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칼럼

엄경희<사변적 언술의 시적 가능성>

미송 2012. 3. 11. 12:55

 

사변적 언술의 시적 가능성

 

 엄경희(문학평론가)

 

 

 1. 서정성에서 사변성으로

 

박남희 첫 시집 <폐차장 근처>(한국문연, 1999년)가 발간된 때와 그의 두 번째 시집이 묶어진 현 시점 사이에는 육 년에 가까운 시간의 간극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시인들이 삼 년 정도를 주기로 시집을 발간하고 있는 추세로 비추어본다면 이 시집은 상당히 오랜 시간을 끌며 생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육 년의 간극에는 어떤 번화들이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집에서 일차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시의 길이라 할 수 있다. <폐차장 근처>에 실린 시들이 시에 대한 보편적 시각에 의존해서 볼 때 비교적 적당한 길이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이 시집에 실려 있는 시들은 상대적으로 긴 언술로 짜여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길이의 형식적 변화는 시를 이끌고 가는 의식의 변화를 암시하는 징표이다. 그렇다면 그의 시는 어디에서 어디로 움직여가고 있는가?

 

날개와 울음이 만나면

하늘은 점점 어두워진다

어둑어둑

저녁들판을 떠메고 가는 것들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날개 없이

울음만 붙들고 서 있는

저 수수깡들.

 

-[새떼] 전문

 

시집 <폐차장 근처>에 실린 이 시는 저녁 들판의 쓸쓸한 풍경을 노래하고 있다. 울음만 붙들고 서 있는 수수깡들의 마른 몸과 그 몸이 비벼지면서 나는 소리는 우리의 내면을 처연함으로 물들인다. 그의 첫 시집에 실려 있는 시편들이 이처럼 서정적 울림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단언할 수 없지만 이번 시집과 비교해서 본다면 박남희의 첫 시집은 정감에 호소하는 서정적 틀이 우세하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세월도 멀리에서 보면 맛있다. / 굽어보면 냠냠, / 강물도 맛있다. 참, / 그 옆을 샛강처럼 흐르는 눈물도 맛있다. 산토끼야.” -산수유

 

“적막을 빵처럼 뜯어먹으며 구름이 물통을 들고 걸어갔다 구름은 조금씩 햇빛에 흙을 섞어 쓸쓸한 집의 표정을 바꾸었다” -집짓기, “산자락이 아기를 쫓아가는 햇살의 웃음을 헹구어 하늘 한쪽에 붉은 노을을 널고 있었지” -대화, 와 같은 시구절이 환기하는 구체적 감각은 독자의 내부에서 정감으로 환원되는 서정적 언술의 파장력을 지닌다. 물론 이와같은 정감의 아름다움이 이번 시집에서 적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산으로 기러기떼가 빨려 들어간다

산이 아프다

산은 천천히 노을에 기댄다

기러기 떼가 산에서 나와

노을 속으로 들어간다

노을이 아프다

산은 노을에 기댈수록

자꾸 빠져든다

노을은 점점 붉어진다

노을이 아름다운 건 그 안에

기러기 떼가 있기 때문이다.

 

-[노을에 기대어] 전문

 

옆의 산,

옆의 들, 옆의

마을, 옆의 길, 옆의

구름, 옆의 바람, 옆의 어둠을,

거느리고

거느리고

거느리다가

모두 다 버린 빈 몸으로

달이 떠오른다

 

-[꽃에 관한 명상] 부분

 

 

이 두 편의 시가 독자의 내면을 단번에 사로잡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이들이 지닌 서정적 울림 때문일 것이다. [노을에 기대다]에서 시인은 산과 노을과 기러기 떼가 하나의 풍경으로 어우러져 있는 가을 저녁을 붉고 아프게 그려냄으로써 서로를 끌어당기는 사랑의 도취와 쓰라림을 유감없이 전달하고 있다. 사랑을 주제로 드러내고 있는 경우는 그의 다른 시 ‘꽃산 가네’ ‘우물’ ‘사랑’ ‘이카루스식 사랑법’ ‘이동 중 -자야에게’ ‘개기일식’등에서 반복되기도 한다. 이들 시는 그리움과 아픔, 동일화의 갈망과 같은 내용을 친숙한 서정시의 문법으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발상과 형식이 고전적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시 ‘꽃에 관한 명상’에서 감지되는 ‘덧없음’의 기의는 독자의 정서에 호소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을에 기대다’ 와 동일 계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덧없음의 기의는 이 시집에서 ‘나’의 존재방식과 연관된 사변적 지평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사랑, 추억 등을 노래하고 있는 서정시편 외에 이 시집에는 후기자본주의 문화가 야기하는 반인민주의적 비속성과 불모성을 비판하고 있는 시들을 다수 발견할 수 있다. ‘비빔밥론’ ‘새에게’ ‘쟁반들’ ‘동굴 속의 벽화’ ‘이브의 거울’ ‘달력 산부인과’ 와 같은 시편이 그 예이다. 이들 시에서 자주 발견되는 아이러니적 목소리는 기계문명의 풍속을 적나라하게 꼬집고 있다는 점에서 간파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이 시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서정적 정감의 목소리나 문화비판의 목소리가 아니다. 이 시집에서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사변성이다. 이는 그의 첫 시집과 변별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서정성이 정감을 통해 인간 내면의 진실을 토로하는 방식이라면 사변성은 진리의 추구와 연관된다. 우리 시단에서 사변성이나 관념성이 비시적인 것으로 자주 간주되곤 하는데 이는 시가 정감에 호소하는 문학 장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장르 인식이 우리시의 사상적, 철학적 토대를 허약하게 만든 근본 요인이기도 하다. 사변적 언술이 논리적으로 진행될 때 그것은 철학적 언술이 되겠지만, 사변적 언술이 함축과 상징을 통해 구체성을 확보할 경우 그것은 시적 언술의 영역에 포함된다. 그런 의미에서 박남희의 사변 지향적 언술은 시적 언어의 새로운 지평을 열 가능성을 시사한다.

 

 

2. 근원을 찾아가는 사유의 행보

 

사변 지향적 언술은 ‘나’와 ‘세계’의 근원이 무엇인가 묻는 순간 시작된다. 여기에는 ‘왜’ ‘무엇이’ ‘어떻게’와 같은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이 내포되어 있다. 박남희의 시에서 ‘~ 때문이다’ ‘~을 알았다’ ‘곰곰이 ~을 생각하다’ ‘~이 궁금하다’ ‘~을 읽다’ ‘왜 ~을 여태 몰랐을까’ ‘~을 알지 못했다’ ‘~을 모른다’ 등과 같은 서술어를 빈번하게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그의 의식이 사변적 물음에 휩싸여 있음을 말해준다. 그는 앎과 모름 사이를 오가면서 진리에 다가가기를 열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변 지향성은 도를 깨우치는 과정과는 다르다. 그가 고행이나 명상, 수양 등에 의해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묻고 대답하고 발견하는 지적 작용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성수대교와 세계무역센터는 스스로 무너지고 싶

어서 무너졌는지도 모른다 무너지고 싶어도 무너질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무너지는 것도 행복이다.

그런데 무너지는 모든 것들은 구멍을 통해서 무너진다 구

멍 속으로 드나드는 바람과 흐느낌과 역사와 온갖 소문들까

지 무너짐에 봉사한다 언젠가 한번은 무너져 본 것이라야

구멍의 공포와 허전함과 무너짐의 짜릿한 스릴을 느낄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세상은 무너지는 것의 역사다 그렇게도

강성했던 바빌론과 로마의 벽에 나 있던 무수한 화살 구멍

들, 그렇게 바빌론과 로마는 무너졌다 그 역사는 지금도 구

멍을 통해 이야기되고 세상의 무수한 구멍 속으로 퍼져나간

다 역사의 총탄은 케네디를 관통하고, 클린턴도 구멍 근처

에서 무너졌다

 

하지만 구멍은 스스로의 몸을 구멍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의 이름을 사랑이라고, 역사라고, 때로는 천

재지변이라고 명명한다 구멍의 이름은 수시로 바뀐다

나는 벽에 못을 박으며 못 끝에서 확장되는 구멍을, 구멍

의 역사를 생각한다 아니 사랑을, 절망을, 위선을, 아니 아

니, 망치가 내려칠 내 손가락을, 그 아픔을…

 

-[못을 박으며] 전문

 

 

이 시는 역사란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는 것이고 역사의 무너짐은 ‘구멍’을 통해서 일어난다고 설명하면서 사랑과 역사와 천재지변을 ‘구멍’이라는 이름에 수렴시키고 있다. 이러한 논리를 적용시켜보면, 구멍에 박히는 못과 화자이 손가락 그리고 손가락의 아픔 또한 구멍 속에서 무너질 것이다. 무너짐으로 점철되는 시인의 시간의식으로부터 우리는 다시 한 번 ‘덧없음’의 기의와 마주하게 된다. 시인은 삶과 역사에 대한 이 같은 거시적 통찰을 망치에 얻어맞는 고통으로 의식에 각인시킨다.

 

‘무너지는 것의 역사’ 라는 허무주의적 인식에는 ‘나는 누구인가’ ‘무너짐 뒤에는 무엇이 남는가’ ‘지금의 삶은 어떤 가치가 있는가’와 같은 물음이 담겨 있다. 이런 종류의 물음 앞에 있는 자는 행복을 유보한 자이다. 그의 의식은 현실적 욕망을 가로질러 존재의 근원을 향해 자기를 열어놓는다. 그는 본래적 자아를 들여다볼 수 있는 행운과 본래적 자아의 비극성을 받아들여야 하는 불운을 동시에 경험하는 자이다. 이제 이 행운과 불운을 피해갈 수 없다는 사실 또한 그는 아는 자이다. 그렇다면 그는 ‘나는 어디에 있으며, 나는 누구인가’를 스스로에게 거듭 물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도 내가 열고 들어갈 지퍼 속에는 또 무엇이 기다리

고 있을까 생각하다가, 나는 화장실로 들어가 바지의 지퍼

를 내린다 신속히 내 지퍼 밖으로 빠져나가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저것들은 또 어느 지퍼 속으로 들어가 잠을 잘까? 나는

아직도 내가 무수히 열어보았던 지퍼들의 주소를 모른다 나

는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의 지퍼를 열고, 내가 며칠 동안 열

어보았던 주소들을 확인한다 아아, 열리기를 기다리던 저

무수한 유곽들,

 

-[지퍼] 부분

 

그 때 나는 주소를 알 수 없는 터널을 빠져나가 어디론가

달려가는 벌레의 속도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너무 빠른 벌

레는 왜 달려가다가 모두 찌그러지고, 제 몸을 토해놓은 터

널, 혹은 세상의 구멍들에게 제 속도의 근원을 캐묻지도 못

하고 으깨지는 방법부터 터득해 재빠르게 승천하려는지, 나

는 하릴없이 느리게 하늘을 기어가는 게으른 벌레에게 그

이유를 물어본 일이 있다

 

-[이상한 벌레] 부분

 

 

시‘지퍼’에서 수많은 지퍼의 안팎을 헤매고 있는 화자의 모습은 우리의 일상을 알레고리한다. 열고 닫고 들어가고 나오고 하는 일련의 행위들의 연속은 우리의 생활을 요약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나는 아직도 내가 무수히 열어보았던 지퍼들의 주소를 모른다’ 고 고백한다. 즉 그는 자신의 거처와 자신이 탐문했던 무수한 세계들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시‘이상한 벌레’ 에서도 시인은 근원을 캐묻지도 못한 채 질주하고 있는 우리의 인생 여정을 벌레의 알레고리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이 시는 찌그러지고, 으깨지면서 달려가고 있는 삶의 맹목적 방식에 대한 성찰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열리는 지퍼, 그 사이를 질주하고 있는 존재의 위태로움을 시인은 착잡한 시선으로 포착함으로써 삶과 존재에 대한 근원을 캐고 있음이리라. 그의 다른 시 ‘버릇’에서 시인은 “물은 제 근원을 거슬러 올라 / 태초의 시간으로 향하는 버릇이 있다 / 태초에게는 처음과 끝이 만나는 비밀스런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언술 이면에는 자기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이 시인의 숙명이 암시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밥을 먹을 때 밥은 식사가 되지만

밥이 나를 먹을 때 밥은 거대한 우주가 된다

내가 먹는 모든 것은 밥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밥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먹은 커다란 우주의 밥이다

나는 밥이라는 거대한 우주 속에서

밥이 되어 살고 있다

나는 밥을 먹고 거대한 우주의 밥이 된다

 

밥은 먹을 때는 잠시 포만감을 느끼지만

금방 다시 배가 고파진다

포만감은 밥의 기표가 아니다

포만감과 배고픔은 관념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배고픔에 속지 않는다

 

나는 누군가에게 먹히는 걸 좋아한다

밥이기 때문이다

하늘에 떠 있는 별들도 구름도 모두

나이 밥이지만

나 역시 그들의 밥이다

 

밥은 일방적으로 먹히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배고프므로 밥을 먹을 뿐

태양이 내 입속으로 들어가

항문으로 나오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내 속에서 밥과 낮이 교차할 때

배가 고픈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나는 단지 밥이므로,

 

-[밥] 전문

 

 

개체의 생성과 사멸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가? 거기에는 존재가 소비하는 일평생의 시간의 지속을 가능케 하는 ‘밥’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밥은 생명의 법칙을 이끄는 제 일의 원리이다. 그 밥은 거대한 우주로부터 생성된다. 우주에서 생성된 개체들은 우주에 귀속된다. 개체와 우주와의 이 같은 관계는 그의 다른 시에서 ‘주석註釋’ (‘주석에 들다’)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낱낱의 개체가 서로에게 밥이 되거나 주석이 되는 것이 우주의 법칙이다. 이 시는 개체의 존재방식을 이러한 ‘밥’의 상징으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에서 우주와 개체를 연결하고 있는 밥은 ‘포만감과 배고픔’이라는 육체적 감각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밥은 생성과 사멸의 운동성을 가능케 하는 동력이라는 점에서 우주의 이치와 질서를 상징한다. 이러한 질서 속에 ‘나’가 있으며 그 속에서 ‘밤과 낮이 교차’한다. 개체에게 거대한 우주의 질서에 따라 흘러가는 시간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책임질 수 없는 불가항력적 존재의 사태가 곧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우주적 시간 속에서 ‘나’는 밥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이것이 존재의 자명한 존재방식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런데 우주 속에 귀속되어 있는 소우주로서의 ‘나’의 존재방식이 밥이라는 상징으로 설명될 때, 다시 말해 개체의 죽음이 ‘밥’으로 단언될 때 존재의 비극적 심연을 감지하게 된다. ‘단지 밥’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는 실존을 인식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3. 사변적 언술의 진실과 함정

 

인간의 근원적 존재 방식에 무수한 질문을 던지면서 감행되고 있는 박남희의 사유의 행보는 현상에 도취할 수 없는 한 실존인의 초상을 말해준다. 끝없이 열리는 욕망이 지퍼들, 알 수없는 곳으로 질주하고 있는 일상의 존재들, 그리고 반성 없이 지나가는 시간들 사이에 그가 있다. 그의 사변적 언술이 철학 텍스트가 아니라 시에 수용될 경우 위험부담이 크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변 지향적 언술이 논리의 명료성에 그 생명성이 있다면 시적 언술은 그 생명성이 논리의 명료성을 뛰어넘는 애매성에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논리의 명료성과 애매성이라는 이율배반적 언어 운용의 법칙을 조화롭게 성취하지 못할 때 사변 지향적 시는 주제와 미감을 전달하는 데 실패하게 될 위험이 있다. 박남희의 시 또한 이와 같은 위험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는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태초에 신은 오독誤讀을 창조했다’ 라는 시를 일별해 보기로 하자.

 

그래서 인간은 태초부터 세상을 제각각 다르게 읽는다 세

상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몸조차 오독한다 오독은 인간 생존

의 필수 조건이다 그리하여 어둠은 어둠끼리 물방울은 물방

울끼리 책을 읽듯 서로의 몸을 섞어 신이 만들어 놓은 세상

의 질서와 경계를 허물고 그들만의 새로운 질서를 창조했다

그들에게는 오독이야말로 빛나는 창조성이다 그들의 문법

은 세상에서 새롭게 빛났으며 모든 피조물들이 오독을 통해

새롭게 신이 되었다

 

비가 온다 태초에도 그렇게 비는 내렸으리라 그 때고 개

굴개굴 개구리는 또 논배미에서 그렇게 울었으리라 그러나

이 땅의 창세기는 갔다 그리고 창세기는 또 이렇게 왔다 물

질이 물질을 만들고 그 물질이 또 다른 물질을 만드는 끝없

는 자기증식의 법칙이야말로 창조의 제일원리이다 오독을

통한 자기증식, 오독을 통해서 논바닥의 벼는 자라고 세상

은 시끄럽고 그래서 살만하고 행복하고, 행복이 불행이고

불행이 행복일수 있는 오독의 법칙 아래서

 

우리 모두는 오독의 주인이다 이 땅의 모든 길들은 누군

가 읽고 간 문장이다 그래서 날이 밝으면 새로운 길이 뚫리

고 그 길로 갖가지 옷을 걸쳐 입은 단어들이 오독의 표지판

쪽으로 달려간다 지금 빗방울 후둑이며 나를 읽고 세상을

읽고 있는 저것들, 나는 그들에게 내 몸을 맡긴다 이 땅의

새로운 창세기를 맡긴다 태초는 오늘 또 그렇게 시작됐다

 

이 시는 물질만능의 자기증식의 법칙이 오늘날 창조의 제일원리가 되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그런데 문제는 물질만능의 자기증식의 법칙을 오독과 연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의 파행적 구조를 낳는 것이 오독 때문이라면 여기서의 ‘오독’은 무엇을 함의하는가? 이러한 물음은 사용된 시어의 ‘애매성’을 묻는 것과는 다르다. 다시 말해서 적절성의 문제를 묻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굳이 해석해 본다면 ‘오독을 통한 자기증식, 오독을 통해서 논바닥의 벼는 자라고 세상은 시끄럽고 그래서 살 만하고 행복하고, 행복이 불행이고 불행이 행복일수 있는 오독의 법칙’이란 물질의 자기증식의 법칙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거기에 되취되어 있는 현대인들의 의식구조로 해석해 볼 수 있을 듯하다.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비판적 논리 전개를 위해 너무 많은 어휘들이 동원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신은 태초에 오독을 창조했다’는 전제가 보편적 이해나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논리인가를 묻게 된다. 해서 사변의 명쾌한 논리와 시적 언어의 애매성을 어떻게 조화롭게 운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직 다 해소되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시에서 사변적 언술을 감행하는 것은 이처럼 모험이고 위험하지만 그러나 인식론적 토대를 확장할 수 있는 중요한 언술 방식이라는 점에서, 시창작의 새로운 형식론을 낳을 가능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나는 박남희 시인이 이러한 모험과 도전을 끝끝내 감내하기를 기대한다.

 

박남희 시집<이불 속의 쥐>(2006, 문학과 경계) 135~151쪽.

 

 

 

 

천장 반자 위로

쥐가 뛰어다니던 시절

나는 잠을 자다가 문득

발 끝에 이상한 감촉을 느꼈다

소란스럽던 천장에서

내 은유의 이불 속으로 스며든 쥐가

뭉클하게 만져졌다

 

시가 뭉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