리를 측정하기 쉽지 않고, 동그마니 갇혀있기도 싫어하는 문장들이란 정말, 의지할 것이라곤 비난과 냉소뿐이 없는 요즘 우리의 자화상을 닮았다, 할까. 수학과 미술에 능한 자를 젤 부러워하는 내가 'π' 라는 발음을 어렴풋이만 더듬는 건 정상, 제로의 그림자가 원이라는 걸 금새 알아차리는 건 수학에 대한 미련을 일찌감치 버리고 국어를 사랑한 댓가. 아무튼, 이 분의 시는 독자로 하여금 웃어라! 울어라! 하지 않아서 좋다. 울어야 할까 웃어야 할까 고민하게 만들어서 고맙다. 가을비가 내리는 밤, 11월의 나무들 아래서 오로지 앞만 보고, 뒤는 절대로 안 돌아보고 걸어가던 청소부 K가 생각나는 밤, 반쯤 남은 오우텀 리브스들이 비에 젖어 잠잠해지겠구나 생각이 드는 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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