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장산 단풍 / 엄재국
절집 처마에 물고기 한 마리 누가 배를 갈라 놨다
토막치지 않은 걸 보니, 저놈이 대구나 동태라면
고기맛 아는 자가 내장만 꺼내 갔을지 모른다.
한정드는 싸늘한 가을, 무 숭숭 썰어넣은 얼큰 시원한 내장탕
부처님 눈길을 비켜선 자리여서 충분히 짐작이 간다
절 아래 내장탕집에서 내장 든든하게 채우고 둘러보는 늦가을 내장산
타오르는 불꽃의 단풍 속에 올려놓은 냄비 같은 내장사
부글 부글, 내장이 끓고 있다
2
어린굴비 / 김진기
뚝배기 청국장을 시켰는데
자라다 만 새끼 굴비가 따라 나왔다
눈 자위엔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한동안 내 눈과 마주한 어린굴비
대가리와 껍질 속살까지
해류에 단련되지 않은 비린 육질
내키지 않은 식욕 사이에서 내 젓가락은 가늘게 떨었다
어미를 따라 바닷가에 나섰다가 그만,
이 식당 접시위에서 나와 마주친 인연
하지만 어쩌랴
너는 이미 돌아갈 수 없는 몸
프라이팬에 녹아내린 질척한
바다의 기억은 지워야 한다
내가 사는 이곳도 격랑이 일어
덫에 걸리고 암초에 부딪히기 일쑤
달궈진 석쇠에 오르듯 마음을 다 잡기도 했다
조각조각 찢어져 뭍에 오른 바다를 집어먹고
내 슬픔을 위로할 시간,
하지만 내 손은 자꾸 너를 비껴만 간다
어린 굴비가 나를 빤히 쳐다만 본다
3
폐광촌 / 엄재국
늦은밤
어둠에 익숙한 작업복을 입고 갱도를 향한다
갱도를 막고 있던 달이 뽑혀져 공중에 버려져 있던 그 날
채탄부 몇 명이 규폐 판정을 받았다
기침을 할 때마다 괴탄의 불꽃처럼 눈에서 불빛을 뿜었지만
아무 곳에도 불 붙지는 않았다
탄더미에 깔렸던 몇 명은 그 후 침묵했다
휘어진 레일 같은 미망인의 검은 눈물에 섞여
아이들의 울음이 갱도를 타고 흘렀지만
없었던 일로 만든 것은 몇 장의 지폐였다
아직 붙지 않은 불을 끄려는 듯 골짜기에 비바람이 분다
한동안 그들의 곁에 묵묵히 서 있던 나무들은 본색을 드러내고
미친 듯 설쳤다
자신의 폐부를 들어내던 산은 기어이
검은 피를 강으로 토해냈고
그 강에 빠져든 사람들은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비계를 한 입 물고 역전 정육점 시궁창에
욕지기를 해댔고 가끔씩 흰 이빨을 드러내고
마주보며 웃음을 짓기도 했다
막장엔 그들이 뱉아 놓은 몇삽의 가래와
쿨럭이던 시대의 기침이 화석으로 굳어 있다
그들은 밤의 구실이 되어주는 탄덩이며
한 개비의 장작이었지만 그마저 아는 자는 없었다
해가지면
산 속에 묻혀있던 오랜 침묵의 어둠들이 골짜기를 점령하고
수없이 검은 꽃들을 꺾어 날랐던 보상으로
그들의 상처난 가슴만큼의 어둠을 지급했다
간혹 거부한 자도 있었지만 시간은 정해져 있었다
산의 내장 깊숙이 골짜기의 어둠을 거두어 들일 때까지.
이곳엔 낮과 밤의 경계가 없다
해가 뜨는 자리와 그 두께가 분명치 않다는 걸 아무도 모른다.
4
얼음의 문장 1 / 송찬호
누가 밟았기에 계단이 저렇게 꺾였을까, 악마가?
꺾였다 다시 일어나는 저 완강한 악마의 계단들
난 계단과 싸운다
치유할 수 없다 탁발승의 굳은 발바닥아 수도승의 돌대가리야
더러운 성병에 걸린 그 여자를 놓아다오
냄새 나는 음부야 썩어가는 다리야, 와서 이 결혼식을 즐겨다오
이 끔직한 부재의, 가시 돋히도록, 거칠게나마 나는 그 가시로
밤을 둘러칠 것이다 그 가시로 밝힌 붉은 밤들을 서약할 것이다
오, 부재의 처녀지! 난 신부를 끌고 그 밤의 골짜기를 건널 것이다
..........그리고, 결혼식이 끝나고 그렇게 결정된
매장지에 두 개의 몸을 뉘었다 한없이 낮고 느린 노랫소리,
장지 사라들에 의해 나는 그녀의 몸 속에 매장되었다
내 부재가 그토록 무거웠던가, 저 몸서리쳐지는, 부재의 꼭대기,
난 죽어 있으므로 그 계단을 일으켜세워 보여줄 수 있기까지 하다
송찬호 시집[10년 동안의 빈 의자 28쪽]
5
무제 3 / 송찬호
누가 이 촛불을 켤 수 있었을까 식물은 유리 속에 잠들어 있고 화약은 아직 격발을 몰랐을 때, 결혼식은 성대하였다 초대받은 不在者들, 헤아려진 돈, 편력 없는 구두, 10년 동안의 빈 의자, 퍼뜨려진 전염병 그리고 휴일마다 반복되는 지상과 교회와의 굳건한 결혼식, 결혼식은 끝났다 정육점도 공장들도 훌륭히 완성되었다 이제 다시 신부를 데리고 隊商은 먼 나라로 결혼식을 이끌어가리라
.........나의 신부여, 내게도 이 결혼식을 준비해다오 이빛, 굽은 술잔을 네게 기울여 흘러가고 이 몸, 유리처럼 차디찬 바닥에 굴러떨어지리니
'운문과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경주<연출의 변> (0) | 2011.10.10 |
---|---|
노혜경<짧은 시간>외 (0) | 2011.10.10 |
박성우<오이를 씹다가> 외 6편 (0) | 2011.09.30 |
손보미<육인용 식탁> (0) | 2011.09.29 |
정용준<돼지가 방으로 들어간다> (0) | 2011.09.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