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하지 마라, 반응하라.
창조하지 마라, 연결하라
- 첫번째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물에 비친 그림자가 실체를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붓을 들고 있는 것이 그림자입니다. 근대가 가지고 있는 인과론적 생각이라는 것은 원인과 결과가 분명히 있는 것이고, 이것은 실체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거꾸로 생각해 보자는 것이지요. 우리가 무엇에 의해 그려지고 있다는 생각이지요. 말하자면 이것입니다. 일차원은 이차원의 그림자입니다. 점은 면의 그림자지요. 그러면 이차원 면은 삼차원 원의 그림자입니다. 그렇다면 삼차원 공간에 있는 우리는 분명히 그 위의 차원, 즉 사차원의 그림자일 것입니다. 사차원은 또 오차원의 그림자일 테지요.
우리는 모두 자기가 사고하는 실체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식으로 따져 보면 우리는 분명히 누구의, 무언가의 그림자의 세계입니다. 마찬가지로 오차원은 육차원의 그림자고, 그렇게 다음 차원의 그림자, 그림자가 계속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실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근대가 그렇게 강하게 주장하는 확고한 이성, 실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집입니다. 이제까지의 집이란 사각형으로 나눠져 가구가 딱딱 들어갈 수 있는 박스 안에서 살았지요. 이것이 근대건축이 낳은 산물입니다. 우리가 흔히 마주칠 수 있는 풍경들, 박스형 건물들은 산업혁명의 산물입니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시골에 지어진 움막과 같은 곳에 모든 것들, 농산물들이 모여졌는데, 산업혁명으로 기차가 놓이고 도시가 만들어지면서 모든 것들이 도시로 집적되게 됩니다. 도시에서는 이제까지 전에 없던 물량들을 쌓아 놓을 수 있는 공간들이 생겨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 건축, 즉 사람이 사는 집이란 건 모름지기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풍요의 뿔과 같은 장식을 하고, 그림을 걸고, 화려한 벽지로 장식을 하곤 했는데, 물건을 쌓아 놓는 집에는 그런 장식이 필요없었지요. 장식이 필요없는 사람이 살지 않는 창고 건물이 기차역 부근에 처음으로 생겨나게 됩니다. 전에 없는 무미건조한 건물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19세기 말 그 당시 건축가들이 그 형태를 보면서 열광합니다. 당시에 건축가들은 사회주의, 기계를 통한 대량생산 시스템 등의 영향으로 아무 장식도 없는 창고 건축에서 미래를 보았던 것이지요. 드디어 건축가들은 박스 형태를 가지고 건축을 만들기 시작했고, 이것이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도시 풍경이 되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앉아 있는 이런 공간들은 다 창고에서 나온 것입니다. 인간이 물건처럼 취급되기 시작한 거지요.
저는 그것이 근대라고 생각합니다. 합리와 효율을 위해 인간을 제거한 문명이지요. 근대건축은 인간의 삶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가장 기능적으로 물건들을 잘 쌓아 놓을 수 있는 형태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앉아 있는 이 강의실은 설계 때부터 몇 석의 공간인지 정해져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디를 통해 어떻게 들어올 것인지 건축가들은 다 시나리오를 짜놓았고, 여러분은 여러분의 의지가 아닌 건축가의 의지에 따라 부지불식간에 지금 그 자리에 앉게 된 것입니다. 앞줄, 옆줄 맞춰서 기능을 소화하기 위한 도구처럼 앉아 있는 것입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지금 우리의 삶은 결코 인간의 삶이 아닙니다. 지금 현대건축, 모더니즘이라는 것은 인간을 위한 삶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건축가들이 강변을 산책하며 우연히 본 하루살이들의 비행을 보며 그것을 집으로 만든 것입니다. 하루살이들이 교미를 하기 위해 하늘을 떼지어 나는 것을 전자신호로 감지한 것을 그대로 공간으로 만든 것이 이 집입니다. 여기서 사람이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모더니즘의 논리 알고리즘이라는 것들은 기능에 충실하기 위해서 나왔는데, 이 알고리즘이 기능 이상의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히틀러의 전속 건축가인 알베르트 스피어가 설계한 오스트리아 빈의 재건축 풍경입니다. 모든 도로는 방사형 내지 격자형으로 짜여 있고, 거기에 의사당을 상징하는 거대한 돔 형태의 건물이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관장하고 있는 형태입니다.
건축가 램쿨하스가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읽고 재현한 파논티콘 건물입니다. 죄수들을 수용하는 교도소입니다. 죄수들의 방은 감시자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감시자는 한자리에 앉아 빙 둘러보기만 하면 됩니다. 효율적인 감시를 위해 원형이라는 기하학적인 형태가 선택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대형 쇼핑몰은 우리에게 물건을 선택하도록 설계된 것이 아니라 물건이 우리를 선택하도록 설계됩니다. 계획적인 쇼핑을 하려면 그런 대형 쇼핑몰에 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필요에 의해 물건을 사는 게 아니라 물건이 나타남으로써 필요해지는 것이지요.
이것은 분당에 설계된 다세대 주택입니다. 앞서 본 파논티콘 건물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 모더니즘 건축은 오로지 사람들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잘 배치할 것인가 하는 것이 관심입니다. 시대의 풍자인데요,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모두율이 나타나서 공장생산을 위한 인간신체의 스탠더드를 제시합니다. 아까 이야기한 감시와 처벌의 역사, 광기의 역사, 정신병자들의 수용에 대한 문제와 여기 분당의 최고급 집합주택은 근대가 기획하고 있는 것이 과연 인간인가? 인간의 관리인가? 하는 것을 잘 말해 줍니다. 이 집합주택이라는 것이 교도소의 평면도와 거의 다름없지요. 근대건축에서 이야기하는 기능이라는 문제를 단적으로 나타내 줍니다.
그에 반해서 이것은 서울의 고지도를 길만 따서 재현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셔서 아시겠지만 이 곳에 격자형은 찾아보려고 해도 볼 수가 없습니다. 단지 물길과 사람들이 다니는 길로 인해서 꾸불꾸불한 모양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양은 1394년에 정도전이 정확한 계산에 의해서 세워진 계획도시입니다. 지금의 도시계획과 방법이 다른 것입니다. 문제는 도시를 만드는 방법이지 무엇이 진보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말레이시아에서는 <와와산 2020>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신도시를 계획할 때 우선 불도저로 땅을 밀어 건축물을 짓고 남는 곳에 나무를 심는데, 지금 말레이시아에서는 나무부터 먼저 심습니다. 열대우림 기후로 묘목을 심으면 20년 만에 밀림이 된다고 합니다. 밀림 사이사이에 건물을 짓고, 밀림과 밀림 사이의 이동수단은 소음이 적은 모노레일로 연결하는 프로젝트로 2020년이면 완공된다고 합니다.
이 그림을 좀 더 자세히 보면 지금의 경복궁, 청계천, 세종로입니다. 스피어가 설계한 도시와는 엄청나게 다른 방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울의 모든 길은 복개된 길들입니다. 그 길들을 뜯으면 실개천이 나옵니다. 서울은 옛날에는 무수한 개천이 흐르고, 개천의 이 쪽과 저 쪽은 조그만 다리로 연결되는 아름다운 실개천 도시였습니다. 운하가 흐르는 중국의 도시와 유럽의 도시와는 상당히 다른 풍경이었을 테지요. 우리는 근대화라는 명분 아래 이 독특한 풍경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과연 근대는 이렇게 무차별적으로 적용되어도 좋은 만병통치약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것은 르코르뷔제라는 건축가가 설계한 빛나는 도시 설계안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르코르뷔제가 설계한 대로 삶을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르코르뷔제는 근대건축의 거장으로 불리는 사람인데 파리를 이렇게 재설계하겠다는 것입니다. 파리가 과밀도로 밀집하니까 그런 것들을 다 모아 고층빌딩을 만들고 남는 공간에는 녹지를 만들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다행히 파리는 이렇게 계획되지 않았지만 서울은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건물이 점유하는 땅의 면적을 줄이고 대신에 고층빌딩을 만들어 좀 더 많은 녹지를 제공하겠다는 기획인데,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은 녹지를 만들 공간에 자본의 이익을 위해서 다시 고층빌딩을 짓게 되지요. 그 결과 건물은 더 빽빽히 들어서고, 녹지는 더 줄어들지요.
그래서 이렇게 걸어다니는 도시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도시 전체가 더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동하는 거지요. 인구 40만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도시로, 여기 삐죽삐죽 나와 있는 것이 다리입니다. 만약에 원주가 먹고살기 좋다면 40만이 사는 이 도시가 성큼성큼 걸어서 원주로 와서 원주에 뿌리를 내려 지하수나 자원을 소모하고, 이것이 다 소모되면 다른 도시로 가서 자리를 잡습니다. 자연에 대한 착취, 서양이 자연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여기까지 인간의 상상력이 나아갑니다. 영국으로 대표된 제국주의는 군사침략, 식민지 등을 통해 자원을 뽑아 본국에 이익을 가져다 주었는데, 이것은 아예 도시가 걸어가 그 자원을 뽑아 다 소모한다는 겁니다. 그러곤 다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겁니다. 다분히 제국주의적인 발상이지요.
《문장웹진 12월호》
'평론과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익대를 감싼 '외부세력'?…그들의 유쾌한 연대 (0) | 2011.01.16 |
---|---|
인왕산 시인, 이제야 맨얼굴을 보여주네! (0) | 2011.01.12 |
조연정 <말이 말이 되려는 찰나> (0) | 2010.12.24 |
문숙 <현실의식과 낭만적 시세계> (0) | 2010.12.06 |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 귀가 막힌 것과 기가 막힌 것 (0) | 2010.1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