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독(misprision)에 대하여
오독 또는 오해로 번역되는 misprision이라는 용어는 해롤드 블룸(미국의 저명한 문학비평가이자 예일대 교수 ; 저서- 독서의 기술)이 그의 <영향에 대한 불안>(1973)이라는 책에서 사용한 것으로 이는 시의 전통과 시인의 상상력 사이의 상충과 이에 따른 시인의 상상력의 방향을 보여 주는 용어이다. 블룸은 시적 영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시적 영향은 두 사람의 강력하고 독창적인 시인 사이에 일어나는 것으로 언제나 후대 시인의 이전 시인에 대한 오독이 이에 선행된다. 이러한 오독은 창조적인 수정작용으로서 이는 실제적이며 필요한 그릇된 해석이다. 르레상스 이래의 서구 시의 주요 전통은 풍요로운 시적 영향의 역사이다. 이는 또한 불안의 역사이고, 자기 구제적인 풍자의 역사이고, 왜곡과 심술궂고 고집스런 수정의 역사이다. 이런 것이 없었다면 현대시는 존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블룸이 위의 인용에서 말하고 있는 바는 오독의 중요성이다. 오독은 오인, 오독(misreading), 오해 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단어이다. 이러한 오독은 시의 새로운 전통이 계승되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하고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오독은 물론 한 시인과 다른 시인 사이에서 행해지지만, 비평가와 텍스트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여기에서 비평가를 독자로 바꿔 보면 독자와 텍스트 사이에서 일어나는 오독은 생산적인 의미의 생성을 위해 필수적이고 불가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텍스트와 독자 또는 한 시인과 다른 시인 사이의 동일화(identification)가 불가능하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더 나아가서 동일화가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동일화는 저자에 대한 독자의 종속적인 노예관계이고 또한 독자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오독에 의한 차별성(difference)은 "자유이며 또한 활력"이 된다. 따라서 텍스트의 산종을 가치 있게 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이 경우 오독은 의미를 확정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볼 때 끝없이 계속되는 열려진 의미의 확장일 뿐이다. 열려진 의미의 확장은 그러므로 산종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이는 또한 근본적으로 언어를 "산종의 상태"로 보는 데리다의 견해와도 같은 맥락에 있다.[중략]
언어는 기의의 부재 속에 존재하며 부단히 의미가 생성되지만 그 의미가 종결되지 않는 산종이다. 그리고 오독과 오해는 이러한 산종으로서의 언어가 필연적으로 불러오는 결과이다. 대단한 우연의 일치일지는 모르나, 셰익스피어 자신도 블룸이 쓴 misprison이라는 단어를 그의 소네트 87번에서 쓰고 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가 이 단어를 쓰고 있는 문맥은 공교롭게도 블룸이 쓰고 있는 의미와 부합하는 부분이 많다. 셰익스피어와 블룸이 의도하는 misprison의 의미를 살펴보기 전에 이 시를 먼저 보기로 하자.
잘 가시라! 그대는 내가 소유하기에 과분하여라.
아마도 그대는 자신의 가치를 알고 있으리라.
그대의 가치의 특허장은 그대를 석방하나니,
그대에의 내 인연은 이제 모두 끝났어라.
그대의 허락 없이 내 어찌 그대를 붙잡으리요?
또한 그런 부(富)를 지닐 자격이 내게 어디 있으리요?
이 아름다운 선물을 향유할 자격이 내게 없기에,
내 특허권은 시효가 끝나 원상으로 돌아가노라.
그대는 그대 자신의 진가를 몰랐거나
나를 잘못 보고 자신을 주었으리라.
그러므로 그대의 큰 선물은 오해로 주신 것이기에
바른 재량을 내리시자 그 선물은 본집으로 돌아가는 거니라.
꿈에 속는 듯 그대를 가졌었거니
잠잘 때는 황제요 깨면 그렇지 않아라.
-셰익스피어<소네트 87~93>
이 소네트는 통상적으로 '이별 소네트들' 이라고 분류되는 소네트들 중 첫번째 소네트이다. [중략] 이 소네트에서의 의미의 생성은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해서 일어난다. 그 하나의 축은(텍스트로서의) '그대의 현전이고 다른 하나의 축은 '그대'와의 작별이 의미하는 부재의 축이다. 이 시의 화자는 '그대'의 현전을 경험했다. 이러한 현전의 경험은 단지 오해에 의해 가능했다. 이제 화자는 이런 오해로 얻게 된 '그대'의 현전을 원상태인 부재로 되돌려 보내고자 한다.
이를 다른 말로 바꾸면 텍스트로서의 '그대'를 오독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의미 부여가 가능하지 않은 텍스트를 과잉 독서함으로써 이를 현전으로 받아들였다는 의미이다. 이제 화자는 이런 오해된 '그대' (텍스트)를 그저 의미 부여가 불가능한 빈 텍스트(empty text) 상태로 돌려보내고자 한다.
씨뿌림, 결혼, 그리고 시쓰기
젊은이를 내용으로 한 소네트에는 다음 두 가지 주제가 주축을 이룬다. 그 첫째는 젊은이에게 결혼할 것을 간청하는 주제이다. 젊은이의 용모는 준수하지만, 모든 것을 파괴라는 시간 앞에서는 그의 뛰어난 용모와 젊음이 영원토록 보존될 리는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네트>의 화자는 젊은이로 하여금 결혼할 것을 권고한다. 결혼하여 자손을 낳음으로써 젊은이는 자신의 젊음과 준수한 용모를 오랫동안 간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결혼은 씨뿌림이다. 이 시의 화자는 젊은이에게 결혼할 것을 권함으로써 그가 씨뿌림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또 다른 주제는 시인으로 하여금 젊은이의 아름다움을 시 속에 묘사함으로써, 그의 젊음의 아름다움이 영원토록 보존되기를 간청하고 있다. 그렇다면 결혼과 시(쓰기)는 시간이라는 파괴자로부터 젊음을 유지케 하는 두 가지의 방법이다. 이 둘은 모두 씨뿌림을 공통 인자로 가지고 있다. 결혼은 젊은이로 하여금 실제로 씨뿌리기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제도이며, 시(쓰기)는 산종에 의하여 씨뿌림이 이루어지는 경우이다. 이제 몇 편의 소네트를 읽음으로써 이를 보기로 하자.
눈앞의 거울을 들여다 보고 그대의 얼굴에게 이르시라.
이제 이 얼굴이 또 하나의 얼굴을 형성할 때가 왔노라고.
지금 새롭게 하여 재생(再生)시키지 않으면
그대는 세상을 기만하고 한 모성(母性)의 축복을 뺏는 것이라
그대에게 첫 가래질받는 것을
천히 여길 여성이 어디 있으리오?
또 그리고 남자로서 누가 자애(自愛)의 무덤에 묻혀,
후손의 대(代)를 끊으리요?
그대는 어머니의 거울이니, 어머니는 그대를 보고
그의 청춘의 아름다운 4월을 다시 찾으리라.
그대도 노경(老境)에 자식을 통하여
주름살이 잡히더라도 다시 황금시대를 볼 것이라.
그러나 그대가 잊어버려질 생애를 살고,
독신으로 죽는다면 그대의 모습도 같이 죽으리.
-셰익스피어<소네트 3번>
[중략] 그러면 씨뿌리기로서의 글쓰기는 무엇인가? 이는 지상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무법자인 시간으로부터 생명력을 지키는 일이다. 이는 결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떻게 해서 글쓰기가 시간의 파괴를 막을 수 있는가를 보기로 하자.
나 자신이 지닌 기우(杞愚)도
또는 미래의 일들을 꿈꿔 보는 이 넓은 세계의 영혼도
나의 진실한 사랑의 기한을 좌우하지 못하리라,
그 종말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계의 달은 월식을 잘 견디고
슬픈 겁장이들은 자신의 예언을 비웃는도다.
불안은 지금 확신을 갖게 되고
평화는 올리브나무의 영원한 번영을 선언하도다.
이 가장 향기로운 계절의 이슬에 젖어
나의 사랑은 생기를 띠고, 죽음도 나에게 굴복하도다.
죽음이 원한을 품는대도 나는 이 서툰 노래 속에 영생하리라.
죽음이 우둔하고 말 못하는 사람들을 욕되게 하더라도,
그대는 이 노래 속에서 그대의 기념비를 찾으리라.
폭군의 문장(紋章)과 황동(黃銅)의 능이 사라진 때에도.
-셰익스피어<소네트107번>
* 이정호 <영시의 포스트모던적 읽기 ; 글쓰기로서의 시쓰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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