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칼럼

권혁웅- 시와 다성성(多聲性)

미송 2012. 3. 2. 16:58

 

 

시와 다성성(多聲性)

 

 

권혁웅

 

 

 

오랫동안 시는 독백에 해당하는 장르였다. 시에서 주체는 만상을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세워둔다. 주체가 하는 모든 행위에는 대상 곧 타자가 있지 않느냐고? 없다. 타자는 주체가 목적어 자리에 자신을 둘 때 생겨나는 또 다른 주체일 뿐이다. 내가 사랑하면 내가 사랑 받고, 내가 버리면 내가 버림받는다. 타자는 거울에 비친 주체의 왜곡된 상(像)에 지나지 않는다. 주체와 타자의 왕복이 있는 게 아니라, 주체와 변장한 주체의 교환이 있을 따름이다. 시에는 하나의 목소리만 있다. 타자의 목소리는 복화술사의 변성(變聲)과 같은 것이다. 어조의 강력한 힘은 여기서 나온다. 시는 태어났을 때부터 음악을 품고 있었는데, 이때의 음악이란 끊임없이 재귀하는 목소리로서의 그것이었다. 특별한 패턴을 가진 말이란, 그 패턴을 지닌 발화의 주체에 종속되는 말이다. 비유 역시 그렇다. 하나의 사물과 다른 사물을 강제로 잇는 비유의 완력은, 그 하나의 사물들 위를 선회하는 특별한 지배자, 곧 주체가 지닌 힘이다. 시의 주체는 무시무시한 독재자다. 거기엔 진정한 의미의 타자가 끼어들 틈이 없다.

 

장석원은 바로 이 점을 의심하는 데에서 시를 시작한다. "슬픔은 슬픔이고 죽음은 죽음이다"와 같은, "주어와 서술어가 같은, 복면한 이데아, 좀비 같은 말들이" (입속의 파충류) 바로 극복의 대상이다. 동어 반복은 동일성에 대한 분명한 지표다. 동일성에 대한 시인의 적의는, 그 말들이 위장된 이데올로기를 산포하는 죽은 말들이라는 데서 온다. 거기엔 새로운 것이 전혀 없다. "이 도시에서 우연은 격렬한 사랑을 수반할 때가 있다." (우리가 다시 만날 때) 무엇인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본질을 먼저 따질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을 먼저 얻어야 한다. 의도하지 않은 만남, 주체가 기획하고 장악하고 조절하지 않은 만남만이 사랑을 낳는다. 진정한 타자가, 내 구애의 상대자가 먼저 형체를 갖추어야 한다. 타자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야 한다. 시인이 다성성을 목표로 한 것은 이런 까닭이다. 그의 시는 여러 목소리가 한데 맞부딪치는 전쟁터(목소리끼리 투쟁할 때 말이다)이거나 장터(목소리끼리 교환될 때 말이다)다. 장석원의 시에서 어조와 화자 분석이 어렵고, 시 전체를 관할하는 비유적인 틀이 마련되지 않는 것은 이런 사정에서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타자란, 주체의 발언에 종속되지 않는 이질적인 발언자들이다. 이질적인 발언은 주체의 것과는 다른 세계관, 다른 계급의식, 다른 이데올로기를 시에 끌고 들어온다. 여러 세계가 충돌하고 뒤섞이고 공명하고 배척하여 화음이나 불협화음을 내는 세계가 여기에 있다. 장석원이 이 세계의 발언자로 아니키스트를 내세운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아나키스트는 조직과 체계를 인정하지 않으며(시적 실천의 측면에서도 물론 그렇다), 그래서 위계를 거부하고(일례로 그에게는 하위문화와 상위문화의 구별이 없다), 개인적 실천으로 혁명을 도모하고자 한다(그에게는 전복 자체가 사랑이다). 시인은 아나키스트의 모습으로 타자를 찾아 나섰다.

 

그는 금속이 아니며, 그는 마르크스의 노동자가 아니며,

그는 나의 애인도 아니고 타인도 아니고, 사람 앞의 사람일

뿐인데, 나는 그를 자꾸 설명하려고 한다

그를 자동사로 기술하는 자는, 그가 아니라 나이다. 기호

였다가 상징이 될 real man의 운명, 한때 '리얼'은 고유 형

용사였다

사라진 그가 나와 서술어 사이에 자리 잡는 방법, 저 불

빛 속에 그를 위치시키는 방법, 현실이 말에 뿌리를 내리는

방법, 예컨대

"나는 그를 사랑한다" 혹은 "나는 어서 퇴근하라고 그에

게 요구한다"   

 

-<내 마음의 아나키> 부분

 

'아니다'라는 말로 기술되는 대상들에는 주체의 시선이 스며들었다. 그는 금속 노동자지만, 그것이 그의 본질은 아니다. 그는 한 아이의 아버지일 수도 있으며, 한 아내의 남편일 수도 있다. 그는 나와 가까운 애인도 아니고 나와 무관한 타인도 아니다. 내 친소(親疎)관계로 그를 설명할 수 없다. 그는 내가 사람이듯 내 앞에 선 다른 사람이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타자다. 그러나 내가 그를 나와 무관한 "자동사"의 세계에 두는 것은 여전히 내 자신이다. 

 

나와 격절되어 있다는 것으로, 그를 무심의 세계로 내친 것이다. 거기에서는 타자가 해명되지 않는 물자체(物自體)로서 있을 뿐이다. 나는 그를 내 호명의 형식이 아닌, 만남의 형식으로 대면해야 한다. 내가 불러낸 "그"는 기호지만, 내 앞에선 저이는 진짜("real")다. 그의 속성을 설명하는 "고유 형용사"는 내게 속한 게 아니라 그이 자신에게 속한 것이다. 상징은 다른 무엇에 종속되지 않고 다른 무엇을 거느린다. 기호로서의 그가 내가 불러낸 가짜 타자라면, 상징으로서의 그는 그 스스로 존재하는 진짜 타자인 셈이다.

 

그를 진짜로 나와 관계 맺게 하는 길이 있다. "현실이 말에 뿌리를 내리는 방법." 하나의 말이 다른 말에 걸치면서 진정한 타자로서의 그를 데리고 오는 방법, "저 불빛"으로 지칭되는 세계의 어느 한곳에 그의 자리를 마련해주는 방법. 그게 사랑이다. "나는' 과 "사랑한다"라는 말 사이에 그가 자리를 잡아야 비로서 하나의 고백문이 완성된다. 아니면 "나는"과 "어서 퇴근하라고 요구한다"라는 말 사이에 그가 놓여야 온전한 지시문이 완성된다. 목적격이든 여격이든, 그는 드디어 나와 온전한 관계를 맺는다.

 

장석원의 시에서 타자와의 진정한 만남을 이르는 말이 사랑이다. 장석원의 시의 다성적인 성격이 목표로 하는 자리도 바로 여기다. 이 사랑의 형식을 짚어보자. 첫째, 사랑은 노동이다. 앞 시에서 말하듯, 힘든 노동을 덜어주는 것이 사랑이다. 실천하는 사랑이 백 마디 말보다 더한, 진짜 사랑이다.

 

거기 성북구 동선동 43번지 공사장의 콘크리트 펌프 앞

에는

모래와 시멘트와 자갈과 철근과 두 남자

그때 살의에 젖어들었던가

철근을 들고 있는 이씨의 선글라스와 흙손을 들고 있는

박씨의 이마에 분홍 수건

유월의 태양 아래, 땀방울 땀방울

흘러내리는 두 방울 

뒤엉켜 싸우고 있는 두 남자

 

-<최초의 콘크리트>

 

"유월의 태양 아래" 콘크리트 타설 작업에 열중하는 두 남자가 있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의 고된 노동은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시인은 이들이 "흐물거리다가 콘크리트 속 철근처럼 빨려들었"다고 말한다. 그 다음 시인은 이들을 찾아 나선다. 

 

기둥 속에서 나는 물컹하고 푸르다. 콘크리트 속으로 들

어간다. 그들을 찾아낸다. 폼페이의 뒤엉킨 육체들. 그들은

사랑을 나누듯 싸우고 있다.

 

-<최초의 콘크리트> 마지막 부분

 

굳어버린 화산재가 서로 껴안은 폼페이의 연인을 불멸로 만들었듯, 굳어가는 콘크리트가 노동하는 두 육체를 변치 않는 사랑의 아이콘으로 바꾸었다. 마지막 말을 이렇게 바꾸어도 좋을 것이다. "그들은 싸움을 하듯 사랑을 나누고 있다." 그러니 "콘크리트"는 노동의 현장을 지시하는 말이면서 구체적인concrete 사랑의 현장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사랑과 노동이 동일시되는 것은, 그 둘만이 진정한 생산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장석원의 시에서 노동자의 모습에 연인의 모습이 자주 포개지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둘째로 사랑은 혁명이다. "re-volution, 다시 회전하면, 그대와 내가 벌인 사랑의 육박전." 한 개인에 대한 지극한 열망이 사랑이라면, 한 체제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혁명이다. 그것은 그대와 내가 한데 끌어안고 뒹구는 일이다. 사랑은 육체성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은 그래서, 지극한 사랑의 법열을 이르는 말이다. <중략>

 

우리의 만남. 부자연스런 체위. 시의 혁명,

술과 사상, 노동자와 시인.

우리와 그들의 사랑은 소도미야

소돔 성이 소도미 때문에 망하지는 않았어.

사랑의 힘 때문이야. 서풍이 분다.

 

혁명이 뭐겠어. 우리 결혼할래.

헬로와 헬로와 꽃들이, 헬로와 헬로와 우리들에게,

 

-<젊고, 어리석고, 가난했던>부분

 

"시와 혁명"  "술과 사상"  "노동자와 시인"의 결합은 어색하다. 시로는 혁명을 일으킬 수 없으며, 술에 취해서는 사상을 설파할 수 없고, 시인은 생산하는 자가 아니다. 이들의 사랑을 육체의 언어로 옮긴다면 "부자연스런 체위" "소도미"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망조가 아니다. 그게 바로 "사랑의 힘"이다. 혁명이 별거이겠는가? 서로 어울리지 않는 자들끼리의 평등한 결합을 이르는 말이 혁명이 아닌가? "우리 결혼할래." 이런 고백이 바로 혁명이다. 모든 위계와 등차를 인정하지 않는 만남이니까. 동정녀 "마리아"가 기생 "황진"이 되는, 그런 "에스 엔 엠"의 만남 ( 비결정적인 : S-M의; 한판 승부) 

 

희미한 영혼을 지녔으므로 한증막에서 수련할지니, 온탕

과 열탕 냉수 폭포를 오가는 당신의 섹트주의, 결연한 이별

과 만남. 앗 뜨거라 우워 시원하다 사이에서 당신의 감각에

착오가 생길 때마다 인생 유전 누굴 기다리나 낙랑 18세

폭포 밑에서 폭포 줄기 같은 정력을 꿈꾸며 성기를 단련시

키는 당신의 ()과 나의 불온한 상상 사이에, 어떤 설레임.

탕에 앉아 꿈꾸는 작은 혁명, 사랑과 청춘을 당신에게.

 

-<문화목욕탕> 부분

 

이번에는 목욕탕에서 체력을 단련하는 한 중년 남자가 사랑의 대상이다 그에게는 "온탕과 열탕 냉수 폭포를 오가는" "섹트주의"가 있다. 다르게 말해서 그는 셋으로 나뉜 자신의 섹트를 오가는 "작은 혁명"을 실천하는 중이다. 뜨거움과 차가움 사이에서 그의 감각이 흔들릴 때마다 인생은 유전하고 젊음은 순간적으로 그를 찾아온다. "사랑과 청춘을 당신에게." 광고의 일절이 그의 열망을 설명하는 혁명의 구호다.

 

셋째로 사랑은 신파다. 앞서 든 인용문에서도 여럿 나오지만, 장석원의 시에는 숱한 인유가 등장한다. 그 가운데 가장 흔히 인용되는 게 대중가요다. 신파의 언어가 비천한 것은 아니다. 상위 하위 문화라는 구분법도 혁명의 대상이라는 것은 불문가지다. 시인에게 사랑은 지극한 순정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신파의 언어는 세속에서 통용되는 타자의 언어이며, 시인은 바로 그 언어로 순정을 말한다. 

 

이별만 남겨놓던 뻔한 스토리 앞에서 울음을 왜 참아야 하

는가에 대해 약술하라고 하신다면, 달 밝은 밤 노닐다 들어

오니 다리가 넷이어라. 얄미운 사람이여, 참혹한 적의 혹은

인내의 미덕을 讚  讚  讚하라. 한 잔 또 한 잔, 취하기는 마

찬가진데, 빼앗겨도 할 수 없는데, 필요한 것은 고해성사.

 

-<타클라마칸에 내리는 눈> 부분

 

김지애의 <얄미운 사랑>과 <처용가>에서 시작하여 편승엽의 <찬찬찬>을 거쳐 사랑의 하모니의 <별이여 사랑이여>에 이르는 여러 노래들이 인용문을 가득 채우며 흘러간다. 이 노래들은 이를테면 <삼국유사>를 가득 채운 일연의 찬(讚)과  같은 것이다. 이 시대가 필요한 것은 "고해성사"다. 다르게 말하면 진정한 고백이다. "타클라마칸"은 사랑을 잃은 자의 내면을 설명하는 지명이다. 신파는 순정을, 순정은 지극함을, 지극함은 사랑의 바로 그 열정을 낳는다. 장석원의 인유는, 바로 이 사랑의 모라토리엄을 극복하기 위해 세속에서 얻어온 빚이다. 문어(文語)와 뽕짝이 이렇게 해서 만난다. 서로 다른 세계가 부딪쳐 한데 얼려 뒹구는 사랑의 현장을 낳는다. 이 신파의 언어 너머에 공식화된, 죽은, 증오와 거짓으로 가득 찬, 언어가 있다. <중략>

 

스스로 어두워지는 聖畵를 보았는가

구경꾼들이 모여들었고, 최후에 이단 옆차기가 있었다

누군가에게 호소하고 싶었을 뿐이다. 붉은 모습으로, 입 벌

린 채.......

모든 것이 비참하고 절망적이었지만, 하느님도 없고 강림

할 성령도 없다는 듯이 인순이와 고함과 비명. 찬란한 고해

성사 후에...."정답게 지저귀는 저 새들 내 맘 알까."

 

 

"가난한 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는 멸망시키지 않으려는 집착의 징표. 당신은 절망에서 소

망으로, 염려에서 위로로, 미움에서 사랑으로 이사를 갔다.

당신이 행운아라고 생각하면 나에게 오라. 살갗을 긁는

바람처럼 오라. 와서 나를 집으로 데려가라. 외로워 우는

늑대처럼 서두르라.

-<호프 '장밋빛 인생'에서 뒹구는 두 남자>부분

 

사랑이 혁명이라면, 싸움이 사랑의 방법론이 되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성과 속이, 성경의 일절과 인순이의 노래가 여기서 만난다. 여기, 지극히 세속적인 성화(聖畵)가 있다. 마지막 이단 옆차기에 맞아 혼곤해가는 정신은, 그때 들리던 노래에서 제 본심을 찾아낸다. "저 새들"은 "내 맘 알까" 몰라. 그렇게 쓰러진 자에게, 십자가 위에서 죽어간 예수의 모습이 겹친다. 그리스도는 마지막 죽음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염려에서 위로로, 미움에서 사랑으로 이사를 갔다." 쓰러진 자는 그렇게 간절했고, 그렇게 구원을 갈망했고, 그래서 마침내 사랑을 얻었다. 미워서 싸웠으나 먼저 쓰러짐으로써 사랑을 얻었다. 누군가 나를 집으로 데려간다면, 바로 그가 내 구원자다. 가난한 자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나, 사실은 그로써 자신들의 삶을 '장밋빛 인생"으로 바꾸어냈다. 여관에서 한데 얼려 뒹군 자리가 바로 사랑의 자리 아니었는가. 들어와 자리 보니, 놀랍게도, 다리가 넷이었지 않은가. "지나간 모든 추억에 선전포고를 했던 그대 그리고 나. 그대와 나눈 혁명적 사랑."  지난 모든 추억과 싸우는 사랑은 바로 지금 새로운 추억을 만드는 사랑이다. 사랑은 그 투쟁에서 나온다.

 

장석원 시의 다성적 성격이 목표로 하는 타자의 복원과 복권에 관해서 말했다. 이 다성적인 목소리들을 연계하는 데에 어떤 원칙이 없을 수 없다. 앞서 말한 인유도 그런 연상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연계의 방식이다. 문자들의 무한 연쇄도 그런 방법 가운데 하나다. <후략>

 

 

장석원 시집, <아나키스트> (2005, 문지)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