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김경인<소행성에서 온 편지>

미송 2011. 11. 1. 18:58

소행성에서 온 편지 / 김경인

 

나는 나로부터 사월입니다

사방은 차츰 빛을 잃어 가는 양 떼의 희미한 울음소리

로 가득합니다 나는 독 오른 꼬리를 한껏 치켜들고 밤의

서랍이 쏟아 내는 은빛 알갱이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천

문학자의 예상대로라면 이 행성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

겠지요 수억 년 동안 검게 물결치는 밤의 입술이 마지막

으로 나직이 흘려보내는 글자들을 받아 적으며 그를 기

다립니다 방울뱀의 허물과 하나둘씩 흩어지는 별자리들

의 지도……이 작고 푸른 행성은 부스러기뿐입니다 이곳

에서 나는 깨지지 않는 둥근 돌의 매끄러운 감촉 대신 사

라지는 빛, 한순간 차오르는 어둠을 기록해야 합니다 똑

바로 걸을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뒤뚱거리

는 두 발 대신 꼬리를 달았듯이. 나는 알 수 없는 표정으

로 흔들리는 모슬린 커튼의 달빛을 뒤로한 채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는 모래알처럼 나로부터 천천히 걸어 나와 모래

언덕에 도착했습니다 모래가 나를 덮을수록 기록은 확연

해져 갑니다 이 행성의 관습대로라면 시간은, 따뜻한 물

의 기억에 잠겨 일렁이는 여린 이파리 대신 먼 여행의 끝

에 다다른 죽은 낙타의 텅 빈 동공을 먼저 펼치겠지요 모

래가 쌓일수록 나는 선명해집니다 흔들리는 하나의 얼굴

을 맴돌며 공전과 자전을 거듭하는 여러 개의 고독한 얼

굴들을 품고서 세계는 이제 막 운행을 시작했습니다 항성

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별들이 선로 위에 쓰러지는 밤

입니다 나는 시든 꽃 이파리로 흩어지는 내 얼굴을 버리

고 환히 빛나는 독 오른 꼬리를 높이 들었습니다 나는 여

전히, 사월입니다 별자리를 잃고 희미해진 양들은 꿈속에

서 매애매애 웁니다 첫 페이지를 적은 아름다운 손목은

누구의 것입니까? 그는 수천 광년을 걸어오고 있습니다

마른 우물 속에 버려진 희디흰 얼굴들에 파란 지느러미가

돋기 시작합니다 나는 처음으로 진실을 쓰기 위해 찢겨진

첫 페이지를 펼쳤습니다

 

시집 <별은 시를 찾아온다> 중에서 

 

 

김경인 시인

출생 1972년 (만38세) | 쥐띠

출생지 서울

데뷔 2001년 문예중앙 시 '영화는 오후 5시와 6시 사이에 상영된다' 수상

학력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이 행성의 첫 페이지를 쓴 손길이 늘 궁금하다. 무슨 생각으로 이 별을 만들었으며, 우리의 역사는 얼마나 계속될 것인가? 앞으로 수십억 년 후 최후의 행복한 나날이 있을 것이고, 더 시간이 흐르면 태양이 팽창하고 지구는 뜨거워져 생물들은 죽고 해안선은 길어진다. 바다가 증발하고 대기도 공중으로 날아가 버린다. 지구는 생명도 공기도 없는 황폐한 행성이 되고, 마침내 하늘을 덮을 정도로 커진 태양이 지구를 삼킨다. (칼 세이건 코스모스’ 9) 그사이에, 방울뱀들은 꼬리를 쳐들고 사막의 하늘을 향해 멋진 소리를 낼 것이며, 만물은 교미하고 풍요로워질 것이고, 이렇게 아름다운 페이지들은 황홀한 사진첩처럼 종말을 향해 한 장 한 장 아깝게 넘어갈 것이며.....<서동욱>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엮어내었던 나의 시간들이 모슬린 커튼의 달빛처럼 흔들리기 시작한다. 삶은 알 수 없는 얼굴. 뉘라서 그를 삭지 않을 영원한 빛이라 말할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 우리는 모래언덕, 이후 사람들이 사막을 지나며 보게 될 죽은 낙타의 텅 빈 동공, 그것 뿐, 텅 빈 동공일 뿐이다. 운명의 짊을 풀어놓고 선로위에서 잠들던 우리. 고독한 너의 얼굴은 독 오른 꼬리를 치켜세운 채 사월로 회귀한다. 그것은 밤마다 일어나는 일. 처음으로 돌아가려 할 때마다 더듬는 기억. 돋은 날개로 양의 울음으로 파란 지느러미로 순례하는 우리의 목적은 진실을 쓰기 위해……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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