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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과 풍차

미송 2011. 12. 17. 17:53

 

 

 

김영승과 풍차

 

 

김영승을 생각하면 풍차가 생각난다. 우리가 풍차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세계를 향해 돌진하는 한 사내의 풍경.

 

세르반떼스(M. Cervantes)의 돈 끼호테는 시대착오적이며 회화적인 아웃싸이더이며, 그 자신의 시대착오와 희화에 의해 당대를 환기한다. 하지만 김영승의 돈 끼호떼는 당대의 외곽에서 당대를 향해 돌진하는 아웃싸이더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정확히 인파이터이다. 그는 빙빙 돌며 잽을 날리는 아웃 복서가 아니다. 그의 인파이팅은 보는 이를 불안하게 만들지만, 그의 비시적(非詩的)이며 동시에 반시적(反詩的)인 언어들은 그 불안함 자체까지를 제 미학으로 삼는다. 진짜 아웃싸이더만이, 파워 넘치는 인파이터가 될 수 있다.

 

 

름다운 폐인

 

김영승은 아름다운 폐인이다. '아름다운 폐인'은 모순어법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이 말에서 모순을 느낀다면, 그것은 정제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단련해온 그 흔한 '방어본능'의 소산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우리 시대에는 오로지 폐인만이, 눈물겹게 아름다운 존재인지도 모른다.

 

나는 나를 수습해야 되겠다. 나는 나를 너무 濫容했다. 벌써 두

달하고도 열흘째 계속되고 있는 설사처럼 나는 여기저기 形體도

없이 마구 뿌려진다. 그래서 그렇게 濫用된 나에게는 생활에 쓰일

餘分의 내가 없다. 이때 나는 내가 아마 내일쯤이면 죽을 것이라는

豫言을 한다. 아니 그것은 豫言이라기보다는 正確한 計算이다. 나

는 이제 끝났다. 이 얼마나 즐거운 結論이냐. 나의 이런 結論 속에

는 내일쯤 설사가 멎기를 바라는 희망도 숨어 있다. 깔깔깔. 住民登

錄證에는 내가 一九五九年 十月 二十三日에 생겨났을 거라고 비교

적 자신만만하게 記載되어 있다. 一九五九年 十月 二十三日이라는

날짜, 이 날짜가 내 나이를 알 수 있는 唯一한 資料로 나와 나를 取

扱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提供된 지도 於焉 十七餘個 星霜. 내가 나

를 수습할 것을 計劃하고 있는 이때, 나도 이 자료를 토대로 내 나

이가 지금 滿十七歲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나는 이 사실을 暗記해

둬야겠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지 復習해야 되겠다. 아하 그렇다.

나는 바야흐로 滿十七歲인 것이다. 이 사실이 바로 決定的인 端緖

인 것이다.

 

以下省略. 未完成. 故意的인 未完成.

未完成의 未完成. 未完成의 未完成의  未完成. 未完成의 未完成의 未完成의

未完成의 未完成.

未完成의 未完成의 未完成의 未完成의 未完成의.....

끝. 나는 이제 끝났다.

 

- <현상 16> 전문 

 

위에 옮겨적은 시는 1977년에 씌어진 것이다. 이 시의 작자는 1959년에 태어났다. 그러니까 이 시는 채 스물이 되지 않은 영혼에 의해 씌어진 것이다. "나는 나를 너무 남용했다"는 진술은 삶과 미학의 안전지대를 염두에 둔 자의 발언일 수 없으므로 클리셰(cli·ché ;판에 박은 문구, 진부한 표현 생각 행동) 되지 않는다.

죽음과 설사를 간단하게 병치시키고 깔깔거리며 웃는 이 십칠세 소년은, 그후 이십여년이 더 지난 후에도 여전히 스스로를 '남용'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의 '남용'은 또 여전히, 어느것도 넘치지 않게 조절하며 살아가는 예의바른 자들을 조롱한다. 그것은 삶의 넘침이며 동시에 죽음의 넘침이지만, 한편으로 삶과 죽음의 팽팽한 경계선을 왕복운동하는 1인칭 언어의 넘침이기도 하다.

 

 

성과 권태

 

이 소년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문득, [반성]과 [권태]라는 초유의 시집을 우리에게 들이밀었다. 그의 '반성'은 더 나은 내일을 기약하기 위한 반성이 아니며, 그의 '권태'는 산문적 세계의 안락함에서 기인하는 권태가 아니다. 모든 것은 그 반대다. 차라리 그의 반성과 권태는 세계가 유포한 상식을 집요하게 희롱함으로써 모종의 무정부상태를 지향한다. 우리 시대의 돈 끼호떼가 전략으로 삼은 반성과 권태는 저 완강한 풍차의 세계를 향해 돌진하는 무기, 그 창이자 방패에 다름 아니다. 

 

언제나 그랬지만

갈수록 개인의 영역이 축소되고 말살되는

시대에 있어서 결코

한 개인의 노래만은 아닌 극복해야 할

자조적 실존의 비극적 아름다움-

상대적 가치로 환산되어

어쩔 수 없이 고도화된 미개한

정태적 표현방식으로 몰수된

그 모든 개별적 사례에 대해서

 

자아(또는 의식)과 세계(또는 대상)과의 격절현상 속에서

자아(또는 의식)과 세계(또는 대상)의 중간에 놓인

자아(또는 의식)의 주체로서의 또 하나의 자아(또는 의식)

또 하나의 자아(또는 의식)에 내재화된

원래의 자아(또는 의식)과 세계(또는 대상)에 대해서

 

분쇄된 자아(또는 의식)으로 도금된 분쇄된 세계(또는 대상)의

소유주 떠난 단자들

자아(또는 의식)의 편린이 묻은 세계(또는 대상)의 편린

그 비가시적 부유물질

 

자아(또는 의식)이 세계(또는 대상)에 투사되어 생성된

단자들의 상호 절대 고립된 시공

(....)

'훔쳐보기'만을 하는 변태성욕자처럼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한 불연속적 보고서의 작성자로 전락한

사실무근한

인간과 인간사와

그리고 '나'라고 하는 개체의 일들을

왜곡되게 기록한 것

 

내가 인정할 수 있는 서정시.

 

-<반성. 序> (반성. 민음사 1987) 부분

 

첫 시집의 맨 앞에 실린 이 시는 궁극적으로 "내가 인정할 수 있는 서정시"에 대한 일종의 선언문이다. 이 시는 관념적 술어들로 가득한 철학적 암호문처럼 읽힐 수 있다. 이 암호문은 친절한 언어기호들을 생략한 채 기나긴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기나긴 문장은 시의 마지막에 시 전체와 동격으로 설정되어 있는 단 하나의 명사절을 위해 바쳐진다. "내가 인정할 수 있는 서정시."

 

서정시라니? 그렇다. 이것은 관념적 술어들로 가득한 철학적 보편언어가 아니다. 그의 시에 흔히 등장하는 한자성어들과 철학적 명제들은 그것을 쓰는 자의 1인칭 파토스에 압도되어 본연의 의미를 잃는다. 지극히 관념적인 언어들로 가득한 이 시가 결코 관념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그 언어를 '발화'하는 자의 구체적이며 개별자적인 에너지가 관념의 보편성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개별화된 언어들은, 이 불연속적인, 비체계적인, 변태성욕자 같은, 사실무근한 세계에 던져진 일종의 선전포고로 나부낀다.

 

이 시들이, 정치적 유토피아의 열망으로 들끓던 저 80년대의 한가운데서 씌어졌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다. '선진국'을 향한 우파적 동경과 혁명 프로그램에 대한 좌파적 열망이 대립하던 그 시대는, 아직 '반성'과 '권태'라는 우리 시대의 상투어를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미학적이거나 정치적인 목적의식을 무장해제하고 그 황홀한 알몸으로 돌진하는 한 사내의 풍경을 목도했던 것이다.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 마지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반성 16> 전문

 

 

생포한 파리들을 열두 개의 소주병 속에 각각 한마리씩 넣고 뚜껑을 닫았다.

그 속에서도 자신만만하게 분주히 날아다니더니 한참 후엔 모두들 풀이 죽었다.

나는 개전의 정이 엿보이는 놈들을 하나씩 하나씩 석방했다.

 

-<권태 1> 전문

 

콧구멍을 쑤실 땐 대개 검지손가락이 적격인데 엄지손가락으로

쑤시는 여자가 있다. 나는 어느새 그 여자를 발견한 기쁨에 잠긴

다. 이러니 나는 아직도 어머니의 신임을 받기는 요원하다.

 

-<권태 2> 전문

 

이것은 '박제가 된 천재'의 삶이다. 하나의 완벽한 백치로서 스스로를 방기하는 것. 그것은 철학적 야유나 독설과 더불어 그의 육체가 당대를 견뎌내는 방식으로 택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자세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이 세계의 공식적 씨스템으로부터 몰수해버린 자의 풍경이며, 그럼으로써 아웃싸이더적 극한의 풍경을 보여준다. 무위와 위악은 저 거대한 성(城) 혹은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마지막 창과 방패이다.

 

 

시(卷詩), 혹은 '위대한 신경질'

 

쿤데라(M. Kundera)의 '느림'이 시대의 정신인 듯 찬양되고, 러셀 경(B. Russell)이 설파했던 '게으름'의 의미를 이제야 유행처럼 곱씹는 우리 시대를 그는 오래전에 통과했다. 그랬으므로 그는 지금 그곳에 없다. 지금 그가 헤매고 있는 곳은 남들이 버려둔 황량한 땅이다. 남들이 가지 않는 황량한 땅에서 끝끝대 적요로운 꽃을 피워내는 것. 그것은 '창조적 소수'의 조건이자 운명이다.

 

지금 그가 헤매는 사막을, 그의 표현을 빌려 '위대한 신경질'의 세계라고 명명할 수 있다.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가장 변화무쌍한

가장 변별성 높은

일촉즉발의

가장 큰,

 

滿開한 性器여,

 

性器의 萬歲三唱이여!

 

악어여

안면角 zero의 악어여

 

TV여,

 

악어떼

우글거리는

어린이 수영장이여

그 나체 수영장이여

決樂의, 決樂原則의 生地獄이여....

 

쓸데없이 '영탄'을 많이 하고 나니 느닷없이

부아가....

 

치밀고, 배가 고팠다.

 

-<滿開한 性器>(무소유보다 더 찬란한 극빈, 나남 2001) 부분

 

번성하는 쾌락의 제국에 대한 그의 '신경질'은 정말 '신경질'이다. 그것은 우회적 풍자가 아니라 직설적인 공격이다. 하지만 그는, 흔히 저열한 풍자가들이 그러하듯 자신을 괄호치고 대상을 공격하지 않는다. 위에 인용한 부분에서 중요한 것은 TV에 대한 풍자적 언어들 뒤에 매달린 행들이다. 그의 시에서 중요한 것은 메씨지 자체가 아니라 몌씨지로 환원되지 않는 '잉여적' 감각들이다. 가령 이런 구절들; "쓸데없이 '영탄'을 많이 하고 나니 느닷없이/ 부아가.....// 치밀고, 배가 고팠다." 이 구절들에 스며 있는 특유의 파토스가 없다면, TV에 대한 그의 '신경질'은 신랄한 풍자시와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잉여를 통해서 모종의 핵심에 이른다는 것, 잉여 자체를 통해서 시적 전언이 구성된다는 것, 이 역설이야말로 그의 시가 지닌 미적 비밀인지도 모른다. 가장 구체적이며 유일한 주체, 세계를 온몸으로 느끼고 비웃고 분노하며 그와 동시에 스스로를 부정하는 그 '나'를 치유불가능한 잉여로 드러내는 것, 그럼으로써 나와 타자, 혹은 자아와 세계 사이의 불연속적인 간극을 파고들어가는 것. 바로 이것이 '내가 인정할 수 있는 서정시'의 실체인지도 모른다.

 

이 기인한 서정시의 '맥락' 속에 들어오면, 세계의 어떤 언어도 저 서정적으로 들끓는 용광로 속으로 흔적없이 사라진다. 당신과 내가 쓰는 속물적이거나 일상적인 언어들, 당신과 내가 읽는 철학적이거나 추상적인 언어들, 당신과 내가 듣는 속어거나 비어거나 은어인 모든 언어들, 그리고 당신과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이 세계에 횡행하는 커뮤니케이션의 형식들. 이 모든 것들은 서로를 분별하지 않고 그의 서정적 용광로 속에서 끓어넘친다.

 

물론 이 극단적인 이질혼재와 수많은 인용, 그리고 타자의 말들은 이른바  '탈근대'의 핵심 테제인 진리성의 무장해제를 의도하지 않는다. 가치의 상대성 속에 익사한 자들은 그가 이루어내는 저 '맥락'의 용광로를 견뎌내지 못한다. 나와 너의 완고한 정신을 무장해제하고, 그 사이로 난 어떤 '틈새'를 파고들어가는 것, 그것이 그의 카니발적 언어들이 수행하는 전략이다.

 

최근에 그가 쓰고 있는 작품들은 '권시(卷詩)'라는 형식을 취한다고 한다. 일회적인 내면의 '흐름'에 모든 것을 맡기는 이 글쓰기의 형식은 물론 단순한 '형식'이 아니다. 그것은 1인칭 자아의 가장 구체적이며 자연스러운 발화를 통해 분열된 세계를 '용접'하려는 의지의 산물이다. 이 시도가 성공할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1인칭의 영혼이 이루어낼 세계는 모더니즘의 흔한 저 자폐적인 '의식의 흐름'과 정반대일 것이라는 것 정도이다.

 

 

 끼호테와 풍차, 그리고 김영승

 

세르반떼스의 [돈 끼호떼]가 근대문학의 출발점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중세 기사도소설의 관례를 절묘하게 패러디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라 만차의 시사 돈 끼호떼의 환상과 편력은, 그 자체로 세계에 편재한 수많은 균열과 증상들을 인화해준다. 풍차와 거대한 성(城) 사이에서 헤매는 그의 환상과 몽상은 시대착오적 풍경을 이루지만, 이제 우리 시대의 아웃싸이더는 능동적으로 장대한 착란이 미학을 의도한다. 우리 시대의 돈 끼호떼에게는 저 이상적인 기사 아마디스도, 영원하고 보편적인 사랑 둘시네아도, 충직한 하인 산초 빤사도, 믿음직한 말 로신안떼도 없다. 다만 풍차와 성 사이에서 흔들리는 이상하고 나른하며 견고한 풍경만이 하염없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이 풍경 안에 한 아웃사이더의 격렬한 인파이팅이 있다.

 

 

- 이장욱 <나의 우울한 모던보이>(창비, 2005)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