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와 독백

安貧-樂道

미송 2011. 10. 2. 10:41

 

安貧-樂道

 

 

혀끝이 따끔하다. 머그잔의 온도를 아니 물의 열기를 의식하지 않은 채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왼쪽 혀끝이 아릿하다. 커피물을 얹어놓고 주전자에서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어젯밤 먹은 포도 껍질들이 담긴 접시를 닦는다. 두 개의 머그잔 중에 가벼운 걸로 선택한다. 가끔은 잔의 무게까지 눈으로 재게 된다. 예전같으면 톡톡 털어냈을 개수대 걸림망에 음식물 찌꺼기를 물만 빼고 다시 넣어둔다. 한꺼번에 모이면 하지 뭐. 짐작이 서서히 늘어간다. 직감 보다 느리게 가늠하는 게 짐작일까. 자고 있는 남자의 기침소리 숨소리에도 저 남자가 지금 깨려고 하는구나, 아니면 더 자고 싶어서 싸인을 보내는구나, 감이 온다. 손끝에서 유난히 세게 부딪히며 달그락대는 그릇 씻는 소리에 아차 싶어 멈추게 된다. 자고 있을까 깨려는 중일까, 커피물을 이 인분으로 올릴까 반쯤 덜어낼까. 멈칫하며 가늠한다. 그리곤 얼른 내 방으로 와서 홀짝홀짝 토닥토닥 논다. 문자들과 흐르는 생각의 줄을 타고서 질긴 엉덩짝을 실험한다. 너의 허리가 얼마나 꼿꼿하게 가는지 두고 보자! 그러니 평소에 지금처럼 널널하게 늘어질 시간대에라도 너는 앉는 자세에 좋은 습관을 들여야 해. 자의론 어쩔 수 없는 수명의 한계, 그것이 너무 길어져서 지랄이지만, 힘껏 살려면 그 힘이 느껴질 때 그나마 힘껏 습관을 들여야지 안 그래? 북 치고 장구 치고 드럼치고 피아노치고 마인드 콘드롤이다.

 

일요일. 일이 없는 요일이라 일요일. 일이 없는 건 아니지 사실. 화장할 일만 없는 거지. 자꾸 말끝에 거지 거지 하면 진짜 거지 되는 건가. 알 수 없는 거지 것도 다 지 팔자소관이것지. 일요일이 좋은 건 일이 없어서라기 보단 화장하고 외출할 일을 제외할 수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장르를 벗어나 일단 낙서다 하고 시작하면 손끝이 활달해지는 건 마음에 부담을 덜기 때문인 것처럼 여자가 쓸데없이 아우트라인 강조하며 그림질 안 하고 있다는 건, 심적인 편안함의 표시다. 난 정말 50대 중반쯤의 여자가 진한 화장한 거 보면 한심해, 그 뿐이니 왜 곧은 몸은 배배 꼬면서 나이를 까먹는 행동을 하냐고요, 그러면 j는 넌 그 나이 돼서 안 그런다고 넘 자신할 거 없어, 일축한다. 겸손하란 의미겠지만 실쭉해진다 나는. 정말 엄마처럼 안 살고 싶고 엄마 안 닮고 싶어, 했는데 어느 날 두 아들이 똑같이 엄마 점점 외할머니 닮아 가 목소리까지 했을 때의 그 기분.

 

커피 줘...일정한 목소리가 일정할 즈음에 들린다. 지겹지도 않니 당신, 커피는. 커피물을 다시 올려야지 하며 나는 일어나겠지. 잠시 후, 난 또 무슨 말로 스크린을 만날까. 휙. 형광등 스위치를 내렸다. 이미 창밖은 환해졌다. 베란다 유리문 뿌염의 정도로 오늘의 날씨와 하늘의 맑고 흐림을 측정한다. 버릇처럼 아침해를 맞이하지만 하루하루의 첫느낌은 달랐겠다. 아니 다르다고 순간 생각하고 싶은 거겠지. 일곱 살 사내아이의 맨몸을 주무르듯 나는 건장한 남성을 만진다. 구석에 체취들을 열어 코끝에 킁킁 닿게 하면서 완전 이것은 히로뽕이나 마약 마시는 수준이네, 하는 그의 말을 떠올린다. 나이가 무슨 대수냐. 감각이 맞으면 늙고 젊음이 차이를 가져다주진 않는다. 숫자에 불과할 뿐인 시간들 흔적들.

 

너무 일찍 깼지? 그게 다 안빈낙도했다는 거겠지. 그 어떤 화두에도 의미부여로 반응하는 사람은 눈빛에 어제의 회한이 없다. 그저 맑은 날만 이어지듯 그래도 지루하지 않다는 듯 맑기만 한 눈동자를 보고 있는 순간은 곧 평화의 시간이다. 빈(貧)하여 도를 즐길 수 있는 건 누리거나 다스리거나 하는 거와는 좀 다른 뜻이다. 가난해도 그만큼의 기본 여유를 갖고 즐길 수 있다는 건 또 하나의 힘의 응결력이다. 부와 낙도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여기까진, 커피를 타다 주면서 나눈 대화의 일부분이다.

 

그가 다시 제 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다시 음악에 귀 기울이고 앉아 타이핑을 한다.

 

새벽에 일어나 소설 감상문을 끄적이고 예전에 얼핏 정리했던 시, 바타이유 에로티즘을 한번 더 펼쳐본다. 행갈이를 한다. 조르쥬 바타이유, 프랑스 소설가 이름 그대로를 시제목으로 올리다니. 가끔은 황당하고 대범하고 막무가내 정신을 갖고 사는 나의 모습을 엿보게 된다. 이토록 무모하고 끈질기고 고집스럽고 때론 괴이하기도 한 존재들이란 또 그리 시인이란 명함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간다. j는 일언지하에 그런 작자들의 군집을 정신병동 풍경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 중한 중독증으로부터 누가 구원해 낼 수 있으랴. 교회 안에 황제들처럼 제 각각 자기 작품에 자기가 왕이 되어 군림해 있고 자기가 천하제일의 말꾼이며 감시자가 되어 버렸는데. 간혹 시간적 정신적 여유를 가진 자들은 자기 외에 타인도 감시하고 지배하려고 깐죽댄다. 한심한 동인(同人)들!

 

타이피스트의 던지고 되받는 놀이안에서-그것은 거의 혼자놀기의 달인 수준- 시간은 회전하며 동시에 전진한다. 언젠가 자판을 외우면서 내 몸에 달린 손목과 손가락과 그 손끝의 감각운동을 관리하는 뇌의 연상작용에 대해 상상했다. 몸의 일부분인 손가락과 호모사피엔스의 뇌로부터 출발된 언어들이 일체감 속에 어울리는 동작이 과히 환상적일거란 생각을 했다. 그 중도에 서 있다고 봐야 하나 지금은, 아니, 먼 훗날의 모습은 그 도달점에 서 있을 수 있을까. 아니면 맨날 요 모양일까. 아무튼, 나는 이 순간도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해서 문자들을 날리고 있다. 던져진 존재의 한 독백이 어디 만큼에 닿아 절벽 아래 꽃으로 마무리될 지 그 시간도 장소도 대상도 없는 지향하는바 단지 그 바라는 바 문자들의 소망과 꿈을 힘차게 야무지게 그러나 다소 맹신에 가까운 광기의 열정으로 치고받고 때리고 받고 날리곤 한다. 재밌지 않는가. 너의 말이 나의 말이 이 모든 말들이 무중력의 허공에 정체불명으로 뜬 한 조각 구름이라해도 한낱 썩지도 죽지도 못할 넋이라 해도. 이것이 가난 속에서의 낙이라면, 그 낙을 누리는 자체가 곧 깨달음임을 조금씩 느껴가는 순간이라면 찰라의 빛이라면 더 더욱!  (OHj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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