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수영을 읽는다는 것
김수영의 시는 당대의 상처를 찢고 핥았다. 그리고 시대의 쓰라림을 제 속에 취하도록 들이부었다. 한국현대사에서 시대와 시라는 키워드는 다음의 언명과 함께 시작해야 한다. 1960년 4월 19일 그리고 김수영. 김수영을 읽는 것은 폭포와 같았던 우리의 시대를 읽는 것이다. 서러움의 밑바닥에서
하지만 그가 남한으로 올 수 있게 되었을 때 김수영의 신분은 전쟁포로였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김수영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밑바닥의 고통을 느낀다. 존재 자체를 박탈당하면서도 기어코 살아남은 시인에게 남겨진 상황은 훈련소에서 그것이 가장 아래에 있는 고통은 아니었음을 알려준다. 그의 사랑하는 아내가 그가 믿었던 친구와 함께였던 것이다. 전쟁의 고통과 개인사의 아픔이 범벅된 젊은 날을 김수영은 견뎠다. 그가 지나온 마리서사茉莉書舍와 명동의 뒷골목, 시를 쓰던 그의 동료들과 술이 김수영의 곁에 있었지만 시인은 결국 혼자였다. 시대의 어두움을 가장 밑으로, 밑으로 통과한 시인에게 처음으로 남은 감정은 서러움이었다.
김수영의 흔적 중, 뭇사람의 뇌리에 가장 강하게 남아있는 것은 그의 사진이다. 움푹 들어간 양볼, 그것보다 더 얼굴 안에 위치한 큰 눈, 그 두 눈에서 뿜는 빛, 남루하기 이를 데 없는 흰 티까지. 그는 오른 팔에 머리를 기댄 채 어딘가를 골똘히 쳐다보고 있다. 짙은 눈썹 사이와 코밑에 선명한 주름은 폭포처럼 거침이 없다. 김수영의 이러한 인상은 과연 시인답다. 이제까지 어떤 시인이나 작가의 프로필 사진보다도 시인답고 또 시인답기 때문에 김수영답다. 확고부동한 그의 표정과 포즈는 지식인으로 지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표정이었다. 현실을 바로보아야 한다는 스스로의 명제에 괴로워했던 김수영. 그는 현실과 문학에 대해 항상 불평과 불만에 가득했으며, 거의 결벽에 가까운 성격으로 그것을 대했다. 그의 불평은 자의식의 발로였으며, 부족한 자유에 대한 갈망이었다. 그에게는 도무지 얻을 수 없을 것 같은 자유. 절대적 명제를 획득할 수 있는 혁명이 간절하게 필요했던 것이다.
이승만의 하야 소식을 들은 김수영은 몹시 감격해 흐느끼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러한 감격을 시를 쓰는 행위로 표출한다. 그는 밤새 술을 먹고, 다음날 열정적으로 시를 썼다. 술 먹은 다음날에 시를 쓰는 것은 김수영의 평소 습관이기도 했지만, 이 시기의 김수영은 예년에 비해 곱절이나 많은 시를 쏟아낸다. 혁명의 기운이 시인에게 강력한 감흥을 준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의 시들은 김수영이 평소에 열렬히 주장하던 시적 자유에 더욱 충실하다. 전통적인 시적 정조에서 벗어나 김수영 특유의 강인한 어투가 언어의 결에 따라 살아난 것이다. 김수영은 흥분과 환희와 더불어 시대와 시인, 시와 양심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 더욱 천착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남과 북이 통일이 되어야 진정한 자유가 올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좋은 세상을 위한 시, 통일을 위한 시, 통일이 된 이후에도 세상에 필요한 시를 김수영은 꿈꾸었다.
그러나 미처 과제를 해결할 겨를도 없이 서울 시내에 다시 군홧발 소리가 들려왔다. 박정희를 필두로 한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군인들의 반란은 일견 소란스럽게 보였던 서울의 봄을 단번에 정리해버렸다. 그것은 4·19혁명의 아픈 결말이었고, 김수영에게 있어서는 불구가 된 자유였다. 김수영은 자유를 노래하던 격정에 찬 시인에서 소시민의 삶을 되돌아보는 냉소적 시인이 되어 있었다.
5·16 이후 김수영은 동료의 집에 잠시 피신해 있었다. 반공을 국시로 한다는 그들의 공약은 김수영에게 공포를 불러왔다. 그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일주일 후 그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평소처럼 양계에 힘쓴다. 혁명이나 쿠데타와 상관없이 그의 생활은 전과 다름없었으나, 그의 정신은 불안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불안은 포기와 한탄이 되었다.
그를 읽는 것은 혁명을 읽는 것이자, 시대를 읽는 것이다. 김수영의 정신은 곧 자유의 정신이며, 그는 1960년대 문학의 진한 피이자 독한 술이었다. 그리고 그 정신은 지식인의 정신이 되어, 시인의 정신이 되어 지금까지 도도히 흐르고 있다. 1969년 6월에 교통사고로 김수영은 세상을 뜬다. 그의 죽음 이후에 우리를 잠식했던 유신과 긴급 조치와 계엄령을 그는 보고 있었을까. 그 깊고 퀭한 눈으로 말이다. 그는 아마도 가슴을 치며 분통을 터트리면서도 민중과 시민의 힘을 끝내 믿었을 것이다.
다음의 시처럼. |
글 서효인 | 시인, 2006년 계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지침』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