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말이 되려는 찰나
- 이제니의 『아마도 아프리카』(창비, 2010)를 읽으며
조연정
이제니의 시를 읽다 보면 시인이 되고 싶어진다. 아니, 어쩐지 나도 시인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참으로 이상야릇한 착각과 흥분에 사로잡힌다. 이건 그녀의 시를 폄하하여 하는 말이 절대 아니다. 그녀의 애잔한 말사랑에 동참하고픈 강렬한 욕망쯤 되겠다고 일단 말해 두자. 물론 이제니를 따라, ‘요롱’, ‘뵈뵈’, ‘홀리’, ‘밋딤’처럼 우리가 이미 한 번쯤 소리내 보았겠으나 아직 “단 한 번도 제대로 말해 본 적이 없”(「페루」)는 그런 단어들을 고안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저절로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분홍 설탕 코끼리’나 ‘독일 사탕 개미’처럼 우리의 머릿속에 그다지 가깝게 존재하지 않는 단어들을 이어붙여 본다고 시가 될 리도 없다. 말이 안 되는 말들을 모아 놓으면 시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제니는 “그게 바로 시야”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페루」) 쓸 수 있는 게 시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정확하게 말하면, 말도 안 되는 이상한 말을 다정한 말이 되게끔 말해 보고 또 말해 보는 것이 바로 이제니의 작법인 듯하다. 그래서 그녀의 시에서는 외국어처럼 낯선 말들이 모국어처럼 정다워지는 신기한 일이 발생한다. 말도 안 되는 말을 어떻게 말이 되게 할 수 있을까. 예컨대, ‘뵈뵈’나 ‘홀리’라는 소리는 어떻게 말이 될 수 있을까. 무언가의 ‘이름’이 되는 방식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해야 할 텐데, 거꾸로 이제니는 특정한 무언가를 지칭하는 이름으로서의 기능을 말로부터 박탈하는 방식으로 시를 쓴다. 시인이 되지 못한 우리가 생각하기에 자고로 시란, 낯익은 대상에 색다른 이름을 붙여 그 대상이 달리 보이도록 만드는 작업이다. 대상과 이름의 남다른 조합으로 인해 대상의 숨겨진 면모가 드러나고 더불어 언어의 혁신마저 일어나게 되는 것이 시쓰기 작업의 마술이다. 쉽게 말해, ‘일본’이라는 대상을 ‘자퐁’이라는 프랑스식 이름으로 달리 불러 보는 것이 대개의 시가 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이제니는 “노랫말을 흥얼거리”듯 “극동의 자퐁으로 가자, 극동의 자퐁으로 가자”(「별 시대의 아움」)라고 별 생각 없이 반복해 말하며, 거기서 어떤 이미지를 떠올려 보려는 독자의 시도를 무색하게 만들어 버린다. 귀여운 어감의 ‘자퐁’만이 우리에게 은밀히 남는 것이다. ‘뵈뵈’든 ‘홀리’든 ‘밋딤’이든 이제니의 시에서는 어쩌면 소리의 질감만이 중요하다. 이들은 그 누구의 이름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들이다.
이제니의 첫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에서는 이처럼 익숙한 대상을 낯설게 표현해 보려는 일반적인 시의 경향을 거스르려는 시도가 보인다. 대신 그녀는 낯선 소리와 친밀해지려는 작업을 먼저 한다. 낯선 소리에 일정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채 그것을 그 자체로 친숙하게 만들어 보려는 것이다. 외국어를 배우던 경험을 떠올려 보면 어떨까. 가장 먼저 우리는 어색한 소리들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그 소리에 정해진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된다. 한국어가 모국어인 우리가 보기에 ‘블랭크’가 ‘공백’이 되고 ‘자퐁’이 ‘일본’이 되는 것은 애초에 자연스러운 일은 아닌데, 무수한 반복을 통해 그 둘이 한 몸처럼 붙어 버리게 되면, 외국인인 우리에게도 ‘블랭크’라는 소리와 ‘공백’이라는 뜻의 결합은 당연한 것이 된다(물론 소리를 의미로 바꾸는 번역의 단계가 존재하지만). 결국 ‘블랭크’라는 소리로부터 ‘공백’이라는 의미를 떠올리지 않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제니의 시는 ‘블랭크’가 (어떤 의미 없이도) 저 홀로 친숙한 소리로 들리게 되려는 찰나, ‘공백’이라는 뜻과 결탁하기 직전의 순간, 바로 그 때 씌어진다. 어떤 소리가 무언가의 이름이 되지 못하게 경계하면서도 그 소리 자체를 다정하게 여기려면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분절된 소리인 말들을 갖고 “소리가 노래가 되지 않는 무구함”(「그늘의 입」)을 추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이제니는 이렇게 한다. 우선, “소리내 말하지 못한 문장을 공책에 백 번 적는다.”(「피로와 파도와」) 말하자면 반복이다. 이제니의 시에는 유난히 반복이 많다. 2000년대의 가장 빛나는 등단작 중의 하나로 기억될 만한 「페루」(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에서도 그녀는 “페루 페루. 라마의 울음 소리. 페루라고 입술을 달싹이면 내게 있었을지도 모를 고향이 생각난다”라고 썼었다. 하나의 소리가 무언가의 대표 이름이 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의 속성을 떠올리며 수없이 다른 이름으로 그것을 바꿔 불러 보는 일이 필요하다. 그런 식으로 수많은 의미들이 덕지덕지 붙어 하나의 소리는 대표 이름의 자격을 부여받는다. ‘페루’를 떠올리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우리의 기억과 지식을 총동원하여 다른 이름들, 이를테면 ‘고산지대’, ‘라마’ 등을 생각해 내야 한다. 그러나 이제니는 그저 “페루 페루”라며 같은 소리만 반복하고 있다. 엄연히 존재하는 무언가를 위해 이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름을 반복하다 보면 “있었을지도 모를 고향”이 떠오른다는 식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니의 말마따나 이제 ‘페루’에는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게 된다. 애초에 ‘페루’가 지시하는 것은 없으니 말이다. “나를 달리게 하는 것은/ 들판이 아니라 들판에 대한 상상”(「처음의 들판」)이라는 다른 시의 구절도 비슷한 맥락에서 읽힌다.
「뵈뵈」에서도 같은 일이 발생한다. 화자는 끊임없이 ‘뵈뵈’를 호명하며 ‘뵈뵈’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 주려 하고 있다. 그러나 ‘뵈뵈’는 잘 듣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뵈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뵈뵈”라는 구절로 시가 끝난다. 첫 번째 ‘뵈뵈’는 호명이지만, 두 번째 ‘뵈뵈’는 아니다. ‘뵈뵈’를 부르며 “마음이 바빠진 나는 이 얘기 저 얘기 저 얘기 이 얘기 생각나는 대로 마구마구 지껄였”지만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단지 ‘뵈뵈’였던 셈이다. 애초에 하려던 말은 그저 ‘뵈뵈’뿐이었던 것이다.
이 같은 반복에 동참한 우리에게도 ‘페루’와 ‘뵈뵈’는 이제 그저 익숙한 소리의 덩어리로 남는다. 이제니의 시를 읽다 보면 교재도 사전도 없이 외국어를 독학하는 기분이 든다. 아니, 전혀 기억에도 없지만 모국어를 스스로 깨우치던 순간이 떠오르는 듯도 하다. ‘페루’는 그저 ‘페루’, ‘뵈뵈’는 그저 ‘뵈뵈’, 이런 식으로 의미는 모르지만 귀에는 익숙해진 말들이 무수히 생기게 되는 것이다. 다정한 소리들이지만 소통에 무익한 말들을 제 곁에 쌓아 두는 이러한 일은 과연 즐거운 일일까, 불안한 일일까. 아무런 의미 없는 “고아의 말”(「고아의 말」)을 읊조리는 일은 짜릿한 일일까, 무서운 일일까. 모르긴 몰라도 그것은 불가피한 일이기는 하다. 그녀가 말하듯 “검은 펜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면 검은 펜을 잃어버린 것”(「편지광 유우」)이므로, 즉 우리가 어떤 소리를 어떤 의미에 고정시키는 순간 결국 그 소리는 특정한 의미를 위해 희생되고 동시에 수많은 의미들 역시 하나의 소리 때문에 사라지는 일이 생겨나므로, 우리의 말사랑이 진심이 되려면 소리와 의미를 헤어지게 하는 일이 필요하기는 한 것이다. 제대로 만나기 위해 헤어지는 일이라고나 할까. 이미 안정된 소통의 체계 안에 안착한 우리에게, 이렇게 소리의 ‘무구함’을 되찾고자 하는 일은 불안하고 두려운 일이기보다는, 오히려 이전의 습관과 결별해야 한다는 점에서 허탈한 일이고 독한 의지 없이 불가한 일이다. 셀 수 없이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 제 몸의 일부인 양 친밀해진 누군가와 당장 헤어져야 하는 것처럼 아득한 일이다.
이제니의 시에 작별의 장면들이 흔한 것, 그리고 그 장면들에서 쓸쓸한 단호함이 짙게 배어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랑하기에 헤어진다는 일상적인 말은 대체로 위선이지만, 이제니가 보여주는 말사랑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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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절한 이별시의 하나로 기억될 만한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에서도 ‘나’는 등 돌린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는 ‘너’를 향해 “안녕 잘 가요”라는 말만 반복한다. “그 이상은 말할 수 없는 말들일 뿐. 그래 봤자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별의 순간에조차 “우리의 안녕은 이토록 다르거든요”라며 불행한 불일치를 확인한 것보다도, “다정한 척을 세 번도 넘게” 하며 이별을 기정사실화하는 장면이 더 슬프다. 마주 볼 용기도 없어 등 돌리고 흐느끼는 ‘너’를 향해 다정한 척을 하며 잔인한 이별을 고해야 하는 ‘나’의 심사는 어떤 것인가. 아마도 “우연처럼 만날 것”(「편지광 유우」)을 알기에 그러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이제 남은 일은 말하지 못한 말들을 삼키거나 뜻 없는 문장들의 뜻 없는 의미를 뒤늦게 알아차리는 일뿐”(「공원의 두이」)이다. 이제니의 시가 본격적으로 발랄해지는 것은 이처럼 뜻 모를 소리의 의미를 뒤늦게 알아차릴 때다. 그 의미란 이런 것이다. “완두는 완두 완두 하고 울”고 “접시는 접시 접시 하고 운다”(「완고한 완두콩」)는 소리의 자기 지시적 능력에 관한 것.
이제 이제니는 “무의미한 습관” 같은 말과 “결연한 의지”(「네이키드 하이패션 소년의 작별인사」)로 결별하고 말의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는 일을 한다.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원시의 말은 주술이었으며 수행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원시의 말에는 비유도, 반어도, 역설도 없었다. 증오의 대상을 향해‘죽어라’ 말해 놓고 정말로 그가 죽었다고 순진하게 믿었던 것이 원시인이다. 이제니의 후렴구들은 이 같은 원시인의 말을 닮았다. 그녀의 시에서 소리와 의미가 분리된다는 말은 더 정확히 말하면 소리와 의미의 자의적 결합이 해체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더 강력한 결합을 위한 전제가 된다. 소리와 의미가 화학반응을 일으켜 혼연일체가 되는 지점, 이제니의 말놀이는 이처럼 순진무구한 상태를 지향한다. “요롱이는 말한다. 나는 정말 요롱이가 되고 싶어요. 요롱요롱한 어투로 요롱요롱하게”(「요롱이는 말한다」)라고 그녀가 적을 때 이것은 비단 어떤 리듬을 추구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요롱요롱’ 반복함으로써 뭔지도 모를 ‘요롱이’가 정말로 되고 싶은 것이다. “모퉁이를 돌면서 모퉁이라고 발음하고 모퉁이라고 발음하면서 모퉁이를 돈다”(「모퉁이를 돌다」)라고 쓸 때도,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 숫자를 세지 마 세면 셀수록 늘어날 거야”(검버섯)라고 쓸 때도 이제니는 언어의 신비로운 주술성을 의식하고 있는 듯하다.
이름과 대상의 연결이 일종의 계약을 통해 성립되었다는 것, 그래서 그 만남이 불완전하다는 것은 우리가 고안한 언어체계 자체의 한계이자 매력이다. 그 느슨한 결합이 강력하게 고정되면 어쩌나 노심초사하는 것이 시의 역할이고, 자유로운 연상 능력을 활용하여 의외의 조합을 만들어 보는 것은 시의 재미다. 이제니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그녀는 느슨한 결합을 해체하여 더욱 강력하고 신비로운 결합을 스스로 만들어 보고자 한다. 이제니의 시는 대상과 이름 사이의 관계가 교란되는 순간보다는 둘 사이에 새로운 만남이 생성되는 지점에 놓이는 것이다. 그래서 어쩐지 쓸쓸하기도 한 이제니의 시는 대체로 즐겁게 읽힌다. 이제니는 모국어가 외국어처럼 낯설어지는 순간이 아니라, 낯선 말이 모국어처럼 정다워지는 순간을 포착한다. 사실, 언어와 관련된 우리의 경험 중 가장 짜릿하다 할 만한 것은 익숙한 말이 새롭게 들리는 순간이기보다는 이상하고 낯선 소리와 자연스레 친해지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어느 샌가 우리는 이미 익숙한 모국어 체계 안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프리카』는 잃어버린 그 기억, 즉 말이 말이 되는 것을 최초로 경험했던 순간의 기억을 재현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인다. 외국어를 새롭게 배우는 경험만으로는 다시 느낄 수 없는 그 짜릿함 말이다. “어미 없이 혼자 서 있는 말”(「아마도 아프리카」)을 만들어 보면서 말이다. 그렇게 누구한테도 배운 적 없는 “나만의” 말을 만들어 보며, 우리가 예전에 누렸지만 이제는 완전히 상실한 말의 환희를 되찾아 보는 것이 시가 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일까. 이제니의 시를 읽다 보면 정말로 시인이 되고 싶어지는 것이다.
《문장웹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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