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천지/ 이은봉
백두산에 가서 백두산은 보지 않고 자작나무숲만 보고 왔다 자작나무자작나무…… 새하얗게 타오르고 있었다
천지에 가서 천지는 보지 않고 샛노란 풀꽃들만 보고 왔다 풀꽃들풀꽃들……풀풀풀 피어오르고 있었다
금강 대협곡에는 이제 막 여름이 무르익고 있었다 흐르는 물소리 속에서는 먼 조상들의 말발굽소리가 들어 있었다
백두산에 가서 무엇을 더 볼 것인가 천지의 파란 물 저쪽, 샛노란 풀꽃들 저쪽은 아직 갈 수 없는 땅이라고 했다
백 사람이 가면 두 사람만 볼 수 있다는 백두산 천지여 너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고 사람들은 환호성을 치는구나
환호성을 쳐도 나는 아직 너를 보지 않고 새하얀 자작나무숲만 보고 왔다 끝내 샛노란 풀꽃들만 보고 왔다.
계간 『시문학』 2010년 10월호 발표
이은봉(李殷鳳) 시인
1953년 충남 공주 출생. 숭실대 문학박사. 1984년 《창작과비평》 신작시집 『마침내 시인이여』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좋은 세상』, 『봄 여름 가을 겨울』, 『절망은 어깨동무를 하고』, 『무엇이 너를 키우니』, 『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 『길은 당나귀를 타고』 등이 있음. 제12회 한성기 문학상, 제4회 유심 작품상 수상. 계간 『불교문예』 주간 역임, 현재 (사)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자연서정을 바탕으로 강한 리얼리즘 정신을 담아내고 있는 작품으로 시인의 정치사상을 넘어 강한 휴머니티를 엿보게 한다.
이 시는 자연서정을 바탕으로 강한 리얼리즘 정신을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라 생각된다. 특징으로는 시인의 정치사상을 넘어 강한 휴머니티를 엿보게 한다.
시의 첫 행에서 시인은 백두산에 가서 백두산과 천지를 “보지 않고” 자작나무숲과 작은 풀꽃들만 보고 왔다고 진술하고 있다. 못 본 게 아니라 “보지 않았”다는 시인의 진술이 이 시를 풀어나가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힘들게 백두산에 올라도 잦은 운해 때문에 천지를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지를 못 본 게 아니라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부분 천지를 보기위해 백두산을 오르지만 시인은 자작나무숲이나 작은 풀꽃들에게 더 마음이 끌렸다는 얘기다. 시인의 눈이었기에 그런 삶에게 더 눈길이 갔으리라는 것은 당연하다. 시인이 말하는 자작나무 숲이나 작은 풀꽃들이 무얼 상징하는지는 간명하다. 시인이 백두산 관광을 하면서 정작 보고 싶어 한 것은 북한 주민들의 삶일 거라는 예상이 어렵지 않다.
단순히 관광을 목적으로 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이나 민간 예술인들의 교류 차원에서 지금까지 북한을 다녀온 남한 사람들의 수는 대단히 많다고 알고 있다. 특히 남한 단체를 대표해서 북한을 다녀온 자들의 경우 북한의 실상을 얼마나 제대로 보고 제대로 알고 왔나 하는 것이다. 북한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작은 삶들의 고통은 도외시한 채, 북한 지도층 인사들이나 몇 번 만나고 와서는 그곳을 다 아는 것처럼 떠드는 그들이 시인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됐을 수도 있다. 북한주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이나 인권에 관해서 현재 세계인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른 척하고 있는 남한의 각계각층의 해당 인사들에게 어쩌면 일침을 놓는 시적 발언이라 해도 지나친 해석이 아닐 것이다.
“금강산 대협곡…흐르는 물소리 속에서는 먼 조상들의 말발굽소리가 들어 있었다”며 시인은 남한과 북한이 한 민족임을 드러내며 거듭 강조하고 있다. 설령 같은 민족이 아니라 할지라도 인본주의를 주창하는 남한의 지식인들이라면, 가까이에서 체제와 권력자에게 인권을 유린당하며 살아가는 북한 주민들의 처절한 삶을 자신의 정치이념에 치우쳐서 간과해서는 되겠는가. 적어도 시인이라면 백두산 천지를 오르는 과정에서 바람과 추위 속에서 힘들게 견디고 있는 자잘한 풀꽃들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는 일인 것이다.
따라서 “백두산에 가서 무엇을 더 볼 것인가”라는 시인의 말이 강한 의미를 발생시킨다. 더 보고자해도 볼 수 없는 것도 있지만, 백두산에 서식하는 자작나무 숲이나 샛노란 풀꽃들의 자잘한 삶을 확실하게 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말로 해석이 가능하다. 즉 작은 삶들의 실상을 보면 그 사회를 다 아는 것 아니냐는 반문일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시는 그런 작은 것들의 삶을 보지 않고 어떻게 백두산을 보고 천지를 보았다고 할 수 있는가라고 비판하는 시인의 목소리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 문숙 시인
경남 하동 출생으로 《자유문학》을 통해 등단. 2005년 「서울문화재단」 신진작가 지원금을 수혜. 시집으로『단추』(천년의시작)가 있음. 현재 웹진『시인광장』편집위원과 『불교문예』편집장으로 활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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