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칼럼

이정문<왼손과 메밀꽃 필 무렵>

미송 2011. 6. 20. 11:04

 

[평론] 왼손과 메밀꽃 필 무렵 / 이 정문


 

어렸을 때에 왼손으로 숟가락을 잡았다고 어른에게 야단맞은 기억 때문일까, 그래서 지금은 오른손잡이지만 매사에 어색하고 서투른 왼손에 정이 더 간다. 이는 회상하여 현명하고 능숙하기보다는 얼빠지게 살아온 삶이 일반일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몸통에 붙었지만 방향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토록 천대받는 물건이 또 있을까, 그 천대의 역사도 깊어 어원으로 따지자면 “왼”은 “그릇되다, 삐뚤어지다”에서 유래되고 “오른”은 “옳다, 바르다”에서 왔다. 지금도 바른손이라면 오른손을 뜻한다. 이슬람권에서는 밥을 먹거나 신성한 일은 오른손으로 하지만 똥을 닦거나 불결한 일은 왼손의 몫이다. 예수는 왼쪽 옆구리를 창에 찔려 죽었으며 하늘로 올라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았으니, 그 또한 큰 죄를 왼쪽이 뒤집어써 재림할 때에 오른쪽에는 구원을 받을 양이요, 왼쪽은 멸망을 당할 검은 염소라 했다. 중세유럽에서 귀족이 왼손을 잡아주며 여자와 동침하면 그녀는 곧 왼손잡이 마누라라는 뜻인 첩이었고, 교양이 없는 자의 상징도 또한 왼쪽이라서 공식석상에 왼손으로 명함을 내밀면 중국에서는 회담조차 결렬되었다. 같은 몸통에 이처럼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뿌리 깊게 박혀 오른쪽은 태양과 삶이며 남성이고, 왼쪽은 달과 죽음이며 여성이고, 또 천사는 오른손이요 왼손은 악마를 상징했다. 왼손과 오른손은 이성과 감성의 대립관계이기도 하다. 오른손잡이는 이성과 논리를 관장하는 왼쪽 뇌가 발달되었고 왼손잡이는 감성과 직감을 관장하는 오른쪽 뇌가 발달되었다. 줄리어스 시저는 로마인으로 하여금 타협과 평화를 상징하는 의미에서 무기를 쥐고 휘두르는 오른손을 비워 악수를 하게 했지만 정작 그는 왼손잡이였기에 음흉하다는 핀잔을 받았다. 우리사회에서도 왼손잡이는 제대로 가정교육을 받지 못한 천민이요, 교양 없는 사람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왼손은 늘 못난 삶의 동반자다. 매사 능숙한 놀림을 보이는 오른손의 약삭빠름에 비해 어눌하고 서투른 왼손의 놀림은 경외감마저 가져다주곤 했다. 언젠가 오른팔이 다쳐서 왼손으로 수저질을 한 적이 있었다. 밥그릇과 입 사이를 제대로 오가지 못해 왼손이 꼭 헛바퀴 도는 느낌이었다. 내 몸에 이런 미지의 세계가 붙어있는 줄 처음 깨달았다. 생존에 필요한 기본동작마저 서툴지만 꼭 어디론가 멀리 떠났다가 방금 돌아온 손님과 같았다. 


이효석 작가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주인공인 허생원은 왼손잡이다.

이 단편소설은 작가가 사회참여적인 글을 쓰다가 일본경찰에 의해 카프문인의 대대적인 탄압이 있자, 기존의 작품 성향을 버리고 탐미주의로 돌아선 감이 있다. 당대 사회생활상의 고단함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1936년에 발표한 이 작품은 우리에게 많은 서정적 아름다움과 삶을 시사한다. <메밀꽃 필 무렵>은 왼손으로 시작되어 왼손으로 끝나는 왼손세계의 작품이다. 채찍을 왼손으로 잡아 걷는 왼손잡이 허생원의 인생자체가 왼쪽으로 편중된 삶이다. 그는 재산도 집도 없었으며 가족도 없기에 고향이 청주라고만 했지 명절 때에 고향에 다녀온 흔적도 없고 누가 찾아왔었다는 말도 없다. 우리문학에서 장돌뱅이는 늘 기댈 데가 없는 떠돌이요, 비천하기는 이루 말할 수 없어 괄호 밖의 인생이요, 역마살이 붙어 정착 못하는 집시요, 피붙이마저 시원찮은 외톨박이니 이는 왼손세상의 집합이다. 지금도 작품에 나오는 봉평, 대화, 정선, 제천 등을 가보면 동네와 동네의 거리가 거의 30Km 안팎이다. 이는 장돌뱅이의 하룻길에 해당되는 왼쪽세계의 노정이다. 허생원의 춘심(春心)과 사랑도 역시 왼손잡이다. 달 밝은 밤에 목욕할참으로 옷 벗으려 방앗간에 들어가다가 성씨네 딸을 만난다. 원앙새 수놓인 금침은 오른쪽 세상이지만 거친 짚단이 깔린 방앗간의 밀회는 왼쪽세상이다. 이는 심상치 않은 왼쪽사랑을 암시한다. 그 처녀도 역시 양지의 오른쪽에서 잘 나가다가 홀딱 망하여 음지의 왼쪽으로 기우는 집안의 딸이라서 슬픔에 잠겼고, 이런 왼쪽과 왼쪽의 만남은 기어이 정사까지 가고야 말았으니, 왼손세상을 비추는 그 달이 얼마나 밝았으랴, 그러다가 눈 찔끔 감아 구름 속으로 몸을 숨기기도 했을 것이다. 정사를 나눈 후 그들 각자의 인생 또한 왼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20년의 세월이 흐르고야 말았다.

 

성씨네 집안은 방앗간의 정사가 있은 다음 날 제천 부근으로 빚쟁이를 피해 도망쳤다. 다 털고 떠나온 봉평 땅이지만 처녀의 뱃속에 들어있는 씨앗 하나는 그대로 가지고 왔으니 아비도 모른 채 배만 불러오던 처녀는 몰락을 당한 집안에서도 쫓겨나는 수난을 당하니 왼손세계가 점점 깊어만 간다. 돈 없고 재주 없는 여자가 먹고 살만한 일이란 저자거리에서 술과 웃음을 파는 일이라, 그나마 술장사도 기둥서방이라도 있어야 괄시 안 받고 지탱하니, 얻어 들인 남정네라야 그저 술주정뱅이요 뻑 하면 주먹질이나 일삼는 한량이라서 아비 없는 자식이나 그 어미의 속이 오죽했으랴, 어서 크면 집을 떠나라. 동이야 빨리빨리 자라서 어미와 단 둘이 하루라도 마음 편하게 오순도순 살아보자고 얼마나 속으로 외쳤을까, 아닌 게 아니라 의붓아비에게 얻어맞아 가며 징징 울며 자란 동이도 어언 이십 세 가까이 되자 이심전심으로 어미의 뜻을 알아챘는지 가출한다. 돈이 좀 벌어지면 봉평에 쓰러져 가는 집이라도 얻어 어머니를 모신다나, 그것이 제 소원이라고, 기껏 뛰어든 세상이라는 게 알고 보니 핏줄 따라 장마다 돌아다니는 길이라서, 아비의 길과 자식의 길이 따로 있지 아니하여 그 또한 왼손세상이다.


달은 여전히 방앗간에 매달렸고 메밀꽃 일렁여 산 중에 날리니, 여자라곤 평생에 딱 한번 안았던 처녀라, 봉평이 짜릿했던 정사의 고향이라서 허생원은 멀리 떠나지 못한 채 때마다 봉평장에 꼭 들려 좌판을 벌려놓고 기다린 세월이 20년이다. 이는 홀아비의 한이다. 최명희작가의 소설 <혼불>은 과부의 한을 광대한 필체로 그려놓고 있다. 주인공인 청암부인이 아리따운 나이에 하얀 소복 차림으로 가마에서 내려 시집으로 들어서자, 퇴락한 양반집 마루 아래로 내려서는 또 하나의 그림자가 있었으니 그 또한 하얀 소복 차림의 시어머니 될 사람이었다. 동짓달 긴긴 밤을 견디지 못해 신랑이 베고 자던 베개에 신랑의 옷을 입혀놓고 밤새 조잘대며 들여다보거나, 무료하기 그지없어 엽전을 공중에 던졌다가 뎅그르르 떨어져 구르는 모습을 보며 지내다가 그 엽전이 다 닳아 백지처럼 얇아졌다면, 청산과부건 늙은 과부건 생과부건 그들은 보쌈마저 당하지 못해 한스러웠을 것이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다. 허생원은 귀한 양반가문의 출신도 아니요, 처자식이 있어 눈치 볼 일도 없지만, 미천하고 가난한 왼손잡이 장돌뱅이에 얼금뱅이요, 장마다 돌아다녀 주모에게나 껄떡대다가 딱지나 맞은 세월이 겹겹이 쌓여 노래가 되었다. 달 밝은 밤에 소금바다 일렁이듯 펼쳐진 메밀꽃밭을 지날 때마다 저절로 입이 열린다. 마치 추임새를 넣듯 건들건들 맞장구쳐주는 조선달만 귀에 박히도록 그 노래를 듣지 않았을 테니, 피붙이와 다름없는 당나귀는 그 속울음마저 귀에 박혔으리라. 그래서 왼쪽세상의 노래는 시작되자마자 그 끝을 알 수 있으니, 한(恨)의 소리란 해도 해도 처음과 같아 금방 눈앞에 닥친 일과 진배없다. 이는 불알 두 쪽만 남은 사내들의 노래니 불알도 자세히 살펴보면 나란히 걸려 있지 않다. 왼쪽 불알이 뒤쪽으로 가 붙은 경우가 많다. 참으로 왼쪽세상은 집요하여 남자의 그윽한 곳까지 쫓아가 제 주장에 몰두하니 허생원의 심정이 오죽했으랴, 새벽마다 공중을 흔들어 솟구친 거시기에 얼마나 방앗간의 그 처녀가 사무쳤는가 말이다. 한(恨)의 근원은 프로이드의 리비도일 수도 있다. 이제 다리가 아파 이 짓도 더 못하겠다는 조선달의 말에 허생원은 이렇게 대꾸한다.

“옛 처녀나 만나면 같이 살까...... 난 거꾸로 질 때까지 이 길을 걷고 저 달을 볼 테야.”

봉평 땅을 빙빙 돌며 20년이나 산 넘고 물 건너 어슬렁거린 허생원의 세월과 그 기다림이 점입가경(漸入佳境)이라서 눈물겨운 왼손세상이다.


비천, 가난, 외로움, 음지를 내용으로 하는 왼손세상은 이 작품 말고도 많지만 우리에게 길이 남는 명작으로 평가되어 오늘도 읽혀지는 이유는 시적 언어로 펼쳐간 서정적 서술과 정밀하고 완벽한 논리적 구도가 아닐까 한다.

“대화까지는 80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의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위와 같은 문장은 차라리 산문형식의 서정시로 느껴진다. 이 작품에는 이런 시적 문장이 곳곳에 박혀 한국적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작품의 구도는 주인공인 허생원과 당나귀와의 경계를 무섭게 무너뜨려, 작가는 당나귀의 모습을 빌려 주인공의 늙고 초라한 행색을 완벽하게 설명하는데, 이런 기법은 계속 이어지며 그의 아들인 ‘동이’도 강릉집 피마에게 접붙여 얻은 당나귀새끼로 비유되어 표현된다. 이효석 작가는 닭, 강아지, 당나귀 등 사람과 친한 동반동물을 소설에 등장시키는데, 이는 소설기법도 기법이려니와 작가가 동경하는 자연에의 회귀정신으로 보여 진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탁월한 점은, 또한 우리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요란하게 드러내지 않는 해피엔딩으로서, 잔잔한 희망을 감동적으로 전하는 힘일 것이다. 20년 만에 만난 자식, 성씨댁 처녀가 갖은 고생을 하다가 지금은 혼자 살고 있다는 것, 그래서 동이는 자기도 모르게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가 사는 제천으로 향한다.

“생원도 제천으로?”

“오랜 만에 가보고 싶어. 동행하려나, 동이?”


김동인의 <감자>나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도 왼손세상의 이야기다. 현대소설사적 의의가 지대함에도 불구하고 <메밀꽃 필 무렵>보다 위의 작품이 우리에게 덜 읽혀지고 있는 이유는 작품이 던지는 희망적인 메시지의 부재가 아닐까 한다.

김동인의 <감자>는 단도직입적으로 소설 첫 문장부터 왼손세상을 찔러 들어간다.

“싸움, 간통, 살인, 도둑, 징역, 이 세상의 모든 비극과 활극의 근원지인 칠성문 밖 빈민굴로 오기 전까지는 복녀의 부처는 (사농공상에 제2위에 드는) 농민이었다.”

이 작품의 배경은 칠성문이다. 칠성은 예부터 죽음을 관장한 별이고 칠성문은 성 안에서 죽은 사람을 밖으로 내보내는 작은 성문이다. 오른손은 동쪽을 뜻하지만 왼손은 서쪽을 말한다. 이는 곧 왼쪽이 죽음의 방향을 쥐고 있다는 의미다. 김동인의 작품은 서투른 왼손질로 시작하여 서툰 왼손질로 끝맺을 뿐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복녀는 가난한 농부의 딸이지만 어느 정도 도덕성을 갖추고 체통도 지킬 줄 아는 여자였다. 무능한 남편의 게으름에 밀려 빈민굴까지 온 복녀는 하루 품삯 32전을 벌려고 나라에서 시키는 송충이 잡는 일을 하다가 감독의 눈에 띄어 으슥한 곳으로 끌려간다. 복녀의 첫 번째 윤락행위였다. 딴 사내와 그 짓을 하면 탁 죽어 버릴 줄 알았는데, 자기도 하고 보니 결코 사람으로 못할 짓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일 안하고 돈을 더 받고, 긴장된 유쾌가 있고, 빌어먹는 것보다 점잖고...... 이것이야말로 삶의 비결이 아닌가, 그 후로 복녀는 성안에서 동냥한 거지를 만나면 돈을 꾸어달라고 매달리다가 같이 없어지고, 그러다가 왕서방이라는 중국사람을 만나 계속적인 관계를 갖는다. 복녀의 남편은 화를 내기는커녕 벌어온 돈을 같이 세면서 히히덕 거린다.

 

김동인의 <감자>는 점점 타락해 가는 여인상을 그렸다. 그러다가 왕서방에게 살해되고 잠시의 타협이 왕서방과 복녀의 남편 사이를 오가고 난 후에, 아무도 모르게 한의사의 사망진단서 한 장으로 복녀의 시신이 공동묘지로 향한다. 복녀 남편의 손에는 10원짜리 석장, 한방의에게는 10원짜리 두 장이 쥐어지는 장면으로 끝난다. 과연 김동인이 <감자>를 통하여 독자에게 남긴 여운이 무엇일까? 그저 허망하다. 너무 놀랐다. 그럴 수가 있느냐? 도대체 이 작품에는 잘난 놈도 없고 못난 놈도 없으며, 다 도둑놈이고 흑색의 타협가며 음모가다. 대충 이런 식으로 독자의 뇌리에 박혀 쓸쓸할 뿐인 것이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도 역시 주인공의 휴머니즘적인 사고방식에도 불구하고 종말은 허망하다. 설렁탕 국물이라도 먹고 싶다는 병든 아내의 말에 욕지거리를 던지고 나온 주인공이지만, 하루 종일 아내의 말에 사로잡혀 인력거를 열심히 끈다. 재수 좋은 날이라서 저녁에는 돈을 제법 손에 쥐었다. 그 투박한 발걸음으로 설렁탕을 사들고 방에 들어선 순간, 아내는 이미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다. 왼손인생은 숟가락질 한번 해보지 못하고 떠난 것이었다.


삶은 눈감는 순간까지 놓지 못하는 것이 있다. 바로 눈앞에 죽음이 닥쳐도 좀 더 살고 싶은 욕망이라든가, 죽더라도 피안의 세계에 대한 기대라든가, 자기가 떠나도 남아있는 사람에 대한 사랑과 소망이다.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모든 인류의 종교와 사상과 철학은 늘 한 가지를 이야기한다. 바로 판도라 상자의 맨 밑바닥에 있던 희망이다. 이는 미지의 세계로 남겨졌던 왼손이 반복되는 숟가락질에 의하여 익숙하게 밥을 입에 떠 넣는 동작이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는 왼손잡이로 시작된 허생원의 가난과 외로움이 오랜 세월을, 달빛 타고 소금 뿌려진 듯한 메밀꽃밭을 바람처럼 스치다가, 또 스치다가...... 역시 왼손잡이로 희망의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나귀가 걷기 시작하였을 때 동이의 채찍은 왼손에 있었다. 오랫동안 어둑신같이 눈이 어두웠던 허생원도 이번에는 동이의 왼손잡이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