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오그스트 르느와르 (Pierre-Auguste Renoir)
르느와르는 1841년 2월 25일 양질의 도자기 생산으로 유명한 중부 플아스의 리모즈에서 출생하였다. 석공인 아버지와 재봉사인 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란 그는 4살에 파리로 이사와 7살에 기독교 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가난이 더 심해져 더 이상 르느와르를 학교에 보낼 수 없었던 부모님은 13살의 그를 학교에서 데려와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는 기술 훈련소에보냈다. 그가 담당한 일은 도자기의 윗그림 그리기 였다. 이 작업이 결국 평생화가로서의 길을 걷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17세가 될 때까지 이 훈련소를 다녔는데, 낮에는 이 곳에서 기술을 배우고, 저녁에는 무료로 하는 드로잉 수업에 가곤 했다. 르느와르는 그 때부터 아주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그의 애칭이 루벤스였다는 것과 그를 제자로 삼겠다고 자청했던 이가 있었다는 것이 이를 잘 나타내 준다. 그의 부모님은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의 아들의 재능을 살려주고 싶었지만, 당시 화가라는 직업이 가난으로 직통하는 확실한 지름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림에 남다른 재능과 열정을 가지고 있던 르느와르는 결국 부모님의 어려운 선택에 힘입어 20세가 되던 1861년에 국립 에콜 데 보자르에 들어가 글레르의 아틀리에에서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게 되었다. 화가가 되기로 그와 그의 가족이 결심을 굳힌 것이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아들로 태어난 그에게 그 길은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도구를 살 수도, 모델을 살 수도 없었고, 먹을 것을 사는 것에도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는 당시 글레르의 밑에서 함께 수학하며 촉망받던 의학도이자 부유한 화가 지망생인 바지우의 아파트에서 얹혀 살면서-물론 바지유의 집에 얹혀 산 것은 르느와르뿐만이 아니었다. 모네도 그들과 잠자리를 같이 했고, 시슬리도 얼마후 같은 건물로 이사오게 된다.-모델료가 들지 않는 자연을 직접 그리는데 몰두하였는데, 이것이 그를 훗날의 외광파의 일원으로 묶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르느와르의 운명이 그를 자연에만 몰두 하도록 두지는 않았는데, 운 좋게도 Lise란 18세 소녀를 친구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이 후 그녀는 그가 31세가 될 때까지 그의 작품의 모델이 되어주었다. 그의 전기작품에 자연과 함께 등장하는 여인은 거의 전부가 그녀이다.
글레르의 스튜디오를 나와 바티뇰에서 함께 살던 르느와르와 그의 친구들에게 화가 지망생으로서의 생활은 매우 힘든 것이었다. 매일매일 배고픔과 싸워야 했으며, 자기가 칠하고 싶은 물감을 살 돈이 없어, 온갖 색으로 그들의 캔버스를 물들일 순 없었지만, 그들은 꿈을 가지고 있었고, 자연에 대한 관찰의 즐거움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즐거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햇빛이 쏟아지던 숲 속에서 캔버스를 펼쳐 둔 르느와르와 그의 친구인 모네, 시슬리에게 자연은 시시각각 그 모습을 달리하는 경외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젊은 화가들이 화가로서 인정을 받는 것은 살롱에서 그들의 작품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인상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르느와르의 그림은 고전과 신화로 가득한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녹일 수가 없었다. 르느와르는 분개했지만 이런 이유로 자신의 기법을 바꾸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1870년 흉갑기병대로 2년 간의 프러시아전쟁 기간을 보내고 파리로 돌아온 르느와르는 동료들과 자신들만의 협회를 조직하여 전시회를 열 것을 제의하였고, 그의 총감독 하에 1874년 첫 번째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나 참담한 것이었다. 그들은 비평가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고, 관람객들은 매우 적었으며, 재정적인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결국 이듬해 재정적인 곤란을 해소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작품들을 경매에 부쳤지만 반응은 매우 냉담할 뿐이었다. 그들의 재정적인 힘이 되주었던 부유한 바지유의 전시와 더불어 이 사실은 그들에게 앞으로의 인생을 심각하게 재고해야만 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무렵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어준 화상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뒤랑-루엘 이었다. 그는 프러시아 전쟁기간에 런던에서 처음 모네와 시슬리를 알게 되었는데, 르느와르는 아마 모네를 통해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뒤랑-루엘을 통해 르느와르는 다른 여러 화상들을 만나고, 자신의 후원자들을 조직하게 되면서 커다란 힘을 얻게 된다. 즉 재정적인 어려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된 것이다.
이후 르느와르는 살롱에 다시 한 번 그의 작품들을 출품하게 되는데, 1878년과 79년 두 차례모두 살롱의 심사를 통과하게 된다. 특히 79년 그는 <샤르팡티에 부인과 자녀들의 초상>으로 살롱에서 엄청난 찬사를 받게 된다. 이때부터 그려진 작품들은 소위 살롱의 검증하에 출품되는 것으로 인정되어져 세계적으로 뻗어나가게 되어, 르느와르에게 부와 명성을 허락하게 된다. 자신만의 스튜디오를 파리에 갖게 되고 르느와르는 편안하게 작품활동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40세가 다 된 르느와르에게도 이 무렵에 사랑이 찾아왔는데, 무려 19살이나 연하인 20세의모자상 Aline Charigot가 그 주인공이었다. 1880년 처음 만난 그들에게서 5년 뒤 그들의 아들 Pierre가 태어나고, 10년 뒤 결혼하게 된다.
젊은 화가 지망생을 굶주림과 싸워야 했던 그에게 이제 더 이상의 시련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사랑하는 아내와 세 아들, 남부러울 것이 없는 그의 명성은 그의 지난날의 고생을 모두 잊게 해줄 만한 것이었다. 그의 작품 또한 여러 가지 전개 과정을 거쳐 발전과 성숙, 완성미를 모색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알제리, 이탈리아 등으로의 여행이 힘이 되주었다. 그는 이탈리아로의 그림여행을 통해 라파엘과 앵그르의 작품들을 자세히 관찰하게 되고, 그 결과 자신의 작품에 형태를 잡아 줄 보다 많은 윤곽선을 넣고, 색조를 좀더 차갑게 해야만 한다는 것을 느꼈다. -물론 어떤 이들은 르느와르의 작품의 이러한 변화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때부터 그려진 그의 작품들은 따라서 인상주의 작품이라기보다 고전주의 작품에 가까웠다. 물론 그의 그림이 가지는 사랑스러운 질감과 보풀거리는 듯한 느낌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좀더 어두워진 색조와 분명해진 윤곽선은 이전과 분명 구별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르느와르의 새로운 시도는 그리 성공하지 못하였다. 비평가들이나 후원자들에게는 낯선 것이 분명했고, 그들은 이런 르느와르의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결국 르느와르는 새로운 변혁을 시도하여 짙은 색조를 화면에서 격감시켰지만, 고전에 대한 선망은 죽는 날까지 감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그가 드가를 평생 찬사했음에서 보여진다.
기지에 넘치고 날카로우며, 독설적인 성격의 소유자-물론 만년의 르느와르는 마음씨 좋은할아버지로 변하였다고 한다.-르느와르는 유달리 라이벌 의식이 강했지만, 드가에게만은 예외였는데, 이는 그가 매우 높이 평가한 앵그르의 기법을 드가가 충실히 재현하여 발전 시켰기 때문이었다. 르느와르 이상으로 드가를 찬미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결국 르느와르는 다시 한번 새로운 변혁을 꿈꾸게 되는데, 자신의 작품에 보다 많은 빛과 밝음, 기쁨을 집어넣은 것이었다. 고전적 기법과 결합한 그의 이런 새로운 변혁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는 그이 작품에 대해 살롱 뿐 아니라 정부의 인정을 받았고, 심지어 그림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 조차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심각한 관절염은 그를 행복 속에만 있게 두지 않았다. 날이 차가워지면 그는 나갈 수도 없었고,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은 그를 괴롭게 했다. 르느와르가 그의 노년을 아내와프로방스 지방의칸에서 보낸 것은 아마도 이 영향이 컸을 것이다. 강수량이 매우 적은 프로방스지방의 일기는 르느와를로 하여금 작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손에 묶어 흔들리지 않게 한 붓은 예전 같은 붓의 터치를 어느정도 가능하게 해주었다.
1916년 그의 아내가 죽고 3년후 그가 사망할 때까지 그는 칸에 살았으며, 80세가 넘도록 작품활동을 계속했다고 한다.
슬픈 그림을 그린 적이 없는 유일한 화가라 불리울 만큼 그의 그림은 밝고 화사하며 아름다운 그림들 뿐이며, 따뜻한 색을 즐겨 사용하여 보는 사람들에게 저절로 따뜻한 느낌이 느껴지게 한다. 너무나 가난했지만 희망을 그렸고, 아름다운 빛을 묘사했으며 특히 검정색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결국 르느와르의 그림은 삶의 환희와 기쁨이 묻어나는 빛과 색채의 예술임에 틀림이 없다.
르느와르처럼 신화로 남은 화가는 많지만 소박한 행복을 추구하며 낙천적으로 살았던 화가는 없는 것 같다. 생전에 그림 한 점 팔지 못했으나 지금은 범작마저 몇백억원에 팔리는 빈센트 반 고흐가 그렇고, "영광을 막 잡으려는 순간에 죽다"라는 묘비명처럼 서른여섯에 요절한 모딜리아니도 그렇다.
물랭루즈의 꼽추 화가 툴루즈 로트렉, 멀고 먼 남태평양 타이티까지 흘러갔던 고갱, 살아 생전에 예술가로서 누릴 수 있는 성공과 명예, 부를 다 얻었지만 결코 행복한 삶을 살다가지 못한 피카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림은 사람의 영혼을 맑게 씻어주는 환희의 선물이 되어야 한다" "그림은 즐겁고 유쾌하고 예쁜 것이어야 한다" "풍경일 때는 그 속에서 산책을 하고 싶어지는 그림, 여체를 그린 그림일 때는 그들을 껴안고 싶어지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철학으로 삶의 기쁨과 환희를 현란한 빛과 색채의 융합을 통해 무려 5,000 여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시골무도회 / 1883년 작
두 남녀는 건조하고 반짝거리는 빛 속에서
몸을 밀착시킨 채 아라베스크 춤을 추고 있다.
젊은 남자의 팔에 안겨 춤을 추고 있는
여인의 은근한 시선이 마치 관람객을 바라보는 듯하다.
여인의 발그레한 뺨, 바닥에 떨어진 남자의 모자에서
시골무도회의 흥취가 물씬 느껴진다.
이 여인은 훗날 르누아르의 아내가 된 Aline이고,
남자는 르누아르의 친구로 기자이자 작가였던 폴 로트로 알려져 있다.
사진으로만 보던 화려한 치마의 색감이
직접보니 더 화려하다 못해 눈이 부실정도였다.
바느질하는 마리-테레즈 / 1882년 작
옆모습이고, 바느질에 몰두하고 있으며,
시선은 바느질 작업에 고정되어 있다.
따사로운 햇살의 화려한 색깔과 빛깔이
자연스럽게 비치고 있는 한낮의 풍경이다.
이 작품에는 어떠한 엄숙함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르느와르는 다만 단순하고 순수한 아름다움과
걱정없는 평온한 인생의 즐거움을 표현하려 했을 뿐이고,
화사한 빛이 하나되어 어우러지는
그 유연성과 순간성을 나타내고자 했다.
피아노 앞의 두 소녀 / 1893년 작
19세기 말엽 프랑스의 가정생활 환경을 상세하고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거칠거나 엄격함 등을 절제하고 색채를 엷고 부드럽게
온화한 황금빛등이 전형적인 르느와르적인 표현법이다.
마리-젤리 라포르트의 초상 / 1864년 작
많은 초상화를 그렸던 르느와르의 작품을 평할 때
[라꼬양의 초상화]와 더불어 자주 보여지는 초상화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후 3년만에 그린 작품인데도 뛰어나다.
Camille Corot이나 앵그르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한
이 작품속 여인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북받쳐 오르는 슬픔을 억지로 참고 있는 듯한 묘한 느낌을 받게된다.
라꼬양의 초상화 / 1865년 작
Le Moulin de la Galette / 1876년 작
몽마르트르에 있는 서민적인 야외 무도장에서
초여름의 햇빛이 나무 사이를 비추고
무리를 이룬 젊은 남녀의 춤과 즐거운 놀이를 그린 걸작.
The Luncheon of the Boating Party / 1881년 작
젊은 날의 기쁨을 찬미하는 이 그림속 인물들의
다양한 동작들은 우아하고 아름답게 표현되어있다.
보트 놀이나 공원에서의 사교모임에서 보이는
여인들의 우아한 의상, 아이들과 꽃의 등장으로
이상주의의 대기와 광선의 효과를 느끼게 한다.
어두운 명암을 쓰지않고도 햇빛과 그림자의 효과를 창조하는
르느와르의 기법이 두각을 나타내는 작품이다.
테라스에서 / 1879년 작
젊은 여인과 아이, 그리고 뜨개질 바구니 등은 피라미드 구도를 이루며,
인물들은 특정의 순간에 포착되어있어 친근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모자의 붉은 색은 주변의 색에 비해 두드러져보인다.
시카고 박물관에 모셔져 있다는데 직접 가보고 싶을 정도다.
Gabrielle with Jewelry / 1910년 작
왕성한 작품활동으로 성숙해 가던 시절에 얻었던
색채에 대한 지식으로 생동하면서도 미묘한 색채감을 보여주고 있다.
마비의 증세에도 불구하고 그를 휘몰았던
그림에 대한 의욕은 줄어들지 않았고
감동적으로 무르익은 이 작품은 어떤 일정한 방법이나
규칙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있다.
Oarsmen at Chatou / 1879년 작
햇살과 물빛을 잘 잡아내고 있는데
주황과 파랑은 원래 보색이라
배와 물은 더욱 대비되면서 강렬한 인상을 주고 있어
인상파 화가다운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Sleeping Girl / 1880년 작품
감각적인 즐거움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Seated Bather / 1884년 작
목욕하는 여인네들 그림중에서 널리 알려진 그림인데
비교적 젊은 시절에 그려진 작품이라 그런지
여인의 풍성함이 노년기에 그려진 작품들보다 훨씬 덜한 편이다.
Dance at Bougival / 1883년 작
밝고 신선하고 따뜻하고 풍요한 색채로
건강할대로 건강한 대기의 향기가 넘쳐 흐른다.
이 시기에 이탈리아 여행에서 알게된
폼페이 고대벽화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르느와르는
그때까지의 인상파풍의 미묘하게 배치되는 색채의 광휘를 억누르고,
대비를 이루는 아름다움과 명쾌한 방향으로 나갔다.
이 작품은 이러한 변화의 전환점을 이루는 시기의 것으로
당당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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