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 704 - 김영승
밍키가 아프다
네 마리 새끼가 하도 젖을 파먹어서 그런지
눈엔 눈물이 흐르고
까만 코가 푸석푸석 하얗게 말라붙어 있다
닭집에 가서 닭 내장을 얻어다
끓여도 주어보고
생선가게 아줌마한테 생선 대가리를 얻어다 끓여 줘 봐도
며칠째 잘 안 먹는다
부엌 바닥을 기어다니며
여기저기 똥을 싸 놓은 강아지들을 보면
낑낑낑 밍키를 보며 칭얼대는
네 마리 귀여운 강아지를 보면
나는 꼭 밍키의 남편 같다.
<1987년>
해설 -
김영승(49)은 반성의 시인이다. 그는 술이나 잠에서 반쯤 깬 반성(半醒)의 시인이고 기존의 서정시로부터 반 옥타브쯤 들떠 읊조리는 반성(半聲)의 시인이다. 가난과 무능으로 일그러진 욕망의 고백을 일삼는 반성(反性)의 시인이고, 구도자적 치열함으로 당대와 스스로를 부정하는 형이상학적 반성(半聖)의 시인이다. 그는 이 모든 반성의 삶을 돌이켜 살피며 반성(反省)한다. 반성하는 기록자, 반성하는 반항인, 반성하는 백수(白手), 반성하는 주정꾼, 반성하는 폐인, 반성하는 시인이 바로 그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반성시는 취언(醉言)이고 포르노이고 일기이고 철학이고 종교이기도 하다.
'밍키'는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강아지 이름이다. "놀랍고 분(憤)해 죽겠다는 듯 밍키가 짖는다/ '저젓……영키야!'/ 하며 어머니가 소리치고 나서 웃는다// 영승이를 부르시려 한 건지/ 밍키를 부르시려 한 건지// 하긴 나를 밍승이라고 부르면 또 어떠랴"(〈반성 764〉), "우리 식구를 우연히 밖에서 만나면/ 서럽다// 어머니를 보면, 형을 보면/ 밍키를 보면/ 서럽다"(〈반성 673〉)에서처럼, 그는 스스로를 반성할 때 슬쩍 자신을 밍키에게 얹어놓곤 한다.
이 시에서도 병들고 구차한 밍키의 모습에 자신의 삶을 비춰보며, 스스로가 밍키의 남편 같다며 너스레를 떤다. 밍키도 아닌, 밍키의 남편 같다는 데서 날카롭고 쓸쓸한 유머는 더해진다. 밍키에 대한 사랑은, 설움과 누추함 속에 살아가는 스스로에 대한 동병상련일 것이다. 실은 아내도 없이 상처투성이로 뒹구는 백수의 외로움과 고독과 소외를 얘기하려는 것이리라. 그가 동병상련하는 것은 구차한 강아지, 밍키만이 아니다. 발로 눌러 끄는 선풍기(〈반성 743〉)나 똥통에 빠진 슬리퍼 한 짝(〈반성 827〉)이나 만신창이가 된 풍뎅이(〈반성 608〉)에게도 마찬가지다. "나는 늘 아름답습니다./ 자신있게 나는 늘 아름답습니다./ 그러기에 슬픈 사람일 뿐이지만/ 그렇지만 나는 갖다 버려도/ 주워갈 사람 없는 폐인입니다."(〈아름다운 폐인〉)라는 그의 자조와 위악과 오만은, 이렇게 '바닥'을 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리라.
그는 자신의 시를 "훔쳐보기만을 하는 변태성욕자처럼/ 자기자신과 세계에 대한 불연속적 보고서의 작성자로 전락한/ 사실무근한// 인간과 인간사와/ 그리고 '나'라고 하는 개체의 일들을/ 왜곡되게 기록한 것// 내가 인정할 수 있는 서정시"(〈반성·서(序)〉)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이렇게 반성의 끝을 향해 치달았던 그의 시는 개인과 젊음이 차압당한 폭력적이었던 80년대에 대한 저항이자, 그 회복을 위한 자존과 실존의 고해성사일 것이다. 우리 시사에서 드물게도 외설시비를 불러일으켰던 《반성》은 '아름다운 폐인'의 경지에서 '시인됨' 혹은 '시됨'의 가능성을 새롭게 모색한 시집이라 할 수 있다.
<정끝별 시인>
사랑 / 박형준
오리떼가 헤엄치고 있다.
그녀의 맨발을 어루만져 주고 싶다.
홍조가 도는 그녀의 맨발,
실뱀이 호수를 건너듯 간질여 주고 싶다.
날개를 접고 호수 위에 떠 있는 오리떼.
맷돌보다 무겁게 가라앉는 저녁 해.
우리는 풀밭에 앉아있다.
산 너머로 뒤늦게 날아온 한 떼의 오리들이
붉게 물든 날개를 호수에 처박았다.
들풀보다 낮게 흔들리는 그녀의 맨발,
두 다리를 맞부딪히면
새처럼 날아갈 것 같기만 한.
해가 지는 속도보다 빨리
어둠이 깔리는 풀밭.
벗은 맨발을 하늘에 띄우고 흔들리는 흰 풀꽃들,
나는 가만히 어둠속에서 날개를 퍼득여
오리처럼 한번 날아보고 싶다.
뒤뚱거리며 쫓아가는 못난 오리,
오래 전에
나는 그녀의 눈 속에
힘겹게 떠 있었으나.
<2002년>
해설 -
어느 독자가 박형준(42) 시인에게 시를 왜 쓰느냐고 물었다. 그가 독자에게 되물었다. 밥은 왜 먹나요? 허기져서 먹는다고 독자가 대답했다. 저는 아름다움에 허기져서 시를 써요…. "내가 말해 놓고도 그 말이 그럴싸했지만 술기운이 빠져나가면서 점점 멋쩍어지고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고 박형준은 어느 산문에서 쓰고 있다. 허기가 적나라한 순간에조차 문종이 위의 살구꽃잎처럼 아스라하게 아름다운 것이 박형준의 시다. '홍조가 도는 그녀의 맨발'처럼 적나라한, 참 아뜩한 사랑이다.
수면 아래서 힘겹게 발을 놀리고 있을 오리의 맨발에서 연인의 맨발로 살포시 저녁 빛이 건너온다. 잔잔하게 흔들리는 물결. 시인은 연인의 맨발을 '실뱀이 호수를 건너듯 간질여 주고 싶다.' 감각적이고 사랑스러운 스킨십인데, 거기엔 아직도 부끄러운 소년시인이 들어있는 듯하다. 그는 연인을 사랑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연인을 장악하지 않는다. 사랑하므로 연인을 조심조심 바라보고 살포시 따라간다. '두 다리를 맞부딪히면/ 새처럼 날아갈 것 같기만 한'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연인을 바라본다. 이 사랑의 운명은 그가 아니라 연인에게 달려있다. 흔하게 회자되는 남녀 관계의 줄다리기 같은 것은 여기에 없다. 모든 사랑의 권력을 남김없이 연인에게 드린 이 사랑. 아름답지만 너무 저자세인 거 아냐? 하지만 어쩌랴. 나는 그녀의 눈 속에서만 예쁜 오리로 헤엄칠 수 있는 걸! 당신의 눈 속이 내 삶터인 걸! 의미를 결론짓지 않고 일부러 열어놓은 마지막 시행으로 인해 사랑은 순환을 시작한다. 사랑에 관한 결론만 빼고, 사랑에 관한 모든 아름답고 섬세한 감각들이 살포시 다시 열린다. 실뱀이 발등을 스쳐가는 그 감각으로.
60년대 후반 가난한 농촌에서 아홉 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박형준은 형 누나들을 좇아 인천으로 올라와 학창 시절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가난한 시골이나 도시 변두리에 발목이 잡혀 있는 사람들 속에서. 그래서일까. 박형준의 시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존재들은 쓸쓸하고 아름다운 '저녁의 무늬'를 가지고 있다. 아련한 소멸의 감각, 저녁을 닮은 사람들 속에서 미미하게 두근거리는 아침을 예감하는 이것은 그에게 있어 생의 감각이기도 하다. 탄생처럼 아름다운 무늬를 갖는 소멸, 이것은 또한 그의 연애의 감각이기도 하다. '空中이라는 말/ 참 좋지요/ 중심이 비어서/ 새들이/ 꽉 찬/ 저 곳// 그대와/ 그 안에서/ 방을 들이고/ 아이를 낳고 /냄새를 피웠으면'(〈저곳〉 부분)
<김선우 시인>
낙화, 첫사랑 - 김 선 우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2007년>
해설 -
통일신라 성덕왕 때의 일이다. 강릉 태수로 부임하는 순정공을 따라가던 수로부인이 벼랑에 핀 철쭉꽃을 보고 꺾어 달라고 말했다. 아무도 감히 나서지 못하는데 문득 소를 몰고 가던 노인(견우노옹)이 나타나 꽃을 꺾어 바치며 노래를 부르니 이것이 향가로 전하는 헌화가(獻花歌)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은 끝내 벼랑으로 간다. 수로부인이 원했던 꽃은 그 절체절명의 벼랑 끝에서 확인하는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랑이 벼랑에 이르러 꽃 한 송이가 됐고 그 꽃이 막 떨어지려 하고 있다. 이 시의 화자는 지금 두 겹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중이다. 한 겹은 지나온 길이고 다른 한 겹은 벼랑에 다다른 시간이다. 그는 공간을 떠나 기억을 통해 영원의 시간으로 이동하는 사랑을 바라보고 있다. 꽃이 떨어지는 이별의 순간, 그는 '내 사랑의 몫'을 알므로 '수선스럽지'않겠다 한다. 이 이별은 범상하지 않아서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갖는' 이별이다.
'그대'는 '그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바람의 얼굴'이거나 꽃의 얼굴이 되어 내 속에서 '추락'하려고 한다. 그리고 '나'는 그대보다 먼저 추락해 '강보'를 펼치는 자기 희생적 사랑을 통해 오히려 자신을 살린다고 한다. 이것은 '그대 없이 나는 없는 것'을 아는 사랑의 가장 숭고하고도 높은 경지이다. 언제부터인지 너는 나였기 때문이다. 그대와 나는 그리하여 서로 물들어 시간이 끊어놓지 못하는 영원한 사랑의 갈피 속으로 스밀 것이다. 이때 '그대'를 받는 '강보' 또한 벼랑의 다른 이름이다. 그곳에서 꽃이나 바람이 되어보지 않고 어떻게 강보를 펼 수 있겠는가.
강릉에서 나고 자란 김선우(38) 시인은 이 시대 최고의 사랑시인이다. 시집 《도화 아래 잠들다》, 《내 몸 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등을 통해 그녀는 사랑이 두 연인을 구속하지 않고 자유케 하는,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사랑을 통해 실존적 자아를 완성하게 되는 높은 사랑의 경지를 노래해 왔다. 시인은 사랑을 "죽을 만큼 사랑하는데 구속하지 않고 자유로운 것, 내가 너를 사랑해서 네가 자유로워지는 것, 내가 너를 사랑해서 내가 자유로워지는 것, 그래서 우리가 서로를 살릴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하기에 '아프지 마, 목숨이 이미 아픈 거니까/ 아파도 환한 벼랑이 목숨이니까'(〈무서운 들녘〉)라며 사람이 타고난 운명을 위로하고, '스스로 있는 그대여, 떠나가셔도 좋습니다.// 불두화 무심하니 서럽습니다 불두화 무심하니 참 좋습니다'(〈칠월의 일곱 번째 밤〉)라며 만남과 헤어짐을 '자재(自在)한 것'이라고 따뜻하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장석남 시인>
원시(遠視) / 오세영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 나이의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멀어지는 일일 뿐이다.
네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1992년>
해설 -
'나이 듦'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기까지 넘게 되는 고비가 있다고 한다. 한동안은 자신의 원시(遠視)를 감추게 된다고. 눈앞이 가물거려도 깨알 같은 글씨로 쓰인 레스토랑 메뉴판을 멀찍이 들고 보는 일 같은 건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 그렇게 갈등하는 시기를 지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나이 듦'을 인정하게 되는 때가 오는데, 이제 돋보기가 필요하겠다고 앞에 앉은 사람에게 솔직히 털어놓게 된단다. 그리고 말한다. '젊은 척' 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부터 얼마나 편안한지 모르겠다고! 나이 든 내 언니들 얘기다.
젊음은 아름답지만 젊음에 집착하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 세월을 막을 수 있는 육체는 없다. 반면에 청춘의 시절엔 절대로 알 수 없는 세계가 나이 들면서 펼쳐진다는 측면에서 인생은 영원한 미지다. 오세영 시인은 나이 들며 생기는 이 새로운 미지를 원시(遠視)라는 키워드로 사뿐히 들어올린다. 그리하여 시인에겐 조금 멀어지는 일이 이별이다. 그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무엇이든 내 손안에 쥐고 있어야 안심하는 젊음으로부터 여러 걸음 떨어진 뒤안길에서 손에 닿지는 않지만 내 손끝에서 악기가 되어 울리는 사랑. 이렇게 여러 겹의 무늬로 인생이라는 긴 여행의 벗이 되는 사랑은 참으로 신비이지 않은가.
이 시 〈원시(遠視)〉는 지금까지 17권의 시집을 낸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에 실려 있다. 지천명의 나이에 출간된 아름다운 연시집인 이 시집의 서문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완전한 삶이란 무엇일까. 나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내게 있어 시가 그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의 소산인 것은 분명하다. 나는 또한 그것이 사랑 같은 것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정신적 가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고 '사랑 같은 것'이라고 쓰고 있는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원시(遠視)의 여유와 지혜. 내 식대로 단정 짓지 않고 '머얼리서' 바라보는 원시의 원숙함이 평생토록 시작(詩作)과 함께 시론을 탐구해온 그에게서 오롯이 드러난다.
한 잔의 차를 마시며 헤어짐을 생각하는 시인의 눈에 '무지개'며 '별'이며 '꽃'들이 가물가물 흔들린다. 시인의 눈동자에 잔잔히 피어오르는 일몰은 누가 보낸 편지일까. 김명인 시인은 오세영 시인을 가리켜 '은근한 댄디'라 했다. 김승희 시인은 '무아의 바람 속을 달리는 보헤미안'이라 했다. 이제 꿈꾸는 가을은 스스로 저만치 멀어져서 꿈꾸는 가을이며, 이별은 멀리서 껴안아보는 이별이다. 이별은 노시인의 연인이 되어 가슴에서 달 가듯이 함께 간다.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고 시인이 어깨를 툭 친다. 따뜻한 거리, 원시의 총총한 눈도장들!
<김선우 시인>
파문 / 권혁웅
오래 전 사람의 소식이 궁금하다면
어느 집 좁은 처마 아래서 비를 그어 보라, 파문
부재와 부재 사이에서 당신 발목 아래 피어나는
작은 동그라미를 바라보라
당신이 걸어온 동그란 행복 안에서
당신은 늘 오른쪽 아니면 왼쪽이 젖었을 것인데
그 사람은 당신과 늘 반대편 세상이 젖었을 것인데
이제 빗살이 당신과 그 사람 사이에
어떤 간격을 만들어 놓았는지 궁금하다면
어느 집 처마 아래 서 보라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촘촘히 꽂히는
저 부재에 주파수를 맞춰 보라
그러면 당신은 오래된 라디오처럼 잡음이 많은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파문
<2001년>
해설 -
당신의 짝꿍은 어느 편에 서길 좋아하는지? 우리는 습관적으로 누군가의 왼편 혹은 오른편에서 걷거나 손을 잡거나 팔짱을 낀다. 비 오는 날이면 오른편이나 왼편 어깨가 살짝 젖으리라. 내 오른편이 젖을 때 나와 반대편 방향을 적시며 나와 함께 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한없이 감사한 가을이다. '오래된 라디오 잡음처럼' 슬퍼지기 전에 지금 열심히 그에게 말해주어야 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낙숫물이 떨어져 만드는 파문(波紋)과 파문 사이, 더 이상 파문이 생기지 않는 '부재'로부터 오래 전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슬픈 일이다. 부재와 부재 사이에 파문이 일고 파문과 파문 사이에 부재가 혼재하는 게 삶이라고, 본디 삶이 그렇게 생겨먹은 거라고 시는 말하는 듯도 하다. 현실의 우리는 외롭다. 시인도 외롭다. 비 오는 날 어느 집 처마 아래 서 보라. 아무래도 부재보다 파문을 가진 삶이 조금은 더 견딜 만하리라. 조금은 덜 외로우리라.
이 시는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권혁웅(41)의 첫 시집에 첫 번째로 실려 있는 시다. 그는 작년에 권혁웅식 연애시집이라 할 만한 《그 입술에 얼굴을 대다》라는 세 번째 시집을 내놓았고, 그 시집을 읽으며 나는 첫 시집의 《파문》을 떠올렸다. '그 사람은 당신과 늘 반대편 세상이 젖었을 것인데'라고 알아채는 몸의 감각은 연애의 감각과 상통하는 것이니! '파문'은 사랑의 감각으로, '부재'는 신화의 감각으로 진화해서 《그 입술에 얼굴을 대다》라는 연애시집이 꾸려졌으리라.
'이리저리 떠다니는 계란 노른자처럼 그 사람 쪽으로 중심이 조금 옮겨 가는 일'(〈먼 곳의 불빛〉 부분)인 연애의 풍경을 권혁웅은 해부학적인 미감을 가지고 구체화한다. 파문과 파문 사이의 부재를 마치 신경줄을 세는 듯한 감각으로 이야기하고 노래한다. 공부하기 좋아하는 영판 학자 같은 그가 다음과 같은 시를 선보일 때는 어떤가. '강물이 오래 흘러왔다고 말할까/ 흐르면서 제가 아는 빛이란 빛은 다 깨부수어/ 제 몸에 섞였다고 할까/ 젖꽃판 사이에 얼굴을 묻고 흘렀던 그의 눈물이/ 종지(終止)도 휴지(休止)도 없이 이어져/ 저렇게 복리로 불어났다고 말할까'(〈그래서 저렇게 글썽인다고〉 부분). 이 시의 부제는 '젖가슴'이다. 여기엔 값싸게 대상화되고 소비되는 육체의 섹시함이 아닌, 사금파리처럼 고독한 에로스의 진풍경이 있다. 그 때문에도 저렇게 글썽인다. '당신과 그 사람 사이'에 파문은 계속된다.
<김선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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