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빨강 /박성우
몰랐니? 너랑 나는 빨강, 새빨간 빨강이야
빨강이 없었으면 우린 태어나지도 못했지, 생각해 봐
엄마의 새침한 빨강과 아빠의 힘센 빨강
아, 은밀하게 아, 뜨겁게 아아, 숨 가쁘게
빨강과 빨강이 새빨갛게 겹치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 올 수 있었겠니?
빨강이 빨강으로 새빨갛게 번지지 않았다면
너와 내가 어떻게 지독한 사랑에 빠질 수 있었겠니?
우리는 빨강, 새빨간 빨강이야
그러니 우린 언제나 빨강에 감사해야 해
우리가 첫 월급 타서 빨강 내복을 사는 건
엄마 아빠의 빨강에 고마워할 줄 안다는 철든 인사!
빨강은 앵두처럼 새콤하고 딸기처럼 달콤해
빨강에선 또각또각 경쾌한 하이힐 소리가 나
빨강은 두근두근 통통 튀어, 우리에게 와
그러니 너도 둥글려 봐, 빠알강 하고 빨강을 둥글려봐
빨강에 들어있는 동그라미를 둥글려 꺼내봐
참 잘 했어요, 오늘 하루에도 빨강 동그라미를 쳐봐
주저할 거 없어, 추기경님도 빨강 옷을 입어
스님의 장삼자락에도 빨강이 새빨갛게 걸쳐져있어
빨강은 신성해, 빨강은 열정 빨강은 사랑
빨강은 혁명, 우리에겐 혁명이 필요해!
지루한 일상을 멋지게 한판 뒤엎을 빨강이 필요해
빨강은 네 안의 발랄한 끼야, 그러니 좀 튀어도 괜찮아
빨강은 우리를 세상에 오게 한 새빨간 빨강이니까
월간 『우리詩』 2011년 6월호 발표
박성우 시인
1971년 전북 정읍에서 출생. 원광대 문예창작과외 同 대학원 졸업.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거미〉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거미』(창작과비평, 2002)와 『거뜬한 잠』(창비, 2007)이 있음.
<감상>
청소년을 위한 시집 '난 빨강'을 냈던 시인을 기억한다. '난 빨강'이 '우린 빨강'으로 바뀌었네.
내용도 달라졌을까. 그땐, "난 발랑까진 빨강이 좋아" 노래했었는데, 오늘은 "우린 언제나 빨강에 감사해야 해" 말하고 있네. 왜?... 추기경님도 빨강 옷을 입으시니까. 어쨌든 어제의 빨강과 오늘의 빨강에 빠지지 않고 들어간 시어는 '끼'. 빠알강 빨강 새빨간 빨강...발성과 동시에 물들어 버릴 것 같은 색깔. 우수수 떨어지지 않을 듯한 탱글탱글한 빛깔. 그러나 가을꽃이라 부르고 싶던 오늘 본 낙엽들도 빨강이 든 채색화였다는 것. 고로 만인과 만물의 평등을 주장하려는 색깔이 아닐까, 빨강은 빠알강, 새빨간 빨강 거짓말 같은 빨강 빠알간 사랑은. <오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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