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사람으로부터 온 편지 / 이원
나는 잘 도착해서 소호를 다니고
이제 막 저녁 먹으러 식당에 들어 왔어
오래 기다렸니
저녁까지 오는 길이 멀었다고만 간단하게 말할게
구름은 구름을 몰고 왼쪽에서 왼쪽으로
한쪽 귀가 떨어져 나간 토끼 머리를 흉내 낸 구름들은
한쪽 귀가 떨어져 나간 토끼 머리를 끝까지 흉내,
천개의 손이 동시에
천개의 손과 부딪치며
상자, 빛 , 입술, 새가 차례대로 왔다
책장을 넘길때는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 문장이 그리웠어
솜으로 꼭꼭 막아주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보다 내가 먼저 모든 구멍을 오므렸기 때문에
내내 쫄깃거렸어 휩싸인 파도는
비릿했고 조금 다정했고
조금 무뚝뚝했어
혼자 떠나온 것을 염려하지마
혼자라서 모두 다르고
혼자라서 모두 평등해
삼년동안 여행가방에서 코트와 정장을 안 꺼냈는데
지금쯤은 너무 구겨졌을까
코트의 안쪽 주머니에 못다한 말을 써 넣은것은 아니겠지
펴보지 않을테니 끝내 못다 한 말로 간직해줘
그런데 방금 온 식당 주인은 입이 없어서 먹을 수가 없다고
'너는 그림자가 없다'고 하는데......
폭설이 내리면 비로소 허공이 나타난다고 해
가늠 할수 없는 높이와 넓이를 가졌기 때문에
허공을 깊다고 한대
깊으면 밤이 시작된다고 해 이곳에서의
첫 밤은 아주 길테니
허공이 거대한 심야식당이 되면 식당 주인도 조금은 다급해질 테니
괜찮아
나는 늘 먼저 도착하는 사람
입에서 항문까지 오는 가장 긴 여행도 끝마쳤으니
너무 걱정은 마
나는 지금까지도 훌륭한 날씨처럼 굴었으니까
(현대문학, 3월호)
1968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했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와 동국대학교 문예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92년 <세계의 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며, 시집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를 출간했다. '현대시학 작품상'과 '현대시 작품상'을 수상했다.
<시감상>
죽음과 삶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하나다. 삶속에 죽음이, 죽음속에 삶이 있다. 저승에 간 죽음이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로 죽음이(시속의 화자) 조용조용 얘기를 하고 있다. 절제된 목소리로 "나는 잘 도착해서 소호를 다니고, 저녁 먹으러 식당에도 들르고, 저녁까지 오는 길이 멀었다"고. 담담히 말한다. 시속 화자 죽음은 또 말한다. "혼자 떠나 온 것을 염려 하지마라 혼자라서 모두 다르고 혼자라서 모두 평등하다", 입에서 항문까지 오는 가장 먼 여행도 마쳤으니 너무 걱정은 마"라고. 슬픔을 극도로 자제한 투다. 그러나 밀려오는 저 슬픔을 어찌하랴. 이 시에서 또 눈길을 끄는 부분은 허공에 대한 인식이다. 폭설이 내리면 비로소 나타나는 허공. 그렇다. 허공은 가늠할 수 없는 높이와 깊이를 가졌다. 나는 지금까지 훌륭한 날씨처럼 굴었다는 마지막 문장에서 마음은 더욱 쓸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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