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유 33.5 x 24.5, 종이에 채색, 2001 盧淑子화백
놓았거나 놓쳤거나 / 천양희
내가 속해 있는 대낮의 시간
한밤의 시간보다 어두울 때가 있다
어떤 날은 어안이 벙벙한 어처구니가 되고
어떤 날은 너무 많은 나를 삼켜 배부를 때도 있다
나는 때때로 편재해 있고
나는 때때로 부재해 있다
세상에 확실한 무엇이 있다고 믿는 것만큼
확실한 오류는 없다고 생각한지 오래다
불꽃도 타오를 때 불의 꽃이라서
지나가는 빗소리에 깨는 일이 잦다
고독이란 비를 바라보며 씹는 생각인가
결혼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이혼에 성공한 것이라던
어느 여성작가의 당당한 말이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고 내게 중얼거린다
삶은 고질병이 아니라
고칠병이란 생각이 든다
절대로 잘못한 적 없는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뿐이다
물에도 결이 있고 침묵에도 파문이 있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사람이 무서운 건 마음이 있어서란 것도 미리 알았을 것이다
언제부터였나
시간의 넝쿨이 나이의 담을 넘고 있다
누군가가 되지 못해 누구나가 되어
인생을 풍문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이지
돌아보니 허물이 허울만큼 클 때도 있었다
놓았거나 놓친만큼 큰 공백이 있을까
손가락으로 그걸 눌러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쓰고야 말겠다
계간 『애지』 2009년 겨울호 발표
근래에 나는 시인의 프로필에서, 그녀가 정현종 시인과 결혼생활을 했다는 이력을 읽었다. 그리고 프로필에 이혼 년도를 올린 것도 보았다. 사뭇 놀라웠다. (공인의 사생활을 들먹일 의도는 아니다) 어쨌든, 놓았거나 놓쳤거나 그 어느 쪽이 그 어느 것이 먼저였든가를 떠나 이별은 짙은 아쉬움이다. 그러나 한켠에 놓인 공백을 보는 시선은 크고 당당하고 자유롭기도 하다. 시인의 시를 오늘은 선입견을 두면서 본다. 대낮이 한밤의 시간보다 어두운 사람들은 시인이나 시 안에 주인공들뿐이 아닐 것이다. 대낮에도 등불을 들고 다녔던 디오게네스도 그랬고 자신의 연인에게 달려가고픈 마음 간절했던 형광 불빛 아래서의 새벽 시인도 그러했을 것이다. ‘나의 아침은 당신의 밤보다 훨씬 어둡습니다’.
엉성하게 읽었던 시를 한 번 더 읽는다. 철필로 새기듯 눌러 담은 그녀의 반성과 위무慰撫의 입김이 따스하고 영롱하다. 불꽃도 타오를 때 불의 꽃이라서!... 그래, 큰 공백 안에서 활활하게 걷고 있는 그녀의 시혼詩魂을 지켜보자. 지나가는 빗소리에 깨는 일이 잦은, 나는 아직 어린애니까.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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