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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과 장미의 나날

미송 2011. 12. 20. 17:46

 

 

름과 장미의 나날

김춘수 [구름과 장미]

 

 

 

 

저마다 사람은 임을 가졌으나

임은

구름과 薔微 되어 오는 것

 

눈뜨면

물 위에 구름을 담아보곤

밤엔 뜰 薔微

마주앉아 울었노니

 

참으로 뉘가 보았으랴?

하염없는 날일수록

하늘만 하였지만

임은 구름과 薔微되어 오는 것

 

-<구름과 薔微>(김춘수 전집 1, 문장 1983) 전문

 

 

 

바람, 장미, 나비

 

결국 바람은 불고, 장미는 흔들릴 것이다. 그러니까 더이상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어떤 힘이, 이윽고 내 안에 쌓이고 쌓인 시적 관례를 파괴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관례의 파괴는 파괴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견딜 수 없다는 어떤 느낌에서 시각된다. 그것은 전위(前衛)의 심리적 조건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것은 형식실험 운운의 문제를 넘어서 있다. 미적 형식은 말의 외피가 아니라 세계와 자아를 포획하는 방식 자체이다. 그러니까 형식의 변화는 당연하게도 세계 자체의 변화를 수반한다. 장미를 현미경으로 바라볼 때, 바라보는 이 '형식'의 변화는 장미의 관습론적 존재론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렌즈에 투사된 장미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장미가 아니다. 그 장미는 관습적인 지각으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세계에 속해 있다.  

 

이제 바람과 장미와 나비는 다른 자세로 불고, 다른 자세로 흔들리며, 다른 자세로 날아간다. 그 다른 자세를 위해 시인의 눈과, 시인의 세계와, 시인의 일생은 끊임없이 흔들린다. 이글은 그 흔들림에 관한 상념이다.

 

 

구름과 장미

 

앞에 적은 '구름과 장미'는 김춘수의 첫 시집 <구름과 장미>의 맨 앞에 실린 시이다. 구름과 장미는 일종의 상징이며, 그 함의에 대해 그는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구름은 우리에게 아주 낯익은 말이지만, 장미는 낯선 말이다. 구름은 우리의 고전시가에도 많이 나오고 있지만, 장미는 전연 보이지가 않는다. 나의 내부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작은 금이 가 있었다. 구름을 보는 눈이 장미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구름은 감각으로 설명이 없이 나에게 부닥쳐왔지만, 장미는 관념으로 왔다.  -<의미에서 무의미까지> 부분

[중략]

 

 

구름과 장미의 나날

 

구름과 장미의 나날, 이것은 그의 기나긴 시적 편력을 요약하는 표현일는지도 모른다. 보편적 세계의 저 헛것으로 떠도는 관념(구름)들과 구체적 세계에 피고 지는 이 부질없는 실존(장미)에 대해서라면, 하긴 세상의 어느 시인이 하염없지 않았을 것인가. 그가 한때 머물렀던 무의미, 혹은 비대상(非對象)의 시학이란

하염없는 자유에 다름아니었을는지도, 혹시 모른다. 이 하염없음에 자유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가 말했듯 허무의 산물일 뿐이어서 역설적이다. 그것은 구름(관념)과 장미(세계) 어느 쪽에도 온전히 귀의하지 못했던 자의 비애일 터이다.

[중략]

 

 

역사, 그리고 구름과 장미

 

엉뚱한 얘기지만, 따르꼬프스끼의 말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민주주의는 예술의 적이다." 그러니까 '사회주의 독재'가 끝난 이후 '적'을 잃은 폴란드영화는 더 볼 것이 없다는 요지의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국의 어느 시인과 소설가가 나눴다는 대화처럼, '광주항쟁이 법적, 제도적으로 인정되었을 때 시나 소설은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도 비슷한 맥락이다. 하지만 이것이 타당한 질문일까? 쏘비에뜨가 무너진 후 '적'을 잃고 너덜너덜해진 쏠제니찐의 미학은, 애초부터 헛것이었을 터이다. 우리는 김수영과 김지하와 황지우의 시들에 대해 '적'을 제 필요조건으로 삼는 미학이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정치적인 '적'은 그들의 언어에 일종의 발화점이겠지만, 역사와 정치는 그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그들의 미학에 스며들었을 터이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이것은 '역사'에 대한 김춘수의 집요한 부정과 부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그는 '역사'에 종속된 미학을, 말 그대로, 혐오했다. 그는 '역사' 앞에서 언제나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제 중요한 것은 '역사에 대한 혐오'라는 역설적 역사성, 즉 반(反)역사성의 상대적 역사성을 측정하는 게 아닐 것이다. 

그의 '무의미'와 그의 '형이상학'과 그의 '언어실험'이 어느 깊은 지점에서 역사와 길항하거나 만나고 있는가를 질문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도스또예프스끼의 구름과 장미

 

이제 다시 '구름과 장미'의 마지막 구절로 돌아가자. "하염없는 날일수록/ 하늘만 하였지만/ 임은/ 구름과 장미 되어 오는 것". 하염없는 날들이 흘러가고 그의 님은 아직도 구름과 장미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형체 있는 것과 형체 없는 것, 만져지는 것과 만져지지 않는 것, 구체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 높은 것과 낮은 것, 그리고 결국에는 죄와 구원의 사이. 그가 일생을 다해 헤매온 이 간극은 그 자체로 도스또예프스끼적 세계의 한 변주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후기 저작인 [들림, 도스토예프스키]의 시 한편을 옮겨적는다.

 

불에 달군 인두로

옆구리를 지져봅니다

칼로 손톱을 따고

발톱을 따봅니다

얼마나 견딜까

저는 저의 상상력의 키를 재봅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것은

바벨탑의 형이상학,

저는 흔듭니다

무너져라 무너져라 하고

무너질 때까지,

그러나 어느 한 시인에게 했듯이

늦봄의 퍼런 가시 하나가

저를 찌릅니다 마침내 저를 죽입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7할이 물로 된 형이하의 이 몸뚱어리

이 창피를 어이하오리까

스승님,

자살 직전에

미욱한 제자 키리로프 올림.

 

-<존경하는 스타브로긴 스승께> (들림, 도스토예프스키, 민음사 1997)전문

 

 

구름과 장미의 행방

 

그가 거쳐온 구름과 장미의 나날을 읽고 있으면, 그가 가보지 않은 길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노년의 저 단아한 그리움에 이르기까지, 그의 편력은 구름과 장미 사이에서 구름과 장미 너머에까지 도달한다. 그것으로 그는 이미 그의 '님'을 먼발치로나마 희미하게 보았을는지도 모른다. 하긴 우리 모두의 '님'은 구름과 장미 사이에서 내내 깜빡이며 흘러가고 있을 것이지만, 어쩌면 깜빡인다는 것의 모호함 그 자체가 '님'의 실체일는지도 모른다. '님'의 진리와 실재는 깜빡이며 흘러가는 저 모호함 자체이다. 나는 그것을 그의 시 한편에서 다시 확인했다. 지금 우리의 눈앞에 무언가 흘러가고 있다. 그는 천천히, 다시 장미를 호명한다.

 

함초롬 스며든 향기로운 내음새, 눈물겨웁게도 저녁노을을 물들이고, 무너질 듯 외로운 밤을 불 밝히던 하나 호롱! 홀린 가슴은 또 한번 출렁이고....

출렁이며 흘려보낸 끝없는 바다! 깜빡이며 흘러간 아아 한송이 薔微! 

 

-<薔微의 행방>(김춘수 전집1> 전문   

 

 

이장욱<나의 우울한 모던보이>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