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신화

삼독(三毒), 삼학(三學), 삼신불(三身佛)

미송 2011. 6. 3. 08:42

삼독(三毒)

 

 

아득히 먼 옛날부터 자신의 행위의 결과로서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고통을 거듭하고 있는 우리 인생의 현실은 괴로운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와 같은 삶의 현실은 도대체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것은 우리들이 진리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시말해 우주와 인생에 깃들어 있는 궁극적인 이치를 밝게 깨달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의 현실에 얽매여 온갖 업을 지으며 헛되이 윤회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진리에 대해 무지한 상태를 불교에서는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 중생들은 왜 진리를 쉽사리 깨닫지 못하고 무명 속을 헤매는 것일까요. 불교에서는 중생들에게 번뇌가 아주 많다는 의미에서 백팔번뇌(百八煩惱)라는 말까지도 씁니다만, 그러한 번뇌들이 중생들의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웬만큼의 노력으로는 올바로 진리에 접근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번뇌들 가운데 가장 뿌리깊은 것으로서 불교에서는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세 가지를 꼽습니다. 이것은 흔히 탐(貪).진(瞋).치(癡)의 삼독(三毒)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으로서, 번뇌의 작용이 독약과도 같으므로 삼독이라 합니다. 경전에는 삼독의 속성에 대해 여러 가지 설명이 베풀어지고 있습니다만,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다음과 같은 비유가 있습니다. 즉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은 각기 물감이 풀어진 물, 끓는 물, 이끼가 낀 물과 같아서 그런 물에 얼굴을 비춰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생들은 마음이 번뇌로 덮혀 있기 때문에 진리를 올바로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뇌가 없는 깨끗한 마음을 닦아가는 것이 바로 불교의 수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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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학(三學)

 

 

인간의 수많은 번뇌 가운데 마음으로 짓는 악업은 탐, 진, 치의 삼독을 가장 근원적인 것으로 보고 그것들을 소멸시켜 고요하고 평안하며 아무런 걸림이 없는 열반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방법이 불교의 수행입니다.

 

그와 같은 수행법들은 계(戒), 정(定), 혜(慧)의 삼학(三學) 즉, 계율과 선정과 지혜의 세가지 수련을 그 기본원리로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불교의 여러 수행법들은 모두가 계율과 선정과 지혜의 세 가지 수련 안에 포함되는 것으로서, 여기에서 계율이란 일상생활 속에 지켜야 하는 자발적인 도덕 규범들로 제가신자들이 받아 지니는 오계(五戒)를 위시한 십선계(十善戒), 팔재계(八齋戒) 등을 이야기 합니다. 말하자면 이상의 계율들을 통해 절도 있는 생활을 습관화 시켜 나감으로서 마음 속에 들끓고 있는 헛된 욕망을 제어하여 건강과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입니다.


선정이란 좌선(坐禪)과 같은 정신집중의 수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래 선정은 인도의 전통적인 수행방법인 요가의 일종으로 삼매(三昧)라고도 하는데, 호흡과 자세를 가다듬고 의식을 한곳으로 통일 시키는 수련법입니다. 이같은 수행은 특히 산란한 마음이나 동요된 마음, 분노따위를 제어하여 마음 속에 지혜를 일으킬 터전을 마련합니다. 중국의 선종(禪宗)에서는 이와 같은 선정수행을 특히 중요시 하여 거기에 깊은 사상성을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지혜는 사물의 이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기르는 수행으로, 우리의 몸이나 감각등에 대해 덧없고 괴로우며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관찰하고 연기의 이치를 깊이 탐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와 같은 지혜의 수행을 통해 진리를 통찰하게 되면 마음속에 아무런 두려움이나 걸림이 없는 열반을 성취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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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불(三身佛)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멸하시고 나서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자 불교계 내부에서는 부처님의 본질은 과연 무엇인가, 부처님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토록 완성된 삶의 모습을 보이실 수 있었을까 하는 부처님에 관한 탐구들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삼신설(三身說)이라는 사상이었습니다.


삼신설이란 부처님에게는 그 성격상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이라는 세 가지 몸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으로, 여기에서의 몸은 육신이 아니라 본질(本質) 내지는 기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법신이란 부처님이 부처님일 수 있는 근거는 그 깨달으신 진리에 있으므로 진리가 바로 부처님의 본질이라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그 같은 법신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부처님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 속에서 세상 만물 안에 두루 내재하여 계시므로 이 세상 모든 것은 부처님의 화현(化現) 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부처님 즉, 법신불을 비로자나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한편 보신이란 부처님은 일정한 서원이나 수행의 과보로서 부처님이 되셨으므로 부처님의 또 다른 본질은 그와 같은 수행내지는 원력이라고 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보신으로 이루어진 부처님 즉, 보신불로는 아미타 부처님이나 약사여래 부처님 같은 분을 예로 듭니다. 또 화신은 응신(應身)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의 기능이 중생의 구원이므로 구원할 사람들의 요구에 의하여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태어나신 부처님을 가리키며,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 예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세분의 부처님을 함께 모시는 것이 삼신불(三身佛)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비로자나 부처님을 중심으로 아미타 부처님과 석가모니 부처님 혹은 노사나 부처님과 석가모니 부처님을 좌우에 모시는 것이 통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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