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가 수상하다 / 정진규
지난해 늦가을 시인 문태준과 경상도 청도 갔다가 씨 없는 감을 실컷 먹고 왔다 보고 왔다 씨가 없다니! 청도의 감나무들은 모두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열매만 주렁주렁 매달아 주고 자취를 감춘 서방들을 어디다 감쪽같이 하나씩 숨겨두고 있는, 불륜 아니라 무슨 애국지사들의 아내들 같았다 청도의 가을은 그렇게 바알갛게 익어 있었다 없는 감씨로 가득 차 있었다 청도엔 숨어 있는 사내들의 무슨 결사(結社)가 우글우글했다 미구에 일 낼 것 같았다 수상했다 운문사 가는 길, 길가에서 씨 없는 감을 세 개째 그리고 덤까지 하나 더 먹으면서 씨가 없이 씨가 보존되다니! 이건 신격(神格)이다 나의 감탄사가 소나기로 일어섰다 마침내 운문사 들어 나는 그만 노랗게 기절했다 거기도 씨 없는 감들이 우글우글했다 파르란 비구니들이 우글우글 독경하고 있었다 자비의 결사(結社)들로 가득 차 있었다 결사를 돕는 모성(母性)들이 도적처럼 우글우글했다 청도 감씨는 모두 벼락 감춘 금강(金剛)들이다
시작노트 = 청도의 늦가을은 씨 없는 감으로 바알갛게 가득 차 있다. 이 씨 없는 감나무가 방외로 나가면 씨 있는 감나무가 된다고 한다. 별난일이다. 운문사 영덕 스님께 안부 올린다.
정진규 = 1939년 경기도 안성 출생. 1960년 《동아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마른 수수깡의 평화』 『연필로 쓰기』 『뼈에 대하여 』『본색』『몸詩』『 알詩』등 한국시인협회상 월탄문학상 현대시학 작품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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