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김경주<연출의 변>

미송 2011. 10. 10. 09:27

연출의 변 / 김경주

 

아프리카엔 무지개를 잡아오는 것으로 성인식을 치르는 부족이 있었다고 한다. 일생의 마지막이 다 되어서야 성인식을 치르는 그 부족은 자신의 차례가 오면 남몰래 길을 떠났다. 무지개를 찾는 손은 축축해져갔다. 허공은 매일 활시위로 붉어졌다. 화살은 날아가 박히지 않았다. 뼛속으로 흘러와 뼈끝까지 달려간 무지개에선 새벽닭이 우는 소리가 자주 들렸다. 무지개를 쫒아 돌아다니는 동안 그들은 자신들이 차츰 헛것을 쫓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활을 다 사용하게 된다면 마지막 남은 화살은 서로의 눈알에 박아주자고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서로의 눈을 의심하지 않고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무지개는 언어로 부르면 사라지고 무덤으로 부르면 차디찬 햇빛에 감겨 떠 있었다. 무지개를 발견할 때마다 그들은 늘 한쪽의 눈으로 서로의 눈에 활을 겨누고 있었고 다른 하나의 눈으론 피가 배지 않는 허공을 보고 있었다. 마지막 활시위가 손에서 떨어졌다. 그들은 받은 활 속으로 늪처럼 잠겨들었다. 헛것의 비극으로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헛것인 지금, 무지개 속에 뼈를 남기는 편이 낫다고 믿었다. 피눈물 속에 뜨는 무지개는 살아서 멀었다. 성인이 존재하지 않는 그 부족은 멸종해갔다. 피에 젖은 무지개는 마을로 돌아오지 못했다. 기다리는 자들도 없었고 자신의 차례가 되면 활 통을 메고 길을 나섰다. 간혹, 무지개까지 풀쩍 뛰어올랐다가 웃음이 많아진 사자는 식물을 먹기 시작했다고 하는 소문을 듣기도 했다. 혹자는 여기까지를 무지개를 숭배한 어느 이교도의 성인식이라고 부른다. 나는 여기에 ‘날아가 행동 위를 부유했다’라고 써둔다. 거기에 새는 가늘고 기다란 손가락 뼈 하나를 구부려주었다. 무지개는 빛의 멀미들이라고 내 배우들은 홀리느라 스스로 배후가 되었다.

 

 

 

시집을 거꾸로 읽어 나간다.

시집을 거꾸로 읽는 것은 내 개인적이 취향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늘 그런 것은 아니다.

마음에 여유가 없을때 간혹 앞장보다는 뒷장부터 읽는다.

그래야 끝까지 다 읽어낼 수 있을거 같은 예감이 든다.

이 시집은 웬지 답답한 기분에 휩싸여 있는 내 가슴을

뻥 뚫어주는 기분이 드는 시집이다.

언어의 한계, 그리고 표현의 한계, 사유의 한계

이 속에서 버둥거리는 나에게

동앗줄처럼 내려온 선물같은 것

이 줄을 잡고 이 답답한 우물에서 빠져 나올 수 만 있다면

이 가을이 덜 힘들것도 같은데

너무 여유가 없다. 

 

- 김경주 시인의 <기담>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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