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칼럼

낯설고 기괴한 세계의 감각 혹은 그로테스크의 이물(異物)들

미송 2011. 7. 8. 19:38

 

낯설고 기괴한 세계의 감각 혹은 그로테스크의 이물(異物)

 

 

박성현

 

 

    이 작품을 천천히 읽어본 사람은, 문장들이 이끌어내는 낯설고 괴기한 장면들에 적잖이 놀랄 것이다. 특히 동요라는, 야누스적 단어로부터 전개되는 시적 상상력은, 감히 말한다면, 정확히 그로테스크grotesque를 전제하고 있다. 동요는 童謠動搖사이의 출렁거림, 혹은 휘청거림 속에서 의미를 확장한다. 후자의 의미에 가까울 때, 전자는 공포로 변형되고, 전자의 의미에 가까울 때 후자는 잔인함으로 바뀐다. 어떤 상황이든, 이 시가 파생하는 이미지의 진폭은 무겁고 차가우며, 또한 놀랍다.

 

    카이저는 그로테스크를 죽음에 대한 공포라기보다는 삶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만일 그렇다면, 그로테스크는 기괴함의 미학적 장치를 벗어나 사유의 방식 곧 세계관의 문제로 확대되며, 작가의 창작 태도로 직결된다. 세계를 냉소적이고 기괴하게 묘파함으로써 낯설게 만들고, 세계의 규범과 질서를 어긋나게 함으로써, 인간의 원형에 천착하는 것. 그것이 그로테스크의 본질에 해당한다.

 

 

아프지 않은 말이 동요의 속도로 뛰어다녔다

흘러내리는 돋보기와 땀을 추어올렸다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시력표의 공장에서 나와 반대쪽으로 뛰어갔다

아프지 않은 등을 타고 놀다 시력을 잃어버렸다

다섯 발가락의 감각을 다른 표정으로 씻어낸 비눗물처럼 흘러갔다

구부러진 안경테 모양으로 몸을 구부리다 동요의 후렴구를 놓쳤다

  - 이기인 <동요의 속도> 중에서

 

    무엇인가 이상하다. 문장은 비문과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가고 있다. 주어와 서술어도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문법을 비껴가고 있다. 문장들이 펼치는 낯선 세계와 그것을 읽고 받아들이는 독자와의 괴리감마저 존재한다. 익숙함이 파괴되는 곳에 불편이란 이물이 고개를 내민다. 인과율이 선명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서사는 존재하지만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몽타주처럼 이미지가 교차되는 듯하다가도 불쑥 대상의 일부가 부서지고 확대되기도 한다.

 

    이 시의 윤곽을 그려 보자. 시인은 바람이 부는 날에 공장 부근의 공터에 서 있다. 공장 밖에는, 공장의 아이들이 간이식 회전목마를 타고 있다. 회전목마의 주위에는 시력이 나쁜 탓에 돋보기를 쓴 노인우리는 돋보기라는 상관물을 통해 노인을 포착할 수 있다이 앉아 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동요의 빠르기는 적당하고, 바람의 결처럼 부드럽다. 플라스틱 회전목마는, ‘아프지 않은 등으로 아이들을 태우고 동요의 속도로 뛰어다닌다. 그런데 노인을 둘러싼 풍경의 사실들은 여기서 멈춘다. 환청과 환영의 파장들이 엇갈리며 시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무수한 암시와 은유로 엮어지는 문장들은, 단일한 파장을 지니며 파국으로 치닫는다. 회전목마를 타는 아이가 낙마하는데, 그 순간 모호한 이미지들은 제자리를 찾는 듯 보인다. 죽음의 순간에 생애의 모든 시간을 사는 사람의 이야기 혹은 과거의 삶들이 응고되어 지나가는 사람의 이야기들이 파편으로 떠다니는 것. 영화 도니 다코(2001)의 불안과 공포, 그리고 몽환의 상처들이 주인공을 움직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무엇인가, 여전히 이상하고 불편하다.

 

   해답은 단순하다. 바로 공장이란 단어의 무게 때문이다. 한 아이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인 듯하지만, 그것은 결코 아이의 생으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공장 지대의 분위기로 인해 등장인물의 감각이 상당히 낯설고 기괴하게 제시되고 있다. 감각의 외부에는 공장이라는 거대한 타자가 상존하는 바, 생산라인의 속도가 조금씩 높아지면서, 언어와 행동, 생각들은 정처를 잃어버린다. 어쩌면 아프지 않은 말이 동요의 속도로 뛰어다녔다는 문장은, 그러므로 동요의 외적 자극에 타자화 된 감각들의 정처 없음이다. 이것은 아프지 않은 등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러한 감각들의 타자화는 세계를 더욱 파편화시키고, 총체적인 사고를 불가능하게 한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해당된다. “집의 모서리가 껴안은 목을 놓아주지 않았다기억의 집을 나와서 신호등 눈을 삼백육십오 초록으로 만들었다혹은 의자가 없는 상영관에서 의자를 묵념하는 새를 접어서 의자에 놓았다 / 영화가 의자를 관람하는 이야기는 믿어지지 않는다라는 구절 말이다. 이 가운데 의자를 묵념하는 새의자를 관람하는 영화상식적으로 모든 영화는 객체다라는 이미지는 대상과 급격히 단절된, 세계와의 불일치 속에서 불안으로 착종된 화자의 심리상태가 투영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을 요한다. 단절이란 곧 전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달리던 말의 코가 턱뼈 아래로 떨어지는 장면이었다

당신의 음식이 보인다고 코가 턱에게 말하는 잔인한 장면이었다

말의 고삐를 놓친 이가 지갑을 열었고

으깨진 감자 얼굴로 신분증을 보일 때도 웃지 않았다

  - 이기인 <동요의 속도> 중에서

 

 

   아프지 않았던말의 코는 말과 분리된다. 이 문장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이미지 앞에서, 우리는 기존의 질서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들(특히 1962년 작 십자가형을 위한 세 연구를 보라)처럼, 유독 신체의 일부(‘’, ‘턱뼈)가 강조되고 있으며, 대상은 캠퍼스 속으로 고립된다. ‘턱뼈는 대상 그 자체이며, 초월적인 어떤 것을 은유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문장은 그 자체로 추상이며, 이미 현실과는 괴리되었기 때문이다. 알레고리나 상징과도 거리가 멀다. 중요한 것은 이 문장 속에서 대상과 세계의 인과관계는 해체되고, 그것을 포착하는 시인의 시선만 남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왜, 어떤 이유로 시인은 과격한 단절, 곧 전복을 시도한 것일까.

 

    대상을 해체하며 동시에 고립시키는 작업을, 들뢰즈는 구상적, 삽화적, 서술적 성격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단순화한다(<감각의 논리>). 다시 말해, 항구적이라 믿었던 세계-미메시스’(mimesis)를 새롭게 재구성하기 위한 것이며, 그럼으로써 세계-미메시스를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다. 시인의 독특한 사유는 여기서 생성된다; 현실 속에서 현실을 구원하는 것. 만일 시인이 초월을 용인했다면, 구원은 손쉬웠을 것이다. 이때 구원이란 현실 그 너머에서 찾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철저하게 초월을 부정한다. 현실을, 현실 속에서만 구원하기 위해 그것은 단절되고 전복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그로테스크는 전위가 된다.

 

    위 구절에서는 웃음의 불구성이라는 블랙 유머까지 수반한다; 떨어진 말의 코가, 턱에게 당신의 음식이 보인다라고 말하는 것. 웃음은 주체와 상관없는 곳에서 주체를 흔든다. 우리가 웃는 게 아니라, 무의식 저편에서의 들려오는 웃음을 단지 포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낯설고 원시적인 바닥은 차츰 강렬해지고 더 단단해진다.

 

 

*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공장 지대의 아이들은 회전 목마를 타고 있다. 순간 시력을 잃으며, 누군가 낙마한다. 그 죽음은 황량하고 서글프다. 그러나 그 죽음의 공황 앞에서 시인은 주체의 해체를 경험한다. 그 해체는 세상의 인과율이 허상에 불과하다는 절망이고, 나락으로 떨어진 고통이다. 동요의 속도에서 자주 등장하는 낯섦(혹은 생소함)은 이처럼 근본적으로 세계와 의 불일치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지금껏 믿었던 세계가 허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전율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특히 그 세계의 붕괴가 동요의 세계에서 시작된다면, 그 전율의 강도는 상상을 초월할지도 모른다.

 

    그로테스크는 악마적인, 기괴하고 어두운 어떤 것을 세계로 불러들이고, 독자들로 하여금 그것과 대면하게 하는 양식이다. 독자들이 느끼는 불편함과 그에 따른 상실감이 증폭되면 될수록 더욱 낯설어지는 세계, 그리고 그 이면에 숨은 또 다른 세계는 그로테스크는 세계를 단절시키고 전복시키는 효과적인 기법이자 세계관이며, 시작(詩作) 태도이다. 기존의 세계가 감내하지 못한, 혹은 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물(異物)원초적이고 원시적인 체험들을 통해 시원에서부터 잃어버렸던 상실감을 되찾는 것이다. 동요의 속도는 바로 그러한 점에 효과적으로 그리고 있다. 아울러 사람들의 감정을 뒤틀어버림으로써, 기존 질서의 불가항력들과 정면으로 대치하고 그것을 현실 속에서 구원하고자 했던 것이다.

 

 

*<현대시> 2011년 7월호 '이 달의 추천작을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