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이재무<출구가 없다>

미송 2010. 11. 25. 22:57

출구가 없다 / 이재무

사람아, 사람아,
통발에 든 물고기같이
평생을 수인으로 살다가
죽어서야 자유로운 사람아,
늦가을 빈 밭
홀로 남은 수수깡처럼
깡말라 수척해진 영혼아,
사람 안에 갇혀
출구를 잃어버린 사람아,
탕진의 세월 속
황홀한 고통을 앓는 사람아,

[시작노트]
속이 텅 빈 벽에 못을 박으면 쉽게 들어간다. 그런데 쉽게 들어간 못은 쉽게 빠질 수 있다. 하지만 단단한 벽에 못을 박을 때는 여간 수고로운 게 아니다. 한사코 벽이 못의 틈입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벽을 파고들어간 못은 벽과 한 몸이 되어 살아간다. 그러다가 못이 벽을 떠날 날이 혹여 돌아온다면 이제는 오히려 벽이 품고 있는 못을 내주지 않으려 애를 쓴다. 관계란 그런 것이다. 속도만이 능사가 아닌 것이다. 사랑의 속도는 느릴수록 믿음이 간다.

1958년 충남 부여 출생. 1935년<삶의문학>으로 등단. 시집 <섣달그믐>
<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몸에 피는 꽃><위대한 식사><푸른 고집><저녁6시> 등,
난고문학상, 편운문학상, 윤동주문학상 등 수상.


<시감상>
만남이 쉬워질수록 기다림은 희미해진다. 아날로그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기다림의 거리와 속도를 익히고 싶다. 거리를 걸으며 거리를 생각한다. 우리의 만남이 얼만큼 빨라졌는지 얼만큼 가까워졌는지, 그래서 기다림이란 시간이 불필요해진 사람들은 광속으로 달려온 사랑에 행복한 것인지. 모래알 같은 사람 속에서 사람을 부르고 있는 시인은 속도를, 나는 거리를, 생각한다. ‘벽과 못’의 조화란 자칫 선정적인 시어로 돌변할 수도 있겠으나 희번득한 빛이 사라진 공간에선 무한의 시간이며 자연스런 합체가 아닐까 싶다.


 

 

물속의 돌 / 이재무

 

 

동글동글한 돌 하나 꺼내 들여다본다

물속에서는 단색이더니 햇빛에 비추어보니

여러 빛 온몸에 두르고 있다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동글납작한 것이 두루두루 원만한 인상이다

젊은 날 나는 이웃의 선의,

반짝이는 것들을 믿지 않았으며

모난 상(相)에 정이 더 가서 애착을 부리곤 했다

처음부터 둥근 상(像)이 어디 흔턴가

각진 성질 다스려오는 동안

그가 울었을 어둠 속 눈물 헤아려본다

돌 안에는 우리가 모르는 물의 깊이가 새겨져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물이 그를 다녀갔을 것인가

단단한 돌은 물이 만든 것이다

돌을 만나 물이 소리를 내고

물을 만나 돌은 제 설움을 크게 울었을 것이다

단호하나 구족한 돌 물속에 도로 내려놓으며

신발 끈 고쳐 맨다

 

'내가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승일 <부담>  (0) 2010.12.07
장옥관 <허브 도둑>   (0) 2010.12.02
이병률 <인기척>   (0) 2010.11.21
정문 <가을의 외길>  (0) 2010.11.08
기형도 <빈집>  (0) 2010.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