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
순록이 끄는 썰매가 백야 속의 눈폭풍 속을 달린다. 빙원은 넓다. 저 길을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순록과 가까운 사람이다. 누군가 어떤 목적지를 향해 얼마만큼의 짐을 싣고 가야하는지를 결정하려면 순록의 상태를 살펴보아야 한다. 눈보라가 덤불처럼 엉겨드는 들판을 썰매가 미끄러질 때, 썰매의 움직임은 실은 썰매의 것도 사람의 것도 아니다. 기다란 썰매 발을 달아 최소한의 운신의 거처를 만든 사람을 순록이 가엾이 여겨 행선지까지 건네주고 있다는 느낌. 순록 썰매는 순록이 끈다는 측면에서 순록의 것이 아니라 순록이 건네주고 있다는 측면에서 순록의 것이다.
인간도 네 발의 기원을 잃지 않았다면 네 발 가진 순록이나 순록의 무리를 따르는 북국의 개들처럼 눈 속을 좀더 자유롭게 헤쳐갈 수 있었을까. 두발 가진 존재로 진화하면서 인간은 문명의 이기를 창조하지만, 모든 창조가 우리를 진보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입증하는 슬픈 운명을 가지고 말았으니!. 인간의 문명이 생명의 세계와 좀더 화해롭게 상생할 수 있는 가능성의 시간이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는 걸까. 생명의 시계는 인간을 기다리지 않지만 인간을 연민하는 신의 입김이 우리에게 마지막 기회의 시간을 줄지도 모른다. 버리는 신이 있으면 줍는 신도 있다고 하던가. 인간의 문명으로 인해 지구가 망가져가는 것을 적막하게 지켜보던 우리가 버린 신의 눈망울이 젖어 있다. 우리가 버린 신의 눈빛들, 사람을 보호하고 도와주던 생명의 느낌들을 우리가 예사롭게 망각하곤 할 때, 멀리서 우는 심장 가진 것들의 호흡이 가파르다. 이것은 어쩌면 마지막 두근거림, 마지막 울음이다.
순록은 길이 들면 인간에게 순해진다. 하지만 인간을 떠나 몇 개월만 지나면 원래의 야생성으로 돌아간다. 순록이 인간에게 길드는 방식은 순록이 인간을 연민하는 방식과 통해있다. 순록은 강제로 길들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희생한다. 북국의 빙원 속에서 인간이 살길을 찾도록 도와주기 위해 그들은 기꺼이 인간의 썰매를 끌어준다. 이것을 순록에 대한 인간의 승리라거나, 순록을 인간이 길들였다고 표현하는 것은 실은 착각이다.
순록의 뿔은 산맥을 닮아있다. 눈 쌓인 산들이 거기에 어떤 형식으로든 연결된 것도 같고 순록에게 목줄을 매고 있는 사내의 몸속에 순록의 뿔과 같은 핏줄이 흐르는 것을 상상하게도 한다. 사람 앞에 순한 저 순록들이 실은 사내의 조상들을 키웠다는 것을 우리는 거의 잊고 말았지만, 사람의 어버이들은 에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순록의 피 속에 인간의 기원도 있다.
썰매를 끌어주고 있는 순록의 뒤를 개들이 따르는 풍경이 우리에게 속죄를 요구하지 않기를 바란다. 순록도 개도 사람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헌신하는 동안, 우리는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그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데, 인간의 시간은 그들을 위한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못하는 쪽으로 기울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그들을 단순히 이용가치 있는 한낱 ‘동물’로 생각할 때, 그들도 인간을 그들이 보여준 우애로부터 결국은 배제시키게 되지 않을까. 친구를 잃고 지구 위에서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은 없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형태로, 생명의 친구들에게 기대어 있기 때문이다.
눈밭을 걸어 대이동 하는 순록떼의 장관을 따라가는 다큐를 본적이 있다. 갓 태어난 어린 순록새끼들은 엄마의 발굽소리를 신호로 길을 간다고 하였다. 발굽소리, 그것은 심장소리와도 연결되어 있다. 툰드라 지대를 달려 북쪽을 향해가는 순록떼는 암컷들이 무리지어 움직이면 수컷들이 모여들어 수백 km씩 줄지어 이동한다. 누가 강제로 시킨 것도 아니건만, 순록의 무리는 처음보다 몇 백 갑절로 늘어난다. 생명계를 움직이는 암컷들의 지도력은 툰드라의 땅을 건너면서 새로운 신비를 낳는다. 우리가 기대어있는 생명의 신비는 어머니가 우리에게 베푼 보살핌의 요람 속에서 자라난다. 지구 위의 많은 동물들이 인간에게 주는 조건 없는 보살핌의 방식은 모성의 그것과 닮아있다. ‘길들인다’는 행위에서 인간 본위를 제거해보라. 길들인다는 것은 상대방이 기꺼이 길들여질 때 가능한 것이다. 상대방의 능동적인 ‘길듦’ 없이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길듦’은 없다. 우리는 우리 아닌 누군가를 위해 길들어본 적 있는가. 누군가를 위해 길들어본 적 없는 역사는 우월의 역사가 아니라 부끄러움의 역사다. 인간의 역사가 다시금 쓰여 져야 한다면 이 부끄러움 때문일 것이다.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장면은 눈 속에 구멍을 파 집을 만드는 북극곰의 눈동굴이다. 사랑을 하고 아기를 가진 어미곰이 여덟 달만에 세상에 내어놓은 갓난쟁이 곰은 어미곰의 푹신푹신한 털 위에서 평화롭게 놀고 있다. 어미곰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눈웃음을 짓는다. 100일 동안 눈 동굴 안에서 새끼에게 자신의 몸을 덜어 젖을 먹인 어미곰은 결국 해쓱해져 동굴 밖을 나오게 되지만, 지금 막 분만을 한 어미곰의 얼굴에는 미래에 대한 고뇌가 보이지 않는다. 어미곰이 아기곰에게 뜀박질과 사냥법을 가르치는 순간들 속에는 생명이 생명을 낳고 기르는 일의 숭엄이 일상적 놀이처럼 배어있다. 동물들은 사람처럼 잰체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자연스레 스스로의 생명감을 발현한다. 그런 점에서 동물들은 가장 현재적인 명상가들이다. 그들은 현재에 충실하고 현재를 가장 깊이 있게 감각하며 사는 것 같다. 그것은 인간이 오래전 잃어버린 미덕이기도 하다. 우리는 늘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미래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피폐해지지 않는가. 그래서 역사의 현자들은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라고, 그것이 행복을 여는 길이라고 가르치지만, 쓸데없는 걱정에 이미 오염된 인간은 날마다 아등바등하며 오지 않은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낮밤을 창백하게 전락시킨다.
북극의 사람들은 오로라를 조상의 영혼이 춤추는 모습이라고 말한다. 밤하늘에 너울거리는 하염없이 신비한 오로라를 본 동물들도 사람들처럼, 오로라가 자기 조상의 영혼이 추는 춤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사람에게 길들어준 순록과 개가 있다는 것.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애정을 가진 동물 가족들이 있다는 것. 이것은 우리가 지구 위의 이웃으로 통하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북극곰의 조상들, 순록들의 조상들, 사람의 조상들이 한데 엉기고 풀리며 북극의 하늘을 우주의 빛으로 수놓는 걸 상상한다. 기억하자. 우리는 같은 곳에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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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꼭 저러한 얼굴을 알고 있다. 소녀가 안고 있는 강아지의 얼굴 말이다. 저것은 내 얼굴이다. 강아지를 안고 있는 소녀의 얼굴도 알고 있다. 저것은 큰누님의 얼굴이다. 밑으로 동생들을 주렁주렁 가진 가난한 집안의 큰누님들은 스스로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포기하고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자청하곤 했다. 누가 그녀들에게 꼭 그러라고 시킨 것만도 아닌데, 그녀들은 아랫사람에게 무언가 해주어야한다는 마음을 눈물겹게 발현하곤 했다. 한 때 나는 내 어머니가 어머니와 아내와 며느리로서의 모든 의무를 잊고 나비처럼 새처럼 훨훨 날아가 주기를 바랐다. 한 때 나는 내 누이가 아랫동생들을 거두어야 한다는 의무로부터 자유롭게 오로지 자신의 삶을 향해 이기적인 존재가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또 한 때에 이르니, 어머니들과 누이들의 그 마음씀이 사람의 역사를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살만하게 유지하지 않았나싶기도 하다. 문제는 그 마음씀, 보살핌의 마음이 과거엔 오직 ‘그녀들’을 통해 전해져 왔다면, 이제는 그 보살핌에 더 많은 ‘그들’이 동참해야 한다는 것일 터이다. 인간의 역사가 ‘그녀들’을 혹사해 온 과거를 겸손히 반성하는 자리에 더 많은 그들이 그녀들의 마음을 배우고 익혀야 하는 때가 된 것이겠다. 그리고 한 걸음 더. 사람이 사람을 보살피는 일처럼, 사람이 동물이나 식물을 보살피는 일, 흙과 지구를 보살피는 일이 마땅하고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야 할 때가 도래했다는 것. 우리 모두의 생명이 지구 위에서 영위되기 위해 서로를 보살피는 따스한 윤리가 숨결처럼 자연스러워지지 않으면 미래의 생명을 누구도 예측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우리가 여태 나 아닌 다른 이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사람으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리 어머님과 큰누님 같은 이들의 보살핌이 우리 존재의 어디쯤에 민들레꽃씨 같은 것을 뿌려놓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누군가 우리 속에 생명의 씨앗을 뿌렸다. 강아지를 안은 소녀와 소녀에게 안긴 강아지는 서로를 보살피고 있는 존재들이다. 서로의 외로움을 보살펴주는 일 역시 존재가 충만해지는 보살핌 중 큰일이므로, 보살피는 일에는 궁극이 없다.
강아지들이 마당 한구석으로 모여든다. 이때 개들의 식사를 준비한 제일 큰 소녀의 시선을 나는 느낄 수 있다. 소녀는 이 아이들 모두를 먹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고 있는 눈치다. 소녀는 이미 자신의 밥을 동생들에게 반 너머 덜어준 다음인지도 모른다.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공생하는 법을 터득했던 사람들이 내 어렸을 때만해도 지금 우리 마을에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우리 사회는 빠르게 이기적이 되었다. 우리는 스스로의 이기성을 쿨한 개성의 발화로 세련되게 포장해도 좋은 참 편리한 시대를 살고 있다. 지금처럼 ‘이기’가 유혹적인 시대도 드물다. 우리는 노골적으로 부자 되는 것이 생의 목표라고 말하는 데 익숙해있다. 윤리의 문제, 선함‘의 가치, 공생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을 갈수록 촌스럽게 치부하곤 한다.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다. 동시에 이타성을 지닌 존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존재감의 밸런스가 한쪽으로만 과잉되게 쏠릴 때, 우리의 영혼은 척박한 난파를 피할 수 없어진다. 보라, 지구상에 살아있는 것들은 죄다, 의심의 여지없이, 수없이 많은 손길의 보살핌으로 존재하지 않는가. 우리는 누군가의 보살핌으로 이곳에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보살피려고 하지는 않으면서 보살펴주지 않는다고 칭얼거리는 마음들이 슬퍼지는 세기가 흘러가고 있다.
애완견을 키우는 집들이 늘어가지만 자기 집 개가 다른 집 개보다 더 예쁘게 치장된 개이기를 바라고 더 영양상태가 좋은 개이길 바랄뿐인 애완견 주인들이 득시글거린다. 그들에게 애완견은 순종인지 아닌지, 매력적인 털빛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 병력이 있는지 아닌지 등이 선택의 기준이 되는 그야말로 애완 상품인 경우가 흔하다. 인간의 공허를 포장하기 위한 역설적인 도구로 전락한 강아지들은 때로 슬퍼 보인다. 생명감 없는 수동적인 존재로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외로움을 함께 나누고 기대고자 하는 친구일 때, 개와 사람이 함께 있는 풍경은 비로소 아름다워진다.
동네 개들을 죄다 불러 모아 먹이를 주는 풍경의 안쪽에 희미한 눈물이 스미려고 한다. 온갖 잡종개들, 황구, 백구, 흑구들이 남루한대로 저마다 생명임을 잊지 않은 저 소녀들의 양은식기가 저 많은 식욕을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경계 없이 밥을 나누던 시절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를 착해지게 한다. 생명에 대한 본원적인 연민을 통해 우리는 사람다운 사람으로 자라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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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뒤편으로 김종삼 시인의 ‘묵화’처럼 하루가 저문다.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소 치던 아이들이 소와 함께 귀가한다. 소의 잔등을 두드려주던 할머니가 마을앞 다리를 먼저 지나갔으리라. 고단한 하루의 저물녘, 함께 발잔등이 부은 할머니와 소가 집에 돌아가 하루분의 노동을 경건히 쉬는 자리에 따스한 것들이 어룽거린다. 아이들이 소를 치는 일이야 실은 소와 놀아주는 일이거나, 소는 소대로 놀게 내버려두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놀다 오는 것일 텐데, 저들 나름의 놀이에는 하나의 규칙만이 있는지도 모른다. 언제든 서로의 잔등에 따뜻한 손을 얹어줄 수 있는 마음의 준비 같은 것 말이다.
소가 송아지를 순산했다고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의 내부는 얼마나 따뜻하고 정겨운가. 그러한 마음이 소를 같은 목숨붙이로 받아들이는 것이리라. 아프리카 마사이 사람들은 소똥집에 여러 개의 방을 만들어 그 중 큰 방을 송아지들에게 준다. 때로 사람이 소와 함께 자기도 한다. 몽골의 차탄족 또한 아기가 이불에 싸여 새근새근 자고 있는 오르츠(게르의 원형) 내부에 순록의 새끼도 함께 재운다. 그들에겐 식구와 식구 아닌 것의 개념이 온 땅으로 확장된다. 사람과 동물의 내남 없는 시절을 기억하는 것. 이 기억의 힘이 지구 위에서 아직 인간이 생존해도 좋은 단서가 되어주는 지도 모른다. 인간이 망쳐온 너무나 많은 것들 앞에서 일일이 속죄하기도 힘든 판국이니, 기억이라도 잘 보존해 가져가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눈보라 섞어 치는 궂은 날, 옛날 손수레에 실려 장터로 가는지 돼지가 타고 있다. 돼지를 데려가는 사내도 뒤에서 미는 아이도 돼지에게 정성을 다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저 길이 무엇을 향해 가는 길이건, 채찍을 든 몰이꾼의 방식을 버린 풍경이 주는 힘은 고즈넉하다. 뜻밖에도 저 속에 우리가 아직 인간적이었던 시절의 풍경이 진솔하게 녹아있음을 느낀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태초엔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서로를 연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별안간 깨닫게 해준다.
장터에 동물들을 데리고 나온 주인들의 착잡한 마음의 물결을 보라. 흰 염소와 마주 앉아있는 흰옷의 영감님이 흰 염소와 무어라 마지막 인사를 하는 것 같다. 깊은 눈매의 흰 염소가 오히려 영감님을 위로하는 것도 같다. 영감님은 염소에게 미안하다고,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널 팔 수 밖에 없노라고 이별의 인사를 하는 것 같고, 흰 염소는 내 다 안다고, 미안해하지 말라고, 집 식구들 잘 건사하라고 당부하는 것도 같다. 저마다 집짐승들을 데리고 나온 장터의 사람들 뒤편으로 삶의 애환들이 신산하지만, 식구들 떠나보내는 듯한 애처로움이 한 녘에 존재하는 시장이어서 사고파는 행위에도 ‘삶’이 들어있는 것이리라.
너른 마당을 뛰어다니며 자라는 닭들을 본 것이 도대체 언제인가. 닭들은 이제 죄다 손바닥만한 사육장에 갇혀 비육된다. 생명감을 고양하는 방식과는 너무나 다른 형태로 근근이 살아낸 비생명적 닭들이 알을 낳고 고기도 준다. 노니는 닭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어떤 소망이 담겨있는지 다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생명의 느낌과 시간을 느슨한 여유로 즐기거나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동물들을 사육하기 시작하면서 기다림의 시간을 잃었다. 기다림의 시간을 잃은 존재는 필연적으로 오만해진다. 오만이 저지르는 죄를 지구생태의 여러 문제들이 절박하게 우리 앞에 보여주고 있다. 닭들이 뛰어다니고, 그들을 바라보는 느긋한 시선이 있는 풍경 속에서 나는 더 오래 무언가 기다리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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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에 동물인형이 많은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월트 디즈니의 만화영화에 대한 싸늘한 시선도 있지만, 세계 각국에서 만들어지는 만화영화의 주인공들에 동물 캐릭터가 여전히 많은 것도 다행한 일이다. 모든 인형이 죄다 바비인형 같은 사람 인형만이었다면, 인형의 세계는 얼마나 단조로웠을 것인가. 생명 있는 무엇에나 쉽게 동화되는 아이들의 능력은 어른이 되면서 둔화된다. 아이들만이 동물 인형에게 말을 건다.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한다. 가장 광범한 형태의 애니미즘이 동물인형과 어린아이들 사이에 존재한다. 동물인형을 도닥이며 자장가를 불러주는 아이들의 세계. 곰인형의 발가락이 다쳤다고 붕대를 매주는 아이들의 세계. 동물인형들에게 자신의 고민을 얘기하며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는 아이들의 세계. 이것은 아직 우리가 순수를 입에 올릴 수 있는 근거 중 하나가 되어주고 있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세계에 빚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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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은 사람의 오랜 조력자였다. 말들은 어쩌면 사람의 큰형이나 큰누나들이다. 그이들은 사람보다 크고 우아하고 잘 달리고 당당하며 충만한 자존감을 가졌다. 사람의 역사는 그이들의 등 위에서 100년 앞을 내다볼 수 있었다. 큰 형제자매들인 말들이 사람을 등에 태울 때, 전쟁이나 일삼는 무기 따위는 함께 태우고 싶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이들은 그저 자신보다 작고 힘없고 잘 달리지 못하는 인간들을 등에 태워 좀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넓은 세상을 통해 인간의 존재가 스스로 넓고 우아해지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큰형과 큰누나들인 말들이 우아한 자태로 세상을 향해 성큼성큼 발을 내딛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한때 뉴질랜드 오클랜드 근처 바닷가 마을에서 7개월 남짓을 보내며 자주 말을 보았다. 들판으로 해변으로 사람을 이끄는 말의 온몸의 근육이 만들어내는 율동감을 엉덩이에 전해져오는 느낌으로 바라보곤 했다. 나는 윤기 나는 검은빛 말을 좋아한다. 때로는 갈빛, 때로는 흰빛 말도 좋다. 또 때로는, 알 수 없는 의지의 디자인인 듯 모호한 무늬를 가진 말들이 좋다. 점박이도 좋다. 순도 높은 단색의 빛을 지닌 말들이 아닌 다양한 무늬와 빛깔을 지닌 말들을 볼 때, 말들의 눈에 드는 사람도 그러하겠지, 싶은 생각이 들곤 한다. 혼종의 느낌이 있는 것들은 우리를 편안하게 한다. 순도의 질서가 지닌 황금률도 좋지만, 혼종의 자유분방함은 말 잔등 위의 사람들 얼굴에서도 금세 개성을 찾아내게 한다. 자연은 아무것도 규정짓지 않는다. 내가 옳다고 우기지 않는다. 인간만이 동물과 자연을 보호한다고 우기면서 순록을 가두고 말을 가둔다.
초원의 여인과 말. 저 여인을 본적이 있다. 당신도 그러할 것이다. 기억나지 않는다면 기억을 되짚어보라. 그녀는 페르세포네를 찾아 헤매던 어머니 데메테르이기도 하고 크게 기지개 한번 켜고 세상을 창조한 마고이기도 하다. 그녀가 정면을 향해 보고 있는 것들이 사무친다. 그녀의 조랑말은 차마 정면을 보지 못하고 있다. 말은 그녀 앞발이 놓인 풀을 쓰다듬을 뿐이다. 그녀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나는 듣는다. 지구상에서 사라진 동물들의 마지막 표정들과 울음이 그녀의 눈앞에서 재생되고 다시금 스러져간다. 나는 스러져가고 있는 벗들의 이름을 받아 적고, 해원을 소망하는 나무에 매달아 준다. 등을 달듯이 그들의 이름을 단다. 어디서 북소리 들린다. 저 북소리, 사라져가는 동물들과 함께 언젠가는 운명을 같이 하게 될 인간의 미래를 애달파하는 지구의 목소리인지도 모르겠다.
아즈에로 거미 원숭이. 바바리사자. 큰뿔산양. 캄차카 자이언트불곰. 큰하와이벌새. 여행비둘기. 뉴파운드랜드 흰늑대. 주머니늑대. 네브라스카늑대. 붉은 가젤. 발바도스 세수 너구리. 뉴잉글랜드 초원뇌조. 주머니 늑대. 치치카카 오레스티아. 일본 늑대. 큰낮 도마뱀부치. 쿠아과. 캐롤라이나 잉꼬. 보리에리 보아뱀. 케이프 붉은하트비스트. 세이셀 제비나비. 로드하우 대벌레. 카스피 호랑이. 웃는 올빼미. 얼룩 왈라비. 초승달발톱꼬리왈라비. 이브검은쇠숲개구리. 문홍머리오리. 극락잉꼬. 마다가스카르 뻐꾸기. 카리브 몽크 물범. 오클랜드 비오리. 해변밍크. 긴꼬리 보리쥐. 큰띠부리논병아리. 까치오리. 황금두꺼비. 산서사슴……
들어보라. 지구에서 이미 사라지고만 동물들의 이름 속에는 애틋한 상상력과 비애가 깃들어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은 인간의 이름을 부르게 한다. 그 속에 내 이름도 들어 있는 것만 같다.
환경재단 도요새 발행/ 환경사진전'움직이다' 삽입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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