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욕망 / 오정자
너가 호출을 받은 시간은 21 시 19 분 19초
빈자리 없는 마포갈매기집을 나와
너는 十九世己式 돈가스 집으로 간다
배를 채운 너는 365일 자동화 기계를 보다가
자동차 쿠베의 뒤통수를 힐금거리다가
천사의 손잡이가 달린 문고리를 당겨 커피숍으로 들어간다
물 한잔을 기다린다 검은 물결
입 안 가득 담배연기를 문 너는
매일 이 시각이면 부은 눈두덩이
물방울들이 천장 거울에서 몇 만 년 전인지 모를 추억을 비추며 웃고 있다
너는 유리창 가득한 별들 까뮈의 백사장에 아라비아인들
태양 광선들이 눈부시다 고 50m만 떨어져 있으라 주문을 한다
안 그러면 머리통을 쏴 버릴 거야 너가 말할 때
창문에 달라붙은 무의미한 별들이 엉킬 듯 하다가
흩어진다 물방울들 갈랑갈랑 남은
검은 물방울들이 사라진다.
자작나무의 독백
자작나무 옆 아침이슬에 젖은 메밀 밭이
밤새 별이 빚어 놓은 술 그 후끈한 냄새를 맡는데
자작나무는 하릴 없이 누워서 바람 냄새를 맡고 싶었나 봅니다
그럴 때가 있어요 차가운 땅에 등대고 누워 보고 싶을 때가 있어요
직립의 일상이 너무 나른한 아침이었습니다
나 졸도하듯 쓰러져 누워 하늘을 보면
혼잣말처럼 자꾸 중얼거리고 싶었습니다
축축한 풀잎이 베개인 듯 자작나무처럼 눕고 있어요 나 지금.
연인을 위하여
그녀는 눈동자의 빛깔을 자주 바꾸었다
잠에서 깨어날때는 물처럼 투명한 빛으로
웃을 때는 꿀처럼 은은한 빛으로
난처할 때는 불처럼 새빨간 빛으로
노래하지 않는 사람은 노래하는 행복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첫사랑이 보여준 또 다른 기적
내가 간지러운 콧잔등을 긁을 때 그녀는 수줍게 손등을 만졌다
그것을 우리는 입체화라고 불렀다
종이꽃 같은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려 했지만
꽃집이 모두 문을 닫아버려 나는 남의 정원에서 갓 피어난
다알리아 한송이를 훔쳤다
살아 있다는 것은 기적
사랑은 영혼의 상태가 아니라 별자리 기호라는 것도 알았다
그녀의 잠든 모습에 눈이 먼 나는 그녀를 위해 웃고 울었으며
단어를 하나씩 적어 나갈 때마다 인생도 흘러갔다
유명해 진다는 건 누군가와 잠을 자지 않아도
깨어나면 항상 침대 위에서 쳐다보고 있는 뚱뚱한 여자의 시선을 느끼는 것과 같아서
섹스란 사랑을 얻지 못할 때 가지는 위안에 불과하다 나는 말했다
목숨 같은 첫사랑 산들바람이 도착했다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나는 눈에 핏발을 세우고 그녀를 찾아다녔고
때로는 얼토당토않은 곳을 헤매다가 기진맥진하곤 했다
내 삶은 그녀로 가득 차 있어 두 주 동안 쓴 시들은 전형적인 연애편지의 모델이 되었다
홍수처럼 밀려드는 독자의 편지에 난처해진 편집장은
사랑에 빠진 수많은 독자들을 위로할 방법을 고민하는 동안
사랑의 수위를 적당히 조절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사랑 때문에 죽는 것은 시적 방종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늙고 외로운 나 자신이 사랑 때문에 죽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 고통의 달콤함을 이 세상 무엇과도 바꾸지 않겠다
오 가련한 나, 그러나 이것이 사랑이라면 나는,
호텔, 델리시아스
나의 꿈은 당신이 깨어 있는 것과 같네
나는 지독히도 외로운 관찰자
거울을 볼 때마다 내 얼굴이 다르게 보이네
시침이 움직이는 것이 보이고 부패와 충치와
피로의 미묘한 진행이 구별이 되네
미치도록 외로운 나는 멋지게 죽고 싶었네
그래서 탐정소설 한 권과 드라이 진 한 병을 사서
편도 차편을 끊어 기차에 몸을 실었지
라스 델리시아스, 쾌락이라는 의미의 간판이 걸린 호텔로 들어갔네
방에 들어가 술을 따라 마셨네
구두를 벗고 옷을 입은 채 침대에 드러누웠지
구두끈을 맬 줄 몰랐기에 구두를 벗는다는 건 긴 머무름을 의미했어
탐정소설을 읽어나갔지 총을 꺼내 총알을 장전하지 않은 채 총구를 갖다 대었네
방아쇠를 당겨보았네 찰각 전율하는 그 순간 나는 크나큰 모순을 느꼈네
작가로 태어나 쉬지 않고 글을 써온 그 손
바로 그 손으로 방아쇠를 당겨 하나의 우주인 작가의 머리를 박살낼 수 있다니
술기운 때문인지 몰라도 몹시 갈증이 났네
갈증이 더해 갈수록 갈등도 깊어만 갔네
자살을 감행할 용기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자인하고서야 나는 울음을 터뜨렸네
창밖에선 늦여름 새벽 소나기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빗소리를 들으며 깊은 잠에 빠져 들었지
깨어보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네
머리가 몹시 아팠네.
窓
이중 유리문 반 뼘 사이에 한파가 산다
바이러스들 잠복한 듯 살고 있다
창 하나씩 사이에 두고 살아가는 것들
지루한 잡담과 위험한 발설 사이
수다와 수다 사이 당신과 나 사이 침묵이 산다
배고픔을 노래하는 아이들과
어미의 촉촉해진 눈망울 사이
낡은 의자와 열정의 나무 사이
허공과 창문 사이로 눈발들
얼만큼 부서지는지 측량하지 않는다 나는
겹겹 포옹하는 것들에 빠져
뒤에서 끌어안는 등 푸른 생선과
무구한 목소리와
어린아이의 시장끼를 달래주려 한다
와 추운 바람이 분다
백설기 같은 꿈들이 소음처럼 들린다
아이들의 사연이 어느 정치가의 연설보다 따스하여서
도닥이려 한다 창문을 열면 바깥
그러나 하늘과 땅 사이에
살아 있는 것은 무엇일까.
겨울을 위하여
겨울은 거스르지 못한 눈물을 백설로 뿌리며
가지 끝 이파리보다 더 가여운 신열로 흔들린다
빛이 되는 눈물과 타들어 가는 속 태움으로
흔들리는 것들은 모두 겨울
겨울은 감출 수 없는 사랑으로
흔들리는 촛불
여린 맥을 짚어볼까
속속 아프지 않은 곳 어디 있으랴
낭떠러지 끝에 주저앉은
병든 몸과 빈 가슴
호 불면 떨어질 일만 남았어도
겨울은 가녀린 몸짓 하나로 지켜가야 할
인연인 것을,
<2011. 1월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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