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신화

유식삼성의 관계

미송 2011. 6. 16. 18:41

 

유식삼성의 관계

 

 

이것은 제22송이다. 앞의 21송에서 원성실성, 의타기성, 변계소집성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말한 바가 있다. 현실에 물들지 않고 그대로 수용하면 그것은 원성실성이 된다. 하지만 반대로 인식의 주객이 물들어서 대상을 보고 집착하면 변계소집이 된다.

 

그런 까닭에 원성실성과 의타기성은 서로 다른 것도 같은 것도 아니다.

마치 항상함이 없는 법의 성품처럼, 원성실성을 보지 못하면 의타기성도 볼 수가 없다.

(故此與依他 非異非不異 如無常等性 非不見此彼)

 

그래서 마조의 홍주종에서는 ‘평상의 마음이 그대로 도이다[平常心是道]’고 했고, <신심명>에서는 ‘대상을 간택하지 말라. 그러면 도에 들기 쉽다’고 했다. 세계는 인연을 따라서 끊임없이 변화된다. 이 자체로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다. 세월이 흐르면 젊음은 무너지고 늙어간다. 이 자체로 부족함이 없는 원성실성이다. 이것은 언제 어디서나 널리 편재하고[徧], 한결같으며[常], 거짓됨이 없다[非虛].

 

원성실성과 의타기성은 같으면서도 다른 측면을 가진다. 현재에 물들지 않으면 원성실성과 의타기성은 같다. 이때는 깨끗한[淨分] 의타기성이다. 그러나 여기에 분별을 내면, 그 순간부터 고통스런 집착으로서 변계소집이 발생된다. 이런 경우는 의타기성은 원성실성과 다르다. 이것은 물든[染分] 의타기성이라고 한다. 그래서 깨닫게 되면 현실이 그대로 정토이지만, 갈망에 물들면 현실은 정토가 아니라 예토(穢土)가 된다.

 

의타기성이란 상호 의존되어 전개되는 현실인데, 이곳에서 우리는 자아와 세계라는 견해를 내고 여기에 집착을 한다. 하지만 이것들은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는 착각과 같다. 마치 새끼줄을 잘못 알고 뱀으로 오인하는 것처럼 말이다. 예를 들면, 강박이 심한 어떤 내담자의 경우를 보자. 그는 부모를 비롯한 세상은 나를 비난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실수를 절대로 하면 안 되고,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무척 애를 쓴다. 이것은 세계, 세상에 대한 견해이다. 반면에 그 내면에는 왜소하고 불안한 자아개념이 가로놓여 있다. 그는 비난받을까 전전긍긍한다. 자신은 매우 나약하고 실수투성이고, 잘 하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긴장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긴장 상태는 오래가지 못하고 폭발하거나 자포자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쉴 날이 없다.

 

자아와 세계에 대한 잘못된 견해가 변계소집이다. 이것이 불안과 우울증을 만들어낸다. 자아와 세계를 변하지 않는 어떤 대상으로 파악하는 상태를 보통 얼음에 비유한다. 이런 경우는 딱딱하고 차가워서 대인관계에서 매우 불편함을 야기하고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피곤하게 한다. 이것이 변계소집이다. 봄이 와서 변계소집의 얼음이 풀리고 강물을 이루면 이것을 우리는 의타기성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자아와 세계라는 고정관념이 없다. 다만 끊임없이 흘러가는 도도한 인연의 흐름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의타기성의 무상성을 보지 못하면 결코 원성실성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점을 <성유식론>에서는 ‘의타기상에서 잘못된 집착으로 말미암아 자아와 세계를 실재하는 대상으로 인식하는데, 이런 자아와 세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이것들이 본래의 존재하지 않음을 자각하는 것’을 이름하여 원성실성이라고 한다. 이런 까닭에 ‘의타기성, 변계소집성, 원성실성’은 바로 이 한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한 마음에 집착하면 변계소집이요, 집착에서 벗어나면 원성실성이다. 그래서 보조지눌 국사는 <수심결>에서 부처와 중생은 모두 한 마음에서 나왔다고 했다. 한 마음에 미혹되면 이것이 변계소집이고 중생이다. 이 한 마음을 깨달아서 온갖 공덕을 불러일으키면 이것이 부처이고 원성실성이다. 그러므로 이 한 마음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보고 깨닫는 일은 불교공부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가 된다.

 

 

 

변계소집성

 

 이것은 제20송이다. 여기서부터는 변계소집성(徧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 등 유식의 ‘삼성설(三性說)’을 다룬다. 제20송에서는 첫째의 변계소집을 말하는데 이것은 ‘두루[徧] 분별하여[計] 집착된[所執] 성품[性]’을 말한다.

 

이런 저런 분별로 말미암아 가지가지 사물을 두루 분별한다.

이렇게 분별에 의해서 집착된 것들은 스스로의 성품을 가지고 있지 못한다.

(由彼彼徧計 徧計種種物 此徧計所執 自性無所有)

 

<성유식론>에서는 변계소집을 ‘허망한 분별(虛妄分別)’로 정의한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실재한다고 분별하여 집착하는 습관, 성품이다. 초월적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존재에 대한 실질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서도, 그것의 존재에 집착한다. 자아의 존재가 실질적으로 존재한다는 구체적이고 확고한 증거가 없는데도, 우리는 자아의 존재를 믿는다. 이런 것들이 모두 허망한 분별, 집착으로서 변계소집이다.

 

다른 일상의 보다 손쉬운 예를 들면, 경전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용인데, 어떤 사람이 밤길을 가다가 뱀을 밟아서 놀람과 공포로 옆 사람을 껴안았다. 그때 옆 사람이 정말로 뱀 이었나, 의심을 하고 확인하였더니, 그것은 새끼줄이었다. 여기서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한 것이 변계소집이다. 실재하지 않지만, 그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정확한 근거가 없이 상상하여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이때 무엇이 허망한 분별을 불러일으키는가? 이점에 대해서는 안혜와 호법의 견해가 있다. 안혜(Sthiramati)는 제8식을 비롯한 모든 의식이 물들어져서 허망한 분별을 일으킨다고 본다. 그 이유는 모든 물든 의식의 본질이 바로 분별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호법(Dharmapala)은 허망한 분별을 야기 시키는 주범으로서 세계와 자아에 집착하는 제6식과 제7식을 지목한다. 그리고 전5식과 제8식은 이런 분별에서 벗어나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전5식은 언어적인 능력이 결여되어 있고, 제8식은 정보를 저장만 하지 스스로 선악의 가치를 판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혜는 제8식을 포함한 모든 마음을 분별로 본 반면에 호법은 분별의 주체로서 제6식과 지7식을 지목한다.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호법의 의견을 존중하지만, 안혜의 입장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만은 없다. 제8식 종자의 유형이 언어, 자아, 선악의 형태를 가지기 때문에 반드시 제6식과 제7식으로만 분별의 책임을 몰고 갈 수가 없다.

 

아무튼지 유식의 입장에서 인간의 변계소집성을 고통과 고통의 원인으로 본다. 곧 사물을 존재하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그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왜곡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바로 언어의 기능을 직접적으로 가리킨다. 대상을 두루 분별하는 기능은 바로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책상’이라고 하면 이 책상과 저 책상을 구별하지 않는 포괄적인 보편적 이름이고, 둘째는 책상과 책상이 아닌 대상을 구별하여 차별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언어이기 때문이다.

 

위의 사례에서 새끼줄을 뱀으로 잘못 인식을 한 관계로 공포와 두려움의 고통을 느낀 것이다. 고통은 현실을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그것을 잘못되게 분별한다는 데 있다. 그런 까닭에 잘못된 분별을 교정하여 존재를 존재하는 그대로 수용하게 한다면, 고통으로 벗어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심리치료이다. 여기에는 3가지의 접근방식이 있다.

 

첫째는 잘못된 분별을 일으키는 내적인 공능, 습기, 종자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내적인 힘이 계속 권리를 주장하는 한에서 자주 재발될 것이기 때문이다. 왜 새끼줄을 뱀이라고 인식하는 그 내적인 맥락을 탐색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 일은 쉽지만은 않다. 우선적으로 내적인 씨앗을 찾아내는 일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현대 심리학에서 이것과 유사한 전략을 선택한 학파는 정신역동이나 도식치료이다. 이들은 어린 시절과 같은 과거의 경험내용을 중시하고 그곳으로부터 원인이 있고, 변화도 그곳에서부터 비롯된다는 믿음을 가진다.

 

둘째는 잘못된 분별을 교정하는 일이다. 이것은 반대증거를 제시함으로써 가능해진다. 그것이 뱀이 아니라, 새끼줄임을 확인하게 되면 쉽게 끝나게 된다. 하지만 구체적인 증거가 분명하게 존재하지 않을 때는 쉽지가 않다. 자아가 존재하지 않다는 증거는 쉽게 제시하지 못한 경우가 많고 그 반대증거를 제시하여도 이것을 납득하지 않으면 폐기처분되기 십상이다. 이것은 인지치료와 매우 흡사한 전략이다. 부정적인 감정은 바로 왜곡된 인지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감정을 바꾸려하지 말고 부정적인 사유방식을 바꾼다면 감정적인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믿는다.

 

셋째는 존재를 존재하는 그대로 수용하거나, 그 자체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는 일이다. 이 일은 먼저 사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힘, 곧 명상의 훈련이 전제가 된다. 외부의 사물은 쉽게 수용되지만, 자신의 내적인 심리현상을 그대로 수용하는 일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안과 우울을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다. 이것은 바로 명상수행의 힘에 의한 지켜보기의 힘에 의해서 가능하다. 이것이 2000년 이후에 등장한 제3세력으로서 명상치료의 전략이다. 하지만 명상치료의 경우도 전자의 전략들과 함께 통합적으로 운영된다면 효과가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의타기성

 

다른 것에 의지하여 자성은 조건에서 발생된 분별로서 구성된다.

원만한 참다운 성품은 의타기보다는 항상 분별로부터 멀리 떠나있다.

(依他起自性 分別緣所生 圓成實於彼 常遠離前性)


이것은 제21송이다. 앞의 2구는 의타기성을, 뒤의 2구는 변계소집성(徧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과 원성실성(圓成實性)을 서로 비교한 것이다. 

변계소집은 ‘두루 분별하여 집착됨’을 말한다면, 의타기성은 집착을 야기시킨 분별을 의미한다. 분별로부터 집착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새끼줄을 뱀으로 분별함으로 인하여 두려움의 집착이 발생된 것이다. 여기에는 의타기성에 의한 변계소집의 발생이 있다. 하지만 이런 인식상황에서 무엇이 변계소집성이고 무엇이 의타기성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먼저 호법(Dharmapala)의 견해를 살펴보면, 모든 마음과 마음현상은 훈습력에 의해서 인식의 두 축, 주관과 객관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원인과 조건에서 발생된 것으로 의타기성이다. 그에 반하여 변계소집은 그것들에 대한 잘못된 집착으로서 존재와 존재하지 않음[有無], 같음과 다름[一異], 함께 함과 함께 하지 못함[俱不俱] 등을 가리킨다. 여기에 따르면 발로 새끼줄을 밟은 인식사태는 의타기성이고, 그것의 결과로서 뱀이라고 분별을 일으킨 것은 변계소집이 된다.

 

하지만 안혜(Sthiramati)는 이와 다른 견해를 낸다. 모든 마음과 마음현상은 허망된 훈습으로 말미암아 비록 그 바탕은 하나이지만, 주관과 객관, 인식과 대상 등의 2가지 형상을 낸다. 인식의 주객은 견해에서만 존재하고 실질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2가지 형상은 변계소집이고, 이들 인식의 주객을 발생시킨 허망한 분별이 바로 의타기성이다. 여기에 다르면 발로 새끼줄을 밟은 인식사태는 변계소집이고, 그런 인식을 가능하게 한 주객의 허망한 분별은 의타기성이다.

 

안혜와 호법의 해석은 외형적으로는 극단적으로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다. 하지만 안혜는 제8식의 분별력을 의타기성으로 제6식의 인식을 변계소집으로 보고 있다면, 호법은 제6식의 분별을 의타기성으로 보고, 그 결과의 언어적인 분별을 변계소집으로 본 점에서 차이점이 있다. 안혜가 보다 심층적인 관점을 중시한다면, 호법은 보다 표층적인 관점에서 해석한다. 이를테면 호법은 새끼줄을 밟은 의타기성에 의해서 뱀이라는 변계소집이 발생된 것으로 해석하다면, 안혜는 뱀이란 인식적인 판단은 과거에 뱀에 대한 내적인 경험, 분별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분별의 주체를 안혜는 제8식으로 보고, 호법은 제7식이나 제6식으로 본 점에서 심층과 표층의 해석상 차이점이 생겨난 것이다.

 

이들의 차이점은 현대 심리치료에서 정신역동과 인지치료의 차이점과 유사하다. 정신역동은 과거에 그것을 어떻게 경험했는지를 중시한다면, 인지치료는 현재에서 어떻게 그것을 경험하고 있는지를 중시한다. 현재 경험에서 그것이 뱀이 아니라 새끼줄이라고 판명이 나면 불안과 우울증은 소멸된다. 하지만 정신역동에서는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하는 기질이 정화되지 못하면 재발된다고 경고한다. 전자가 호법의 방식이라면, 후자는 안혜의 방식이다.   

 

뒤의 2구는 원성실성과 의타기성, 그리고 변계소집과의 관계를 나타낸다. 의타기성은 변계소집과 원성실성을 함께 공유하지만, 원성실성은 항상 변계소집에서 멀리 떠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의타기성에 대해서 분별을 일으키면 변계소집으로 떨어지고, 반대로 의타기성을 존재하는 그대로 수용하면 곧 원성실성임을 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의타기성이 물들면 그것은 바로 변계소집이 되고, 반대로 의타기성이 청정하면 그것이 바로 원성실성임을 알 수가 있다. 여기서 의타기성은 바로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현실을 왜곡시키면 집착이 되고 존재 그대로 허용하면 원만한 행복이 된다. 이런 점에서 유식 삼성설은 그대로 심리치료의 과정으로 활용될 수가 있다. 곧 내담자의 문제는 변계소집이고, 변계소집의 근거인 의타기성을 정확하게 파악을 하면, 그래서 집착에서 벗어나면, 의타기성 그대로가 바로 원성실성이 된다. 

 

원성실성(圓成實性)

 

원만(圓滿), 성취(成就), 진실(眞實)의 의미로서 불성(佛性), 법성(法性), 진여(眞如), 법신(法身) 등이 구족히 모두 원성실성(圓成實性)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법성, 진여, 법신 등이 곧 원성실성이며 원성실성이 곧 법성, 진여, 법신 등이다.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의타기성(依他起性)에서 분별을 일으키지 않으면 원성실성(圓成實性)이고 분별을 일으키면 변계소집(遍計所執)이 된다. 법상(法相 보이는 것 )은 유한(有限)하나 법성(法性)은 무한(無限)하며 법상(法相) 허가(虛假)이나 법성(法性부동하고 불변한다.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다. )은 진실(眞實)하다. 따라서 제법의 법성(法性)은 부동불변(不動不變)하고 불생불멸(不生不滅)하며 담연(湛然편안하고 담담하다.) 상주(常住 영원이 주하고 )하고 원만시방(圓滿十方)하므로 원성실자성(圓成實自性)이라 이름한다. 변계소집만 하지 않으면 된다. 계산 하지 마라 장사든 공부든 계산하지 말고 그냥 해라 계산 잘하는 사람은 감정의 기폭이 심한 사람이다.  하다가도 싫어 지고 않하다가도 다른것에 혹딱 바진다. 계산이 발목을 붙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